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수 4930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여기 이렇게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존재(存在)의 존재양태(存在樣態)로서의 현존재(現存在)일 뿐이다.  

현존재(現存在)가 내가 아닌 것은

내가 현존재(現存在)를 여기 있게 하는
원인자(原因者)일 수 없으며

현존재(現存在)를 여기 있게 하는
권능(權能)이 나에게 없기 때문이다.  

현존재(現存在)가 나라면 나는 마땅히
현존재(現存在)를 내 맘대로 생성 소멸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존재(現存在)를 생성 소멸시키는 권능(權能)이 나에게는 없다.  

현존재(現存在)를 발현(發現)시키는 것은
현존재(現存在)를 그의 존재양태(存在樣態)로 하는

存在(하나님)의 권능(權能)이다.  

현존재(現存在)를 발현(發現) 시킬 권능(權能)이 없는 나는
발현(發現)된 현존재(現存在)를 보고, 느끼고, 관조(觀照)할 뿐이다.  

현존재(現存在)가 거울에 비쳐지는 존재(存在)의 현상(現象)
곧 존재(存在)의 드러남이라면

이 현상(現象)을 보고 느끼고 비추는 거울이 나다.  

나는 이 현존재(現存在)를 비추고 관조(觀照)하는 한에서만
현존재(現存在)에 관여(關與)할 뿐

현존재(現存在)를 존재(存在)하게 하는  
현존재(現存在)의 주인은 아니다.  

그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 存在(하나님)의 몫이다.  

그러나 나는

존재(存在)의 발현(發現)인 이 현존재(現存在)의 관조(觀照)를 통하여
존재(存在)의 소리를 듣는다.  

현존재(現存在)를 통하여 존재(存在)의 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존재(存在)와 입맞춤하며 존재(存在)를 담을 수 있는 나다.  

여기서 존재(存在), 현존재(現存在), 나의 관계가 명확하게 설정된다.  

존재(存在)의 발현(發現)으로서의 현존재(現存在)를 통하여
존재(存在)에 관계되는 것이 나다.  

현존재(現存在)가 존재(存在)의 존재양태(存在樣態)로서
존재(存在)의 발현(發現)이라면

나는 현존재(現存在)를 비추는
존재(存在)에서 흘러나온 존재(存在)의 빛이다.  

나는 존재(存在)의 빛이지 여기 이렇게 있는 현존재(現存在)는 아니다.  

현존재(現存在)는 존재(存在)의 드러남이며
나는 이 현존재(現存在)를 관조(觀照)하는 존재(存在)의 빛이다.  

현존재(現存在)는 존재(存在)의 발현(發現)으로서 오고 감이 있으나
존재(存在)의 빛으로서의 나는 오고 감이 없다.  

존재(存在)의 빛으로서의 나는 현존재(現存在)의 오고 감을 보고 느낀다.  
현존재(現存在)의 죽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나다.  

존재(存在)의 빛으로서의 나는 현존재(現存在)를 통하여
존재(存在)와 하나 됨을 느낀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요한1서 3:24)는 것은

내가 현존재(現存在)가 아니라 존재(存在)의 빛(하나님의 빛)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 말이다.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도 이와 같다.

『존재(存在)의 빛으로서의 나』가 성령(聖靈)이고 얼나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성령(聖靈)이지 현존재(現存在)가 아니다.  

현존재(現存在)는 存在(하나님)의 발현(發現)이므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마치 우리 몸의 세포가 우리 몸을 볼 수 없음과 같다.  

따라서 성령(聖靈)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도
결국 하나님 자신의 빛으로 하나님 자신을 보는 것이 되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도
결국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이 되어

순환 논리의 오류에 봉착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전체라
전체를 보고, 전체를 담을 수 있는 것은
전체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나는 나다』(출애굽기 3:14)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현존재(現存在)가 아니라
존재(存在)의 빛이라는 것을 깨닫고

현존재(現存在)로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存在)의 빛으로 살 때
현존재(現存在)는 존재(存在)의 빛에 순응한다.

이것이 존재(存在)의 빛의 간섭(干涉)효과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19~20)』

여기서 『나』는 현존재(現存在)를 뜻하며
『그리스도』는 존재(存在)의 빛으로서의 나를 뜻한다.

현존재(現存在)는 참나가 아닌 존재(存在)의 발현(發現)으로서의
현상(現象)에 불과하며

존재(存在)의 빛으로서의 내가 참나다.  

(2000.1.8)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85 기독교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습니까?-문화일보 2008.6.2 김병규 2008.06.30 12883
84 종교의 세계 책이 도착하였습니다. 김병규 2004.06.09 13020
83 종교의 세계-정양모,박태식 김병규 2004.05.19 13085
82 세계종교사에서 보는 유영모-오강남 file 관리자 2009.05.04 13175
81 유영모 정신의 핵심 - 박영호 관리자 2010.09.01 13176
80 겨울 한 낮의 몽상 3 김진웅 2008.01.30 13200
79 다석탄신 119주년 추모모임을 다녀와서 file 관리자 2009.03.15 13212
78 인사말씀 드립니다 2 별 꽃 허공 2010.11.22 13294
77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1 김성언 2004.05.03 13295
76 이 여름 한가운데서.... 1 나효임 2008.07.25 13493
75 공자가 사랑한 하느님-문화일보 서평 file 관리자 2010.11.12 13532
74 여름 모임 점심약속 장소입니다(약도) 1 file 박우행 2008.07.31 13561
73 예수가 말하고자 한 것은 깨달음-문화일보 2008.6.2 김병규 2008.06.30 13693
72 다석탄신 122주년 기념 강좌 내용 file 관리자 2012.03.14 13772
71 실바람 속에 빈산이 가득하네요. 1 민원식 2007.08.26 14048
70 씨알시민대학 다석사상강좌 안내 file 관리자 2011.09.05 14214
69 드높고 파아란 가을노래 이풀잎 2008.09.09 14383
68 씨알사상 강좌 안내.. 1 관리자 2009.08.19 14851
67 다석 마지막강의 - 2010년 문공부 선정 우수도서 관리자 2010.11.20 15328
66 마지막강의 관련 신문기사 관리자 2010.03.20 15344
Board Pagination Prev 1 ...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Next
/ 2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