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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시월 15일, 도농엑스포에서 귀촌한 선배로서 귀촌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얘기한 내용입니다.
내용이 좀 깁니다. 행여 귀촌에 관심이 계신분을 위해..

이름 없는 들풀로 살아가기


경남 함안 길벗농원 김진웅



시골 찬가


봄이면 지저귀는 새소리에 잠을 깨고 일어나 밭을 갈고,

부드러운 흙 헤집어 씨앗뿌려 놓으면

봄비에 땅을 이고 돋아 나오는 생명의 신비를 직접 볼 수 있고,

여름이면 성성하게 자란 곡식들 쳐다보며 가을 기다리는 재미,

가을이면 영근 알곡들 하나 둘씩 거둬들이는 재미,

겨울이면 따뜻한 온돌방에 등 지져대며 군밤 먹는 재미.


수염이 길어도 그만,

머리를 감지 않아도 그만,

이빨에 상추 잎이 끼어있어도 그만,

월요일 업무회의도 사장 잔소리도 없는 곳,

걸어서 가는 직장이라 막히는 출퇴근 길 걱정도 전혀 없는 곳,

높고 푸른 하늘엔 흘러가는 뭉게구름 두어 점.

언덕엔 분홍, 빨강, 흰색의 코스모스가 가는 허리를 흔들어대고,

길게 쳐놓은 빨래 줄엔 고추잠자리가 오수에 졸고,

주홍빛으로 영글어가는 감나무 과수원 아래 풀밭엔 오리, 닭이 한가롭고,

가끔 들리는 개 짖는 소리, 닭 울음소리 외엔 들리는 게 없어

자동차 소음도 반가웁게 느껴지는 한적한 곳.


지금 이 가을엔

하늘이 태풍없는 여름을 주셔,

들판엔 알곡들이 누른빛으로  물들어가고,

진홍빛 색색으로 단장한 고추는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며,

꼬투리가 토실토실 알이 박힌 콩은 따가운 가을 햇살에 영글어가고,

고구마 줄기는 제 이랑도 부족하여 다른 이랑까지 다리를 뻗고,

비닐하우스 안에 참깨는 제 몸 말려 씨앗을 토닥토닥 뱉어내고,

흐르는 땀을 소매로 훔치며 허리를 펴는데,

때 맞춰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입 벌리고도 한껏 들이킬 수 있는 곳.


이런 곳이 시골.

다만, 아쉬운 것은 시골의 삶을 절반 정도밖에 얘기하지 못한 것.


 시골에서 산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그야말로 누가 불러주지도, 쳐다봐 주지도 않는 그런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남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고, 칭찬받고 이름 날리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시골에 가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겠지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부추기는 억대의 부농을 꿈꾸는 분들이나, 은퇴 후 연금이나 현금자산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서 그저 2, 3백 평 텃밭 가꾸며 유유자적한 전원생활을 즐길 사람이라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할 얘기는 그저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처럼 제자리 지키며 농사로서 먹고 살려는 분들을 위한 얘기입니다. 그리고 시골에서 7년간 살면서 느끼고 경험한 지극히 제 개인의 생각과 생활에 대한 얘기이기에, 지금 이 나라 농사꾼들의 보편적인 얘기는 아니라는 것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 나의 귀촌 동기


  저는 학교를 졸업한 후 직장생활만 20여년 넘게 도회지에서 하였습니다. 그러던 제게도 1999년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제가 몸을 담고 있던 조직은 항상 같은 일에, 같은 상사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작은 조직이었습니다. 소위 직무전환배치나 이동이 없는 그런 조직이었습니다. 어쩌면 안정된 조직이니 그야말로 공무원처럼 철밥통 조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게 그저 안정되고 편한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취업을 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볼 때는 배부른 소리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직장생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다만 먹고 살기 위해 개미 쳇바퀴 돌듯 직장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나 자신을 참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시골에 가겠다며 뿌려놓았던 씨앗이 서서히 내 가슴속에서 싹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실상사의 도법 스님이 주관하시는 인드레망에도 기웃거리며 실상사 귀농학교에도 가보고, 성천문화재단에서 박영호 선생님의 ‘다석 류영모’ 강의에도 참석하고, 법정 스님이 회주로 계시는 길상사 4박5일 수련회, 통도사 3박4일 수련회 따위에 다니면서 내 삶의 정체성을 찾아보려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 석가, 노자, 장자, 톨스토이를 만나고 간디, 비노바 바베, 오쇼 라즈니쉬, 까비르, 소로우, 스코트니어링부부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먼 학창시절 보았던 갈매기 조나단을 다시 만나면서, 그 동안 내가 살아온 몸짓이 결국은 어부의 뱃전에 서성이면서 어부가 던져주는 고기를 받아먹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천규석 선생이 말한  ‘배부른 머슴으로 살 것인가, 배고픈 주인으로 살 것인가 ?’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린 배를 안고서 더 높게 더 빠르게 나는 방법을 연마하던 조나단과 같은 삶을 살고자 귀농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시골에 가야겠다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러자 아내도 50살까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시골로 가지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나이가 되면 용기가 없어져 그냥 어부가 던져주는 고기에 생명을 맡긴 갈매기처럼 나 역시 정년까지 그냥 지내게 될 것 같아 올해 내로(2001년) 시골로 가야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말이 없었고 안방엔 싸늘한 공기만 여러 날 흘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하여 아내와 다시 마주앉았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나 요즘 매일 기도하는 심정으로 회사에 다니고 있어!’라 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말없이 건너 방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고 밤늦게까지 나오지 않았습니다. 걱정이 되어 가서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내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두말 않고 ‘그러세요.’라 했습니다. 거기서 아내는 혼자서 그간 내 심정을 헤아리고 울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내가 많이 힘들 때 내 심정을 헤아려준 아내가 무척 고마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저도 아내에게 참 몹쓸 짓을 했다 싶어 마음이 아픕니다. 귀농을 하겠다고 말을 꺼낸 지 3년 만에야 겨우 내키지 않는 아내의 동의를 받은 것입니다.


 귀농하려는 많은 분들 대부분이 가족 간 갈등을 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골의 삶이란 것이 꼭 힘든 일을 해서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 시골에 산다는 그 자체가 불편하고 힘이 들기에 여자들은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부부 한쪽이 양보를 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 따로 사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결혼한 이상, 부부가 함께하는 행복이 더 중요하지 나 혼자만의 행복이 더 중요한 것 아닐테니 말입니다.


그리하여 2001년 10월 31일자로 퇴직 사유에 ‘귀농’ 딱 두 글자만 써 퇴직원을 제출하고  그해에 시골로 내려왔습니다.


2. 왜 귀촌이어야 하는가?


   가. 씨로 살아가기


함석헌 선생의 스승으로 더 잘 알려진 다석 류영모는,  사람답게 살려면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이마에 땀 흘리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나라 조선이 망한 것도 따지고 보면 불한당(不汗黨), 그러니까 이마에 땀 흘리기 싫어하는 양반들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관존민비(官尊民卑) 생각이 나라를 망하게 하였는데도 그 생각을 깨끗이 버리지 못하는 것을 통탄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석 선생님은 출세하여 높은 자리에 오를 생각으로는 대학에 가지마라 하였습니다. 대학에 가서 출세를 하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힘들고 귀찮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고 자신은 호의호식하겠다는 말이니 이 또한 조선시대 양반과 다름없는 행태로 본 것입니다.

남의 불행을 딛고 쟁취한 행복(유포리아)으로는 살아가지 않겠다는 정신이 있어야 진정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 자본주의(資本主義)와 자본주의(自本主義)


 씨로 산다는 것은,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에서 배부른 머슴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自本主義)의 신념을 가지고 배고픈 주인으로서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도회지는 자본주의(資本主義)의 꽃이 피는 곳이라 죽임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행복을 위해선 그 누군가가 낙오되거나 불행해져야 내 행복과 연결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自本主義)의 삶을 살 수 있는 시골은 살림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는 곳입니다. 굳이 경쟁해서 남을 이길 필요가 없는 곳입니다. 다른 사람이 좋은 농산물을 많이 생산한다고 해서 내가 죽거나 불행해지지는 않습니다. 값이야 덜 받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풍년 농사로 인해 내가 불행해지거나 죽지는 않는다는 얘깁니다. 풍년이 되면 될수록 다른 사람의 삶 또한 더 윤택해 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시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회지는 그렇지 않잖아요? 다른 이가 더 잘된다는 것은 경쟁에서 내가 밀린다는 의미로 내가 도태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되지 않습니까? 

 한 사회가 공존할 수 있는 살림의 한 축으로써 시골의 역할을 생각한다면, 지금처럼 시골이 죽어가도록 방치 또는 가속을 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면 시골이 무너지면 도회지의 삶 또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효용가치로만 시골이 평가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 톨스토이와 같은 삶


  톨스토이는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중에서,

  ‘ 일을 싫어하지 않고 즐거워하는 이에겐 자기 몸 밖의 사유권, 즉 다른 사람의 수고를 이용할 수 있는 권리는 무익할 뿐 아니라 오히려 속박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내 먹을 것을 짓기를 좋아하거나 그 일에 익숙해져 있다면 다른 이가 내 대신 그 일을 해 준다면 나는 내 일을 빼앗기는 것으로 내 스스로 한 것보다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가공적인 사유권을 가진다는 것은 이러한 사람에게는 쓸데가 없다.

    노동을 자기 생활로 알고 있는 사람은 노동의 즐거움으로 삶을 채우고 있다. 만일 사람의 삶이 일로 채워지고 그 사람이 일하고 쉬는 데서 유쾌함을 안다면 화려한 가구나 장신구가 필요 없어진다. 일을 삶의 보람과 기쁨으로 아는 이는 남의 수고에 의해 자신의 일을 줄이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삶을 일로 보는 이는 기능과 근면과 인내를 얻음에 따라 차차 더 큰 일을 자기의 목적으로 하고 그것으로 인해 더욱 더 삶을 알차게 할 것이다.

  많은 노동자가 쓰레기를 나르거나 뒷간 청소를 하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요, 동포에게 그것을 나르게 뒷간통, 쓰레기통을 채우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 허름한 신발을 신고 손님으로 가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고 신발 없는 이들의 옆을 고급 구두를 신고 지나가는 것이 부끄럼이라 생각하게 된다. 외국어나 최근의 일을 모르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라 빵을 먹으면서 빵을 만둘 줄 모르는 것이 부끄럼이라 생각하게 된다. 더럽혀진 손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끄럼이 아니라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 라 했습니다.


어떤 이는 종교적인 이유로 톨스토이를 싫어하지만, 농사꾼 처지에서 보면 귀족의 신분을 마다하고 스스로 농사꾼이 된 톨스토이는 힘들고 비천한 생활로 살아가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자긍심과 희망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는 ‘항상 이기기만 하면 바보가 된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스스로 가난해 보지 않고, 고통을 받아보지 않고, 패배해 보지 않는 사람은 결국 반쪽의 삶만을 볼 수 있기에 이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시골의 삶은 우리를 먼저 경제적인 면에서 약자로 만듭니다. 그리고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힘든 일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결국 시골의 삶은 어쩌면 이 사회에서는 이긴 자가 아니라 진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고통받는 자, 패배한 자, 진자의 고통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가야 하기에 바보로만 살아갈 뻔 했던 내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합니다.


3. 귀촌을 위한 조건


 저는 귀농에 앞서 귀농의 목표를 ‘자급자족,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성공’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무늬만 농사꾼이 아니라 정말로 농사로 끼니를 이어가는 농사꾼’로 살자고 다짐했습니다. 성장개발을 미덕으로 생각하고 있는 상업자본주의는, 목표를 높고 크게 잡으라고 하지만 자본(自本)으로 살려면 목표가 낮을수록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資本을 좇아가면 결국 自本을 잃어버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낮은 논두렁에서는 쉽게 내려설 수 있지만, 언덕 높은 구릉에서는 잘못 떨어지면 치명상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농사를 지어 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농협 빚은 가능한 내지 않는다.’ ‘소득 범위 내에서 지출 한다.’‘가능하면 현금 지출이 되지 않는 생활을 한다.’ 라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정착을 하면서도 집을 꾸미기 위해 큰 지출은 하지 않았습니다.  집수리 비용도 형님과 2개월여 수리하여 재료비 5백 여 만원만 들어 최소한의 경비를 지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돈에 여유가 있다면 집은 새로 아담하게 지어 여름 더위와 겨울 추위는 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았겠다 싶습니다.

  만약 귀농하여 새로 집을 짓는다면, 최소한 방 한 칸 정도는 구들을 놓아 불을 땔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난방비가 오를 것에도 대비하고 목초액을 받아 농사에도 이용을 할 수 있거든요. 지금 저희 집은 방 세 개를 모두 나무로 불을 땔 수 있는 온돌방으로 되어있습니다. 나무보일러는 나무가 엄청나게 들어가므로 아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실 지금 농촌에서 대농을 한다는 사람치고 몇 천만원 빚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큰농사를 지으려니 기계가 필요하고 기계 살 돈이 없으니 농협에서 빌리고, 그 빚에 원리금 갚느라 한 해 농사지은 수입 다 들어가고, 그 빚 다 갚을 즈음엔 다시 새 기계를 사야하니 결국 농사지은 돈은 내 수중에서 놀지 않고 농협이나 농기계장사에게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더구나 올해는 비료값이 거의 배로 올랐기에 상대적으로 오르지 않는 농산물 가격과 비교해볼 때 돈을 벌 수 없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니 빚을 갚기는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정말 시골이 좋으신 분은 시골에 오시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시골에 오기 전에는 수없이 자신에게 되물어봐야 합니다. 지금의 삶을 결코 돌아보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앞서 말했지만 저 역시 3년간을 고민하면서 자신에게 수없이 되물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다시 여의도 고층빌딩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아니 다시 옛 사무실에 앉아 있을 생각을 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니 제게는 시골의 삶이 맞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중에서도 저와 같은 분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골 삶은 TV ‘6시 내고향’이 말하는 그런 낭만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도 충분히 알고 오셔야 됩니다. 온 종일 움직인 대가로 겨우 밥이나 먹을 수 있을 정도이니 일하는 재미, 곡식이 자라고 열매 맺는 것 보는 재미 외는 여행이나 소위 문화라고 하는 영화, 연극, 음악 감상, 외식 따위 즐거움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될 겁니다. 여유가 있으면 굳이 그런 즐거움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만, 그런 여유가 사실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농사꾼에게는 요일이 크게 두 세 개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비요일, 눈요일, 일요일 그렇습니다. 그런데 농사꾼의 일요일은 일반 사람들이 쓰는 일요일과 글자가 다릅니다. 비나 눈이 오지 않으면 일을 해야 한다는 일하는 요일이라는 뜻으로 순 한글입니다.


그래서 귀촌을 위한 조건들을 요약해서 말한다면,


첫째, 귀촌하는 이유에 따라 다르겠지만, 처음부터 너무 큰 경제적인 목표를 잡지 않았으면 합니다. 

둘째는 빚을 내어 농사를 짓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셋째는 시골에서 죽더라도 도회지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넷째는 가능한 몸 움직임을 좋아하는 사람, 즉 부지런한 사람이라야 시골 생활에 즐거움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바이오리듬이 새벽형이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시골의 삶은 전등을 켜 놓고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여명에 일터로 나갔다가 해거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 쉬어야 합니다. 일하는 시기는 봄에서 가을인데 봄부터 여름까지 아침 5시 반경이면 여명이 밝아오기에 그 때부터 일이 시작됩니다. 더구나 한 여름에는 낮에 일을 할 수 없으니 새벽부터 일하고 낮에는 쉬어야 하니까요.

다섯째는 힘든 것을 잘 견디는 몸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사실 우리네 삶은 힘이 들든, 심(心)이 들든 둘 중 하나는 듭니다. 남의 밥에 든 콩이 크게 보인다고 현재 도회지의 삶이 고달프니 시골의 삶을 동경하지만, 실제로 시골의 삶 또한 녹녹치는 않습니다. 저 같이 허리와 목이 긴 사람은 시골에 와서 살려면 정말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심(心)든 것을 참기 어려워 시골에서 살아야겠다는 사람이면 소규모 농사를 권하고 싶습니다. 제가 시골에 오기 전에는 71키로였지만, 최저 56키로까지 내려갔다가 이젠 아마 60키로 정도가 돼 있을 겁니다. 그만큼 몸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일을 지시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모든 걸 스스로 해야 하니 살이 빠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농사에 맞는 몸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립니다. 체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제 경우 근 5년간 허리가 아팠어요. 그리고 귀농 후 1년간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자고 나면 아팠어요. 귀농 전에 여러 가지 운동으로 몸을 다졌지만 농사 근육하고는 질이 달랐던 것 같아요.


여섯째는 귀촌에 아내를 동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만의 삶을 즐기겠다는 사람이 아니면 서로 합의해서 함께 귀촌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다만, 서로 떨어져 사는 것이 더 행복할 수 있다면 떨어져 살아보는 것도 괜찮을 같습니다. 저 역시 1년 정도를 떨어져 살아 보았습니다. 어느 한 쪽에서 먼저 시골에 살면서 서서히 다른 쪽이 시골에 적응하게 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쪽의 강요에 의해 시골에 정착하면 결국 불화로 인해, 행복하게 살자고 온 시골이 불행의 시작이 되는 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4. 친환경 무농약 단감, 고추농사의 어려움


 저는 형님과 아내 셋이서 농사를 하고 있으나 대체로 형님과 둘이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과수농사는 밤과 단감을 생산하고 있으며, 밭곡식은 고추, 마늘, 콩 따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돈을 만드는 과일과 곡식은 밤, 감, 고추가 전부입니다. 이 모든 곡식을 가꾸는데 농약은 일체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의 웃음거리입니다. 그러나 오래 가려면 힘이 들고 수확은 적어도 이 길을 가야할 것 같아서 무농약농사를 짓고 사는데, 참 힘이 듭니다.


 첫 해에는 과수농사는 아무런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관행농으로 농사를 지었습니다. 감나무에 농약을 뿌리는데 도시에서 농사라고 생각하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습니다. 약대를 잡고 약을 뿌리는데 완전히 약을 뒤집어쓰고 4-5시간여를 견뎌야 했습니다. 그 짓을 가을 수확 철까지 8번에서 9번을 해야 하니 아무리 마스크를 했다하더라도 내 몸속에 들어가는 농약을 막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첫 해 농사를 해 보고는 형님과 상의하여 다음해부터는 무농약 과수농사를 하자고 했습니다. 운이 좋게도 때 맞춰 ‘부산울산 한살림’과도 연결이 되어 직거래를 할 수 있는 길이 터였습니다. 우선 감식초와 목초액이 과수농사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 이를 농사에 활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집에 불을 때어 난방을 하니 목초액은 자급자족이 되고 감식초는 상품으로 나갈 수 없는 감을 식초로 담궈 쓰면 되니까 이도 자급자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첫해 무농약으로 감 농사를 지어보니 감식초와 목초액, 석회유황만으로는 감을 제대로 키워낼 수 없었습니다. 감이 빨리 익어 물러지기 쉽고 떨어지는 감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관행농으로 하면 10t은 나올 양인데도 첫 해는 6t 정도가 나왔습니다. 그 중에 물러진 감이 아마 1t은 넘었을 겁니다.


 다음 해에는 더욱 처참하였습니다. 겨우 2.5t 정도가 나왔으니까요. 온 과수원이 낙엽병과 홍시로 9월 말부터 붉게 물들기 시작하여, 시월 중순에 거의 모든 감을 처리하였습니다. 보통 감나무는 11월 중순까지도 수확을 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리고는 11월 초순 무농약 단감재배 농가에 가서 4일간 합숙을 하며 일손을 돕고 어떻게 농사를 해야 하는 지를 배워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별 신통한 방법이 없어 보여 무농약을 포기하고 저농약으로 농사를 지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형님의 격려로 다시 한 번 무농약 과수농사에 도전을 하여 금년 2006년 가을은 그래도 관행농의 절반 수준인 5t 정도를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2007년 다시 2t 정도의 감을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어깨에 힘이 빠지는 일입니다. 2008년 올해도 감꼭지 나방이 감을 떨어뜨리고 있는데, 고개를 들고 감나무를 보지 못할 지경입니다. 왜냐면 또 감이 홍시가 되어 있지나 않는지, 아니면 감이 한 개도 달려있지 않으면 어쩌나 싶어서입니다.


 고추도 무농약으로 재배하다보니 대체로 관행농의 절반 이하이거나 4분의 1 수준으로 수확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고추값을 두배, 세배로 받을 수도 없으니 실제로 돈을 위해서는 관행농으로 농사를 지어야 몸도 편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농약, 유기농 농사를 하려는 분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시작해야 합니다. 혹시 무농약 농사라고 하면 씨를 뿌려놓고 가만히 있다가, 가을에 수확만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계신다면 아주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무농약 농사를 짓기 위해서 일반 농약을 사용하는 농사보다 최소한 2배 이상은 힘이 듭니다. 그래서 나이 드신 노인들은 무농약, 유기농 농사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땅에 풀이 나지 않게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으니 일일이 풀을 뽑든 베든 해야지요, 친환경방제약이라는 것은 효과가 크지 않기 때문에 더욱 자주 농작물에 뿌려주어야지요, 유황이나 석회보르도액, 그리고 작물 성장에 도움이 되는 효소 따위도 스스로 만들어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농사짓는데도 시간이 빠듯한데, 이런 부수적인 일들이 줄지어 있기 때문에 힘이 두 세배로 드는 것입니다.


 말로 할 수 없는 게 농사입니다. 야마기시즘이라는 공동체 삶을 시작한 야마기시 미오죠는 ‘보지 않고 행하지 말고, 행하지 않고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특히 유기농, 무농약 농사에는 여러 전문가들이 숱하게 많습니다. 100인 100색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몇몇 책을 보거나 얘기를 들어보면 참 유려한 문체와 아름다운 사상들로 자연농법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농약을 사용하지 않으면 새나 거미가 벌레를 잡아먹기 때문에 무농약으로 과일나무를 키울 수 있다든가, 짚불을 피워주면 병충해를 예방할 수 있다든가, 땅을 살려놓으면 스스로 작물들이 자생력이 강해져 무농약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따위입니다. 만약 그런 정도로 무농약, 유기농 농사로서 살아갈 수 있다면 누가 그렇게 농사를 짓지 않겠습니까?

또한 아무리 좋은 이론도 내가 할 수 있어야 유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처한 환경이나 능력 따위로 언제든지 할 수 있는 농법이라야 친환경농사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친환경농사를 짓는데 자연자재 값이 엄청나게 비싸거나, 친환경 자재를 만드는데 재료를 구하는데 너무 힘이 들 경우 그 자재가 아무리 좋아도 농사짓는데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같은 경우는 감식초, 목초액은 농사에 사용할 만큼 충분히 확보가 가능하여 사용을 해 보았는데 그 동안 별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감의 경우는 과실이 익기도 전에 잎사귀에 병이 드는 것을 막지 못했고,  고추의 탄저병에는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는 목초액이 고추탄저에는 특효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다만, 유황과 목초액을 섞어 농도가 진하게 토양에 뿌렸을 경우 토양살충효과는 있는 것 같습니다. 무, 배추를 심을 때 활용을 하는데 분명히 효과가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돈을 만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가능하면 현금지출이 되지 않는 농사를 지어야 오래 농촌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무농약 농사를 시도 하고 있지만 너무 힘이 들어, 오히려 오래 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콩농사는 아직 7년째 제대로 수확을 해 본 적이 없고,  고추는 관행농의 절반은 커녕 어떤 경우는 반의 반 정도 수확을 할 수 있었고, 과일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서 돈을 벌기 위해 과다한 비료나 농약을 사용해서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면 적정한 농약, 비료를 사용하여 농사를 짓게 되면 어느 정도 수확을 할 수 있어서 시골 사는 재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가을이 되었는데도 수확할 게 없다면 돈을 떠나서 참 재미가 없거든요. 친환경농사는 초보 농사꾼이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시골의 삶에서 어느 정도 뿌리박고 주변을 둘러 볼 정도의 여유가 생긴 다음에, 무농약, 유기농 농사에 서서히 도전을 해 보는 것도 또 다른 성취감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시골에서 오래 사신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농사란 속고 속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작년에 풍작을 이룬 농법으로 올해 그대로 한다고 해서 똑 같이 풍작을 이룰 수 없다는 얘깁니다. 농사가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정형화를 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얘깁니다. 어떤 해에는 과일 크고 맛있다가도 또 어떤 해에는 잘고 맛이 없기도 합니다. 올해 과일농사가 그렇습니다. 남부의 경우 가뭄이 심해 과일이 크지를 않아 당도는 좋아도 시장에 내 놓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에는 정착 초기에는 수확의 기쁨이 귀촌 정착에 도움이 되느니 만큼 저농약으로 농사를 짓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잡초 없는 운동장에서 온종일 호미질을 하기 어려운 것처럼, 수확할 게 없는 과수원, 논, 밭에서 일을 한다는 것은 시골생활의 즐거움을 앗아가기 때문에 지속적인 생활을 어렵게 할지도 모릅니다.


5. 지속적인 귀촌 정착을 위한 조언


   우선 귀농 후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리라 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시골에서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면 제 말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제 먹을거리를 제 손으로 짓겠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면, 논 500여평, 밭 2,500여평은 있어야 자급자족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각자 가지고 있는 재산에 따라 다르긴 할 겁니다. 그러나 보통 무농약, 유기농으로 농사지으며 두 식구가 먹고살 수 있는 농토를 3천 여 평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밭농사 2,500평을 농사짓는다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곡물의 종류, 농사 방법에 따라 힘 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초제나 농약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려면 무쇠팔 무쇠다리가 아니면 견디기 매우 힘이 듭니다.  자녀 교육비까지 충당해야 할 경우라면 농촌에 오시라고 감히 말씀을 드리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물론 시설 재배를 통해 자녀들을 대학까지 보내는 경우가 시골에서도 종종 있는데 그 분야에는 경험이 없어서 무어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유기농이나 무농약 농사를 지으려는 분이면 농가나 농지가 가능한 일반 관행농 전답과는 떨어진 곳이 좋을 것입니다. 사실 시골에서는 새로 온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고 조언해 주기를 원하는데 거의 관행농이다보니 별 들어볼게 없는 게 현실입니다. 그렇다보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혼자서 여러 정보를 알아보면서 농사를 지어야 하니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외진 곳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정착지를 구하면서 아주 기본적으로 생각해야할 조건은 주택의 경우는 햇볕이 오래 잘 들어 겨울에 덜 추운 곳으로 남향이며, 식수 확보에 문제가 없는 곳, 그리고  농지는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 조달에 문제가 없으며 여름 태풍 장마에 대체로 안전한 곳 따위입니다. 시골 삶에서 가장 힘든 것 중의 하나가 자연재해에 대한 피해입니다.  다만 과수농사를 지을 분은 농지가 북향이어야 좋다고 합니다. 왜냐면 북향은 춥기 때문에 벌레들이 월동하기 어렵고 여름에는 태풍 피해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정착지는 가능하면 면소재지에서 차로 20분 이내에 위치하고, 집까지는 차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면 좋을 것입니다. 인터넷 연결이 용이한 지역이면 더욱 좋겠고요. 보통의 경우 도시의 삶에 너무 염증을 느낀 나머지 아주 심심산골로 정착지를 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얼마가지 않아 후회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풍광이 곧 즐거움과 행복을 주는 건 아니거든요.  시골은 아무리 편리하게 집을 짓고 환경을 꾸며 놓더라도 시골 생활 자체에서 여러 가지 불편함을 줍니다. 그런데 읍내와 거리마저 떨어져 산다면 그 불편함은 배가되고 결국 지속적인 시골 삶을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두 해 살아보고 다시 도회지로 가려면 모르되 지속적으로 살려면 우선 생활하는데 편리하고 덜 외로운 게 시골에서 오래 살 수 있는데 도움이 됩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지금 시골은 ‘6시 내고향’에서 말하는 그런 낭만적인 곳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골생활에 너무 큰 기대나 환상은 갖지 말기 바랍니다. 그저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살겠다라는 마음이어야 후회를 하지 않을 겁니다.

사실, 옮겨 심은 들깨도 새뿌리 내려서 제 몸으로 살려면 4-5일은 걸립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4-5년은 되어야 어느 정도 시골에 적응이 됩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는 4-5년 사이에 다시 도회지로 돌아가든지 이혼, 자살 따위로 가정이 파탄을 맞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홍천에서 7년째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데, 7년 전에 6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귀농을 해서 살았는데 한 가정은 이혼으로 파탄이 나고, 다른 가정은 모두 다시 도회지로 돌아가 버리고 지금은 혼자 남은 상태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골에 정착을 하면서 의욕이 앞서 초기에 너무 큰 투자를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시골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는 데는 사실 2-3년이면 충분하거든요. 그 이후부터가 문제입니다. 행여 이게 아니다 싶으면 몸이 다시 빠져나가야 하는데 시설투자 따위를 너무 크게 해 놓으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치명적인 손해를 볼 수 있거든요. 제가 귀농하기 전, 우리동네에도 2억여원을 들여 산 계곡 주변 땅을 구입해서 과수농사를 준비하던 사람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2년만에 결국 자살을 하고 만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시설 재배, 특수작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따로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입니다. 시설재배는 가능한 집단으로 하는 곳에서 함께 하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래야 생산과 판매에 어려움이 덜합니다.

 돈을 크게 벌어야 하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시골에 정착하면서 처음에는 가능한 벼농사, 밭농사를 하여 먹을거리만큼은 자급자족을 한 후,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농사를 찾아서 하기를 권합니다. 나무를 옮겨 심을 때도 뿌리에 비해 가지가 너무 많으면 말라죽기 때문에 가지를 쳐서 심듯이, 시골에서 오래 살려면 우선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뿌리를 내리고 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가지를 뻗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귀농하려는 분들이 동경하는 소로우의 삶이나 스코트니어링 부부의 삶은 우리 현실과 많이 다릅니다. 소로우는 겨우 2-3년간 월든 호숫가의 삶만으로 자연의 삶을 찬미했지만 농사꾼들은 평생을 힘들고 고달픈 생활을 견뎌내야 합니다. 그리고 스코니어링 부부는 지식인이었고 그 당시에 아주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어서 하루 두 세 시간 노동과 6개월만 일하고도 먹고 살 수 있었겠지만, 우리나라 시골의 현실은 그와는 많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 선상에서 내 삶을 영위하려 했다가는 많은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루 두 세 시간 일로 농촌의 삶을 즐길 수 있다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을 겁니다.


6. 귀촌 후 잃은 것과 얻은 것


   제가 귀농을 고민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그랬습니다. 다른 것을 쥐기 위해서는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한다고요. 저 역시 도회지의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을 놓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시골의 삶을 손에 쥐면서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도회지에 평생을 살았더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많은 것들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가. 귀촌 후 잃은 것들

 우선 제가 시골에 오면서 잃은 것들을 보면, 첫째는 편리하고 안온한 삶이었습니다. 이 시골은 여자들을 참 힘들게 합니다. 문 밖에 나서면 돈으로 구하지 못할 게 없는 곳이 도회지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시골은 현금지출을 되도록 아껴야 하기 때문에 먹을거리를 텃밭에서 구하든 산천에서 구하든 내가 일일이 해야 하기 때문에 번거롭기 그지없는 생활입니다. 백화점에 진열된 잘 다듬어진 채소가 아닌, 벌레먹고 병든 채소를 일일이 흙을 털고 솎아가며 먹을거리를 준비하는 것이 처음에는 낭만으로 여겨지지만 일상생활로 이어지다보면  생각보다 참 불편하고 귀찮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편한 생활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 처지에서 보면 너무나 아쉬운 풍족한 월급봉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좀 우습지만, 사회적인 지위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제일 아쉬워하는 윤기 흐르는 둥근 얼굴도 잃어버렸습니다. 71키로의 몸이 겨우 60키로 정도로 유지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도회지 생활을 하면서 인연 맺었던 수많은 친구, 지인들도 잃어버렸습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의 인연이란 산길과 같아 자주 왕래하지 않으면 잊어진다 하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자주 만나지는 못하더라도 인연을 끊지는 않는 게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 초기에 정착하면서 힘이 들 때 지인,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일손도 도와주었고, 단감을 생산해 어떻게 판매를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들이 구입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 귀촌 후 얻은 것들

  시골에 내려오면서 위에처럼 잃은 것도 많았지만, 얻은 것도 참 많습니다.

우선, 행복이 무엇인지 그리고 행복하다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안 것입니다. 행복이란 고난과 고통 뒤에 맞이하는 열매이기에 도회지에선 맛보기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한여름에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차가운 샘물에서 씻을 수 있을 때에 그 샘물에 대한 감사함으로 참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고된 하루해를 접으며 식구들끼리 맛난 저녁상을 대할 때, 아! 오늘도 이렇게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행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리고 시골생활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힘들고, 외롭고, 고달픈 것을 얻었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직접 알아서 해야 하는 불편함은 몸을 참 고달프게 합니다. 직장에서처럼, ‘어이, 김 대리 개 밥 좀 줘.’라든지, ‘저어기 콩이 익어가네..’라 말만하면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척척 해주던 그 문화와는 너무나 다르니 말입니다. 내 손, 발로 뛰어가며 힘든 일이든 궂은일이든 다 해야 하기 때문에 그 고달픔이란, 도회지에서 운동 삼아 하루 이틀 봉사활동을 해 보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그러다보니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진정으로 헤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골생활에서 가장 크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돈 없이 누릴 수 있는 맑은 공기, 샘물, 별빛, 햇살 따위입니다. 입을 벌리고 한껏 숨을 쉴 수 있다는 것, 이건 시골에 살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혜택이겠지요. 그리고 자급자족으로 살아가야 하니 도회지에서는 생각도 못하던  된장, 고추장, 청국장 따위를 담그고, 온갖 산야초로 차도 만들고, 나물도 해 먹을 줄 알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일을 잘하는 사람은, 못하는 사람의 하인이 된다.’고 하였지만, 자강불식(自彊不息)의 삶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별 의미 없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씨앗을 뿌려 곡식들이 싹이 나고 커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끼는 즐거움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참으로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도회지에선 아내가 집안의 가구처럼 당연한 존재로 생각하며 살았지만, 시골에선 꼭 필요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도회지에 살면서는 내 삶에 대해 간절히 기도하며 살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부족한 게 없는 삶이었기에 기도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골의 삶은 모든 게 아쉽고 부족하고,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분명하니 자연히 어머니인 땅에 무릎을 꿇고, 아버지인 하늘을 우러러 내가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도회지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 중 하나인 삼쾌의 삶(快眠, 快食, 快便)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야 하고, 고기 보다는 채식위주의 먹을거리로 식사를 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삼쾌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7. 결론

  예전에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시골에 살기 위해서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대학을 나오고 무게 40키로의 모래주머니를 나르는 구청 환경미화원 시험에는 응시를 해도 무시험으로 올 수 있는 시골엔 오지 않는 게 현실이니 말입니다. 이는 아마 시골에서 돈을 벌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농사에 대한 무경험이 가장 큰 원인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도 시골에서 살았고, 지금도 시골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누구나 시골에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살아가며 모든 걸 다 거머쥐고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놓아야하는데, 이 놓아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여러 날을 반복해서 지금 가려는 이 길을 가지면 후회하지 않을 것이냐고 물어보아야 합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누구나 힘이 들든, 심(心)이 들든 둘 중 하나는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며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행여 퇴직 후 소위 전원생활을 위한 귀촌이라면 가능한 마을과 떨어져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끼리 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귀농을 하기 전 7월 초순 어느 여름날에, 친구 집에서 칠순, 팔순이 된 할머니들과 감자를 캐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밭 길 옆에서 조깅을 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친구에게 물어보니, 도회지에 살다가 이사를 와 산 쪽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것이지만, 농사일로 힘든 사람들에게 조깅이나 개 따위를 끌고 다니는 한가로운 모습은 농사꾼들에게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웃동네에,  공무원으로 살다가 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농사철에도 수시로 들락거리며 농사일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 또한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아닙니다. 시골에 온 이상 시골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하며 어울려 살아야하지 않을까요?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대체로 전업농으로 지금 한국 농촌에서 살아가는 것은 도회지와 달리 문화적 혜택을 즐길 형편이 못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과 돈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가장 비천하고 비참한 생활을 하는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저는 농촌에서 살려는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비록 이 나라에서는 이름 없는 들풀로 천대받는 비천(卑賤)한 삶을 살수밖에 없다하더라도, 농사꾼이야말로 땅에서 하늘을 주을 수 있는 비천(飛天)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과, 경제적으로는 비참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자강불식(自彊不息)의 비굴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곳 또한 시골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까뮈 선생의 말로서 마무리를 합니다.


‘노동 없는 삶은 부패하지만, 혼이 없는 노동일 때 사람은 숨 막히고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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