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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렇게 있는 건 내가 아니라
존재(存在)의 존재양태(存在樣態)로서의 현존재(現存在)일 뿐이다.  

현존재(現存在)가 내가 아닌 것은

내가 현존재(現存在)를 여기 있게 하는
원인자(原因者)일 수 없으며

현존재(現存在)를 여기 있게 하는
권능(權能)이 나에게 없기 때문이다.  

현존재(現存在)가 나라면 나는 마땅히
현존재(現存在)를 내 맘대로 생성 소멸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존재(現存在)를 생성 소멸시키는 권능(權能)이 나에게는 없다.  

현존재(現存在)를 발현(發現)시키는 것은
현존재(現存在)를 그의 존재양태(存在樣態)로 하는

存在(하나님)의 권능(權能)이다.  

현존재(現存在)를 발현(發現) 시킬 권능(權能)이 없는 나는
발현(發現)된 현존재(現存在)를 보고, 느끼고, 관조(觀照)할 뿐이다.  

현존재(現存在)가 거울에 비쳐지는 존재(存在)의 현상(現象)
곧 존재(存在)의 드러남이라면

이 현상(現象)을 보고 느끼고 비추는 거울이 나다.  

나는 이 현존재(現存在)를 비추고 관조(觀照)하는 한에서만
현존재(現存在)에 관여(關與)할 뿐

현존재(現存在)를 존재(存在)하게 하는  
현존재(現存在)의 주인은 아니다.  

그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 存在(하나님)의 몫이다.  

그러나 나는

존재(存在)의 발현(發現)인 이 현존재(現存在)의 관조(觀照)를 통하여
존재(存在)의 소리를 듣는다.  

현존재(現存在)를 통하여 존재(存在)의 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존재(存在)와 입맞춤하며 존재(存在)를 담을 수 있는 나다.  

여기서 존재(存在), 현존재(現存在), 나의 관계가 명확하게 설정된다.  

존재(存在)의 발현(發現)으로서의 현존재(現存在)를 통하여
존재(存在)에 관계되는 것이 나다.  

현존재(現存在)가 존재(存在)의 존재양태(存在樣態)로서
존재(存在)의 발현(發現)이라면

나는 현존재(現存在)를 비추는
존재(存在)에서 흘러나온 존재(存在)의 빛이다.  

나는 존재(存在)의 빛이지 여기 이렇게 있는 현존재(現存在)는 아니다.  

현존재(現存在)는 존재(存在)의 드러남이며
나는 이 현존재(現存在)를 관조(觀照)하는 존재(存在)의 빛이다.  

현존재(現存在)는 존재(存在)의 발현(發現)으로서 오고 감이 있으나
존재(存在)의 빛으로서의 나는 오고 감이 없다.  

존재(存在)의 빛으로서의 나는 현존재(現存在)의 오고 감을 보고 느낀다.  
현존재(現存在)의 죽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나다.  

존재(存在)의 빛으로서의 나는 현존재(現存在)를 통하여
존재(存在)와 하나 됨을 느낀다.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요한1서 3:24)는 것은

내가 현존재(現存在)가 아니라 존재(存在)의 빛(하나님의 빛)이라는 것을
깨닫고 한 말이다.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도 이와 같다.

『존재(存在)의 빛으로서의 나』가 성령(聖靈)이고 얼나다.  
하나님을 보는 것은 성령(聖靈)이지 현존재(現存在)가 아니다.  

현존재(現存在)는 存在(하나님)의 발현(發現)이므로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마치 우리 몸의 세포가 우리 몸을 볼 수 없음과 같다.  

따라서 성령(聖靈)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도
결국 하나님 자신의 빛으로 하나님 자신을 보는 것이 되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있다는 것도
결국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이 되어

순환 논리의 오류에 봉착하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은 전체라
전체를 보고, 전체를 담을 수 있는 것은
전체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례 요한이 하나님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나는 나다』(출애굽기 3:14)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현존재(現存在)가 아니라
존재(存在)의 빛이라는 것을 깨닫고

현존재(現存在)로 사는 것이 아니라 존재(存在)의 빛으로 살 때
현존재(現存在)는 존재(存在)의 빛에 순응한다.

이것이 존재(存在)의 빛의 간섭(干涉)효과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서 2:19~20)』

여기서 『나』는 현존재(現存在)를 뜻하며
『그리스도』는 존재(存在)의 빛으로서의 나를 뜻한다.

현존재(現存在)는 참나가 아닌 존재(存在)의 발현(發現)으로서의
현상(現象)에 불과하며

존재(存在)의 빛으로서의 내가 참나다.  

(200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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