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15 18:49

까라준다는 것

조회 수 7301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걱정마! 내가 까라주께..

‘야! 너무 걱정하지마. 내가 시험 대충 봐서 깔아주께. 응’
무심코 아이 방문을 지나치던 처제는 휴대폰에 소근 대고 있는 딸아이의 비밀스런 목소리에서 천둥소리를 들었다. 이 무슨 말인고? 수능이 내일 모렌데... 촌음을 아껴 공부를 해야 할 딸아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말이다. 처제는 그냥 꼭지가 돌아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처제는 딸아이 대학합격을 위해 십 수 년 넘게 앓고 있는 류머티즘에도 새벽마다 100일 기도에 참석하여 매일 108배 절을 하고 그도 모자라 얼마 전엔 하루에 1000배씩 3일간 3000배도 하였다고 한다. 불심이 가득한 처제는 아니지만 그렇게 해야만 딸애가 잘 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자기 한 몸 지탱하기 힘든 상태이지만 절을 하고 기도를 드렸던 것이다. 그런데 딸애는 다른 친구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겠다고 하니 그 배신감에 어떻게 주체를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제 이모가 심판으로 서고 대판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강적 엄마의 핵 펀치 공격에 조막만한 반칙을 시도하려던 조카애는 무참하게 깨져 밤늦도록 흑흑 울었다고 한다. 수능 3일 전에 말이다.

   그러나 조카애 말을 들어보면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그러니까 조카애는 수학에는 자신이 있는데 논술에는 도대체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수시 1차에 수능성적에 상관없이 합격을 해 놓은 상태로, 엄마가 바라는 수시 2-2군에는 지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 학교에는 논술고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기는 이미 합격은 해 놓았지만 이번 수능성적에 당락이 달려있는 친구가 괴로워서 전화를 하였는데 그냥 제 처지만 내세울 수 없으니 친구를 위로하려는데 하필이면 엄마가 방문을 지나다 들어버린 것이다.

깔아준다는 것.
이것은 나무랄 수 없는 신성한 뜻을 포함하고 있다. 사실 고등학교 다닐 때 내 가치관이 이 깔아주는 것이었다. 깔아준다는 것은 밑거름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피어나는 꽃봉오리로 자리매김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꽃봉오리를 피게 하는 거름이 되겠다는 뜻이요, 유비 현덕이 되기보다 관우, 장비, 제갈량이 되고 싶다는 뜻이요,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말했듯이 진주목걸이에 진주가 아닌 실이 되겠다는 뜻이 바로 이 깔아 준다는 뜻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고결한 의미가 숨어 있는가 말이다. 나투어 나를 드러내지 않고 남을 드러나게 하려는 이 마음, 이 마음이 이웃을 이웃으로 인정하는 진정한 사랑의 마음인 것이다.

조카애 꿈은 선생님이다. 나는 이 조카애가 대학을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어 이 아름다운 마음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가르쳐 주었으면 한다.

‘깔아주라는 것, 내가 앞서지 않고 남을 앞서게 하려는 것, 내가 드러나지 않고 다른 아이가 드러나게 나는 숨어라는 것...’ 그러면 그 다음날로 보따리 싸야한다고요? 글쎄요. 하 하.

연희! 파이팅!

수능 끝난 조카 연희를 생각하며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44 이규자 개인전 안내 file 관리자 2013.03.10 22833
443 이 참에 모병제로 가자 장동만 2007.01.15 4905
442 이 여름 한가운데서.... 1 나효임 2008.07.25 13493
441 은혼식 민항식 2006.01.18 5330
440 윤회 2 나효임 2006.04.14 5859
439 유영모와 화이트헤드(클레어몬트 강연 내용 자체번역) 3 박영찬 2014.12.31 3348
438 유영모-함석헌 선생 제자들 힘합쳐 ‘씨알재단’ 창립 1 file 김병규 2007.10.10 9323
437 유영모 정신의 핵심 - 박영호 관리자 2010.09.01 13176
436 유영모 선생님의 시조에 대한 질문입니다.. 2 백기홍 2006.06.04 7528
435 유영모 선생과 함석헌 선생의 생명사상 재조명 김병규 2005.11.24 4923
434 유기종원장 안내말씀... 관리자 2014.09.13 3553
433 유기종 원장 감사와 인사.. 1 관리자 2015.05.25 893
432 유기종 교수 싸이트 관리자 2011.06.04 18766
431 원정 출산과 국적 포기 장동만 2005.05.27 5190
430 웃고 있을뿐.... 좋은책나눔 2006.01.07 5022
429 우리의 마음 안에선 예수와 석가가 만날 수 있지요 - 중앙일보 2009-5-26 file 관리자 2009.06.03 11083
428 우리말은 뜻이 나오는 론리적 구조가 있습니다 - "말이 씨가 된다" 프로그램 file 리감규 2007.08.19 9059
427 우리가 만나야 할 하나님 1 file 길잃은나그네 2011.04.02 20981
426 우뚝 선 씨알 장동만 2005.02.08 7131
425 우기기와 따지기 김진웅 2009.09.20 9339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29 Next
/ 2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