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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리석습니다.
남들은 해보지 않고서도 농사란 하는 게 아니란 걸 미리 알고 있는데
나는 해 보고서야 안 되는 걸 알았으니까요.

나는 어리석습니다.
모두 나서 드러내려 하는데
나는 뒤로 뒤로 숨으려 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어리석습니다.
물질이 근본인(資本) 사회에서
스스로 근본(自本)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어리석습니다.
남들은 어렵고 힘든 일에 매달리고 있을 때
나는 귀찮고 하찮은 일에 매달리고 있으니까요.

나는 어리석습니다.
남들은 더 나은 그 무엇을 추구하고자 하는데
나는 그저 이 자리 머무는 것에 만족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어리석습니다.
남들은 실내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백합과 장미만 꽃이라 하고 있는데
나는 이름 없이 피고 지는 들꽃도 꽃이라 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어리석습니다.
바보 이반 얘기를 진실로 믿고 있으니까요.
나는 어리석습니다.
예수, 석가, 노자를 내 길벗으로 알고 있으니까요.

나는 정말 어리석습니다.
진작 내 어리석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똑똑한 채 드러내려 애쓰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내 어리석음은 여기서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올해 12월 6일이 결혼 20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96년 10주년엔 해외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그 때 큰 소리를 쳤습니다. 매년 해외여행을 한 번 정도는 해 주겠다고. 그럴정도 여유가 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러나 97년 IMF를 맞으면서 해외여행 가는 사람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97년, 98년이 그대로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99년에 농촌병이 슬슬 내 몸을 파고들면서 해외여행은 아예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지난여름 친구가 준 무료 숙박권과 머슴살이 시절 쌓아놓았던 항공 마일리지로 하루 제주도를 다녀 온 것을 제외하곤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여행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던 차 부산한살림에서 소비자 회원들이 여럿 모여 12월 1일부터 4일까지 제주도에 감귤 따는 일손을 지원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지난여름 제주도 여행은 내게 여러 가지 씁쓸한 추억만을 주었기에-손이 오그라들어 맛난 음식 한 번 사먹지도 못하고, 이번 기회에 새로운 기분을 가져보고자 아내와 제주도 감귤농장에 일 손 돕기를 하려갔습니다. 소비자 회원들은 어른 13명과 아이 열 대여섯 명이 참가하였습니다. 첫 날 잠자리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작은 집은 아니더라도 주인 식구와 우리들 모두를 합치면 서른 명도 넘으니  잠자리는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자 넷은 다른 방에서 자고, 아이와 여자들은  거실과 다른 방 두 곳에 흩어져 모로 누워 잤습니다. 거실에 잠을 자는 사람들은 모두 아이를 데리고 있는 어머니들이라 바람들어오는 출입문 앞에 자게 할 수는 없으니 아내 차지가 된 모양입니다. 결국 아내는 얇은 이불하나에 파카를 뒤집어쓰고 잠을 자려 했으니 잠을 자지 못한 모양입니다. 결국 다음날부터는 숙소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집에서도 일을 잘 못하는 아내지만 생산자라는 이유로 다른 소비자 회원들 보다 더 열심히 하루 종일 귤 따는 일을 도왔습니다.  

금방 4일이 지나고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농장주는 그 바쁜 가운데서도 일손 도우러 온 소비자 회원들을 위하여 귤도 담고, 제주도라 아직도 성성한 풋고추도 따서 담고, 콩도 일일이 담아서 주었습니다. 같은 생산자 처지지만 농장주는 우리 몫 귤도 두 상자나 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4시 비행기로 서울로, 소비자 회원들은 6시 비행기로 부산으로 가게 되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소비자 회원들은 비행기 시간이 되기까지 관광버스로 제주도 관광지를 몇 군데 가기로 한 모양입니다. 거기서 헤어져 우리 둘만 공항으로 먼저 오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공항 오는 시외버스에 오르면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내 입이 심통으로 뾰족이 나와 있었습니다. 왜 우리 귤은 없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둘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했는데 다른 사람은 주면서 왜 우리 것은 없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포장한 귤은 모두 관광버스 짐칸으로 옮겨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저도 생산자 처지이기 때문에 헤어질 쯤 이면 경황이 없는 걸 여러 번 경험을 한 적이 있지요. 그러고 선물할 물건을 조목조목 바리바리 싸는데도 정신이 없는데 이게 어디로 가야하는 지 일일이 챙기기는 쉽지가 않지요. 그렇다고 이미 짐칸에 실려 버린 귤을 내 것이라 끄집어낼 수도 없잖아요.

아내를 달랠 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우리 몫을 안 준 게 아니고 주었는데 그렇게 된 것이니 그냥 다음에 우리가 주문해서 사 먹자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집에 일 손 도우러 온 사람들 에게 선물을 주기도 했지만 농사 짓은 처지를 어렵게 생각해 돈을 주고 감이나 밤을 사 간 길벗들이 더 많지 않았냐고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아내인들 왜 그걸 모르겠습니까마는 그러나 조카들에게 제주도 감귤농장에 이모부랑 귤 따러 간다고 자랑했는데 막상 빈손으로 들어가게 된 처지가 못내 아쉬운 것이겠지요. 아내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 제 가슴도 사실 먹먹했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여 자판기 커피를 뽑아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잠바를 벗고 보니 청카바 위 호주머니에 귤이 한 개 있었습니다. 이 귤은 감귤농장에서 일하다 꼭지가 빠진 귤인데 버리기 아깝다고 아내가 내게 준 것이었습니다. 귤을 까서 이거라도 먹자고 했더니 아내는 더 심통이 나서 안 먹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내는 귤 반쪽을 받으면서도  내가 더 큰 쪽을 먹으라며 고집을 피웠습니다.

길벗들이여! 내 어리석음의 끝은 과연 어디까지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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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찬 2007.01.25 09:29
    반갑습니다.....선배님. 지난번에 한번 뵈지 못해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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