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1890~1981)

다석 류영모는 온 생애에 걸쳐 진리를 추구하여 구경(究竟)의 깨달음에 이른 우리나라의 큰 사상가이다.젊어서 기독교에 입신(入信)했던 다석은 불교와 노장(老莊),그리고 공맹(孔孟)사상등 동서고금의 종교.철학 사상을 두루 탐구하여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뚫는 진리를 깨달아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정신적인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다석은 우리나라 3천재,5천재의 하나라는 말을 들었고,평생을 오로지 수도와 교육에 헌신하면서 일생동안 '참'을 찾고 '참'을 잡고 '참'을 드러내고 '참'에 들어간 '성인'이다.

이승훈,정인보,최남선,이광수,문일평 등과 교유했고, 김교신, 함석헌, 이현필, 류달영 같은 이들이 다석을 따르며 가르침을 받았다.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우리나라에서 열린 세계철학자대회(2008년)에서 제자인 함석헌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소개될 만큼 다석의 사상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1890년 (0세)

1890년 3월 13일(경인년 2월 23일) 서울 남대문 수각 다리 가까운 곳에서 아버지 류명근(柳明根) 어머니 김완전(金完全) 사이 형제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나다.

1896년 (6세)

서울 홍문서골 한문서당에 다니며 통감(通鑑)을 배우다. 천자문(千字文)은 아버지께 배워 5세(만 4세) 때 외우다.

1900년(10세)

서울 수하동(水下洞) 소학교에 입학 수학하다. 당시 3년제인데 2년 다니고 다시 한문서당에 다니다.

1902년(12세)

자하문 밖 부암동 큰집 사랑에 차린 서당에 3년간 다니며 『맹자(孟子)』를 배우다

1905년(15세)

YMCA 한국인 초대 총무인 김정식(金貞植)의 인도로 기독교에 입신(入信), 서울 연동교회에 나가다. 한편 경성일어학당(京城日語學堂)에 입학하여 2년 간 일어(日語)를 수학(修學)하다.

1907년(17세)

서울 경신학교에 입학 2년 간 수학(修學)하다.

1909년(19세)

경기 양평에 정원모가 세운 양평학교에 한 학기 동안 교사로 있다.

1910년(20세)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북 정주(定州) 오산학교(五山學敎) 교사로 2년 간 봉직하다 이때 오산학교에 기독교 신앙을 처음 전파하여 남강 이승훈이 기독교에 입신하는 계기가 되다.

1912년(22세)

오산학교에서 톨스토이를 연구하다. 일본 동경에 가서 동경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 간 수학(修學)하다. 일본 동경에서 강연을 듣다.

1915년(25세)

김효정(金孝貞, 23세)을 아내로 맞이하다

1917년(27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과 교우(交友)하며 잡지 「청춘(靑春)」에 '농우 (農友), '오늘' 등 여러 편의 글을 기고하다.

1919년(29세)

남강 이승훈이 3·1운동 거사 자금으로 기독교 쪽에서 모금한 돈 6천 원을 맡아 아버지가 경영하는 경성피혁 상점에 보관하다.

1921년(31세)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후임으로 정주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 1년 간 재직하다.

1927년(37세)

김교신(金敎臣) 둥 「성서조선(聖書朝鮮)」지 동인들로 부터 함께 잡지를 하자는 권유를 받았으나 사양하다.그러나 김교신으로부터 사사(師事)함을 받다.

1928년(38세)

중앙 YMCA 간사 창주(滄柱) 현동완의 간청으로 YMCA 연경반(硏經班) 모임을 지도하다. 1963년 현동완 사망(死亡) 시까지 약 35년 간 계속하다.

1935년(45세)

서울 종로 적선동에서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로 농사하러 가다.

1937년(47세)

성서조선」 잡지에 삼성 김정식 추모문 기고하다.

1939년(51세)

마음의 전기(轉機)를 맞아 예수정신을 신앙의 기조로하다. 그리고 일일 일식(1日일1食)과 금욕생활을 실천하다. 이른바 해혼(解婚) 선언을 하다. 그리고 잣나무 널위에서 자기 시작하다.

1942년(5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일제(日帝) 종로 경찰서에 구금되다. 불기소로 57일 만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나다

1943년(53세)

2월 5일 새벽 북악 산마루에서 첨철천잠투지(瞻徹天潛透地)의 경험을 하다.

1945년(55세)

해방된 뒤 행정 공백기에 은평면 자치위원장으로 주민들로부터 추대되다

1948년(58세)

함석헌(咸錫憲) YMCA 일요 집회에 찬조 강의를 하다.1950년(60세) YMCA 총무 현동완이 억지로 다석 2만2천 일 기념을 YMCA회관에서 거행하다.

1955년(65세)

1년 뒤 1956년 4월 26일 죽는다는 사망예정일을 선포하다. 일기(『多夕日誌』) 쓰기 시작하다.

1959년(69세)

『노자(老子)를 우리말로 완역하다. 그밖에 경전의 중요 부분을 옮기다

1961년(71세)

12월 21일 외손녀와 함께 현관 옥상에 올라갔다가 현관바닥에 낙상(落傷), 서울대학병원에 28일 동안 입원하다

1972년(82세)

5월 1일 산 날수 3만 일을 맞이하다.1977년(87세) 결사적인 방랑길을 떠나 3일 만에 산송장이 되어 경찰관에 업혀 오다. 3일 간 혼수상태에 있다가 10일 만에 일어나다.

1981년(91세)

1981년 2월 3일 18시 30분에 90년 10개월 21일 만에 숨지다.

  출처-다석류영모(박영호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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