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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예수는 하느님의 얼나라 문을 열었다.

 

짐승(동물)들이 사는 목적은 획일적으로 분명하다.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생식이 짐승들이 사는 삶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 밖의 다른 목적은 아예 없다. 그러므로 짐승들은 삶의 목적을 회의하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는다. 오로지 본능적이다.

 

사람에게 “이 짐승 같은 놈아”라고 한다면 열의 열사람이 성을 내며 싸우려 들 것이다. 짐승이라는 말에 모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공공연히 ‘털 없는 원숭이(The naked ape)'라고 말하고 있다.

 

박테리아가 변하고 변해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을 말한 다윈을 비난하는데 앞장섰던 크리스챤들도 다윈의 탄신 2백주년을 기념하기에 이르렀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하더니 이제 사람들이 제 자신을 알게 된 모양이다. 일찍 성선설(性善說)을 말한 맹자(孟子)도 “사람이 새나 짐승과 다른 점은 아주 적다(人之所以異於禽獸者幾希).”<孟子 離婁下篇>고 말하였다.

 

그런데 이천년 전에 깨달은 이라고 하는 예수, 석가가 나와서 처음으로 ‘사람이 사는 목적은 짐승처럼 종족번식에 있지 않다’는 것을 가르치고 본보였다. 사람이 사는 참 목적은 어버이가 낳아 준 멸망의 생명인 제나를 버리고 하느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아 하느님 아들 노릇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예수가 말하기를 “내 말을 듣고 하느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얼나(성령)를 깨닫는 이는 영원한 생명(얼나)을 얻었고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니 사망의 생명인 몸나에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옮겼느니라”(요한 5:24, 박영호의 역)고 하였다. 이렇게 나서 죽어야 하는 멸망의 생명인 제나(몸나)에서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옮기는 천명(遷命)이 삶의 참 목적이라는 것이다. 짐승인 몸나로서 자식을 낳는 일은 될수록 적게 낳거나 낳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와 석가는 자손 잇기를 그만두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하느님 아들노릇만 했다. 공자(孔子)의 후손은 지금 80대에 이르렀으나 예수와 석가는 후손 잇는 윤회의 고리를 끊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석가의 진리정신을 잇는 법손(法孫)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20세기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다, 류영모는 혼인을 하여 자녀를 낳아 기르다가 뒤늦게 예수, 석가의 생각을 받아들였다. 그 때는 이미 자녀를 두었으나 핏줄에 억매이거나 집착하지 않았다. 피의 인연을 초월하여 얼의 인연을 소중히 알았다. 이것이 예수가 말한 회개(메타노에오)라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똑같은 사람이지만 그 정신으로는 수성(獸性)으로 사는 제나와 영성(靈性)으로 사는 얼나로 다르다. 제나(ego)는 나서 죽는 짐승의 낱동(個體)이지만 얼나는 나지 않고 죽지 않는 하느님 아들인 온통(全體)이다.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얼나를 ‘없이 계신다’고 한다.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로부터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 8:23, 박영호 옮김). 예수의 이 말을 이제는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수는 그 당시 얼나로 솟나지 못한 사람들을 짐승으로 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은 과학이 발달하여 생물의 게놈(genome)을 분석하여 비슷한 생물끼리의 유연(類緣)을 다 밝혔다. 유인원에서도 유전인자 3만5천개 가운데서 사람과 원숭이 사이는 4백여 개만 다르고 98.77%가 일치한다. 사람과 침팬지와는 더 가까워 99%가 일치한다. 5백만년 전에는 유인원의 공동조상 프로콘슬(Proconsul)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가까운 것은 자연스런 일이지 크게 놀랄 일도 아니고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니다. 다 같이 탐, 진, 치(貪, 瞋, 痴)의 수성(獸性)을 좇아 살고 있지 않은가? 생물학자 드발(France de Wal)이 말하기를 유인원의 성질을 알려면 마키아벨리가 쓴 군주론(君主論)을 읽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고 말하였다. 유인원들이 사람이라고 으스대는 우리를 보고 “사람형제! 잘난 체 하지 말고 우리 잘 지냅시다”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먹기를 밝히고 잘났다 싸우고, 새끼 낳으려 교미 붙기를 똑같이 하면서 어떻게 우리는 너희와 다르니 우리를 보고 형제라 하지 말라고 자를 수 있겠는가? 탐, 진, 치의 수성을 버린 예수나 석가라면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로부터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가 이른바 진리전파의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맨 첫말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오 4:17, 한글개역) 이였다. 이 말이 매우 중요한 말씀인데 잘못 옮겨졌다. 원어에 가깝게 옮기면 이렇게 된다. “깨달아라. 하느님 나라(얼의 나라)는 와 있다.” 회개(悔改)라고 옮긴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는 ‘떠나라, 옮겨라, 바꾸어라’로 곧 깨달으란 뜻이다.

 

도마복음은 짐승인 제나로 죽고 하느님의 아들인 얼나로 솟나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 되어 영원한 생명에 드는 것을 가르친 말씀이다. 이것을 알고 도마복음을 읽으면 도마복음의 114말씀을 쉽게 알 수 있다. 114말씀이 곧 이 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도마복음은 예수의 가르침이 석가, 노자, 장자와 통하는 구경각의 말씀임을 보여준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는 하나이다. 얼의 나라요 얼나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비롯도 없고 마침도 없는 영원한 나라이다. 그 하느님 나라는 미래에 오는 것이 아니다. 창세전부터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지내다가 예수, 석가가 처음으로 깨달아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예수나 석가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얼생명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을 예수, 석가가 하느님 나라 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하거니와 하느님의 얼나라를 깨닫는 것이 문 없는 문을 여는 것이 된다. 명상기도가 깨달음의 문을 여는 방편의 열쇠이다. 예수와 석가는 오로지 기도명상 밖에는 다른 종교의식(儀式)을 행한 일이 없다. 제나를 넘어서는 얼나의 깨달음이다. 이를 마하트마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다. “제나로 죽을 때 얼나를 깨닫는다(When the ego dies, the soul awakes)"고 M.K.간디는 , 『날마다의 명상』에서 말하였다. 이 말은 석가에서부터 류영모에 이르기까지 모든 얼나를 깨달은 이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제나(ego)로 죽고 얼나로 깨지 않고서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온전한 하느님을 안 것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대 선지자들의 신관(神觀)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 신은 이스라엘 민족만 골라서 사랑할 만큼 편협하고, 짐승들이 흘리는 피비린내를 즐길 만큼 잔인하고, 모든 전쟁을 주관할 만큼 호전적이고, 자신이 노여우면 무자비하게 징벌하고 매사에 유치하게 시샘을 낸다. 이것은 하느님의 성상이 아니라 협량한 이스라엘 민족성이 하느님에게 투영된 것일 뿐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생각이 아니다. 어느 민족, 어느 사람도 유치할 때의 생각은 모두가 비슷하게 유치한 신관을 가졌었다. 하느님은 그런 하느님이 아니라고 예수는 분명히 밝혔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느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47절 생략).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오 5:44~48, 한글개역).

 

예수의 말씀대로 온전한 하느님을 알려면 하느님이 주시는 성령을 받아 제나로 죽고 얼나로 솟나야 한다.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하느님이 주시는 얼로 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박영호의 역)고 한 말이나 필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한 14:9, 한글개역)고 한 말이나 같은 뜻의 말이다. 이것을 안다면 얼나를 깨닫지 못한 이의 신관에 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얼나를 깨달은 이의 신관은 핵심에 있어서는 반드시 일치한다. 왜냐하면 얼나는 개인의 생명이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와 석가의 신관은 일치한다. 예수의 아버지 하느님과 석가의 니르바나 하느님은 하나로 일치하는 구경의 깨달음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地球)가 태양에서 떨어져 나온 지가 46억년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30억 년 전에 처음으로 이 지구 위에 박테리아라는 생명체가 나타났다. 16억년 동안은 불구슬이 식어 땅이 되고 거기에 바다가 이뤄진 물리시대였다. 그 뒤 30억년 동안은 생물이 진화해 온 생물시대이다. 6억 년 전에 아가미로 물숨을 쉬는 척추어류가 생겨났고 3억 년 전에는 허파로 기숨을 쉬는 짐승이 뭍으로 올라 왔다. 그런데 2천 년 전에 얼(성령)을 숨 쉬는 얼사람이 나타났으니 곧 예수, 석가, 노자, 장자, 공자, 맹자 같은 정신인이다. 원숭이가 육체적으로 유아성숙(幼兒成熟)을 하여 털 없는 원숭이가 된 것이 사람이다. 이번에는 정신적으로 유아성숙을 하여 수성(獸性)을 버리고 얼(靈性)사람이 된 것이다. 어린이처럼 무소유(無所有), 무상해(無傷害), 무교접(無交接))이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오 18:3, 공동번역).

 

 

 

2. 예수는 의식(儀式)의 기복종교를 부정하였다.

 

도마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종교사상을 바로 쉽게 알자면 예수는 제나의 의식(儀式)종교를 부정하고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닫는 기도(명상)의 신앙을 실천하고 가르친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람이 다른 짐승과 다른 점은 종교적인 의식(儀式)을 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면 문화이지만 속으로 보면 종교이다. 토인비가 인류역사를 문화사적으로 보면서 문화사의 핵심이 종교인 것을 알아냈다. 낱동(개체)인 사람이 낱동의 근원인 온통(전체, all, whole)의 존재를 끊임없이 느끼고 있다. 그 온통(전체)이 하느님이다. 배타적인 유일신(唯一神)관과는 다르다.

 

“신성(神聖)의 변증법이 이 일련의 원형(archetype)은 무한히 반복하는 경향이 있으며 따라서 어떤 역사적 순간에 나타난 성현(聖顯)은 구조적으로 일천년 이전 또는 이후의 성현과 꼭 같기 때문이다. (····) 사회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많은 종교를 믿고 실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같은 개인이 가장 고상한 것에서 가장 미개하고 정도를 벗어난 것에 이르기까지 무한히 다양한 종교적 체험을 가질 수 있다”(M. 엘리아데, 『샤머니즘』).

 

마하트마 간디의 말대로 일만인의 사람이 있다면 일만의 종교가 있다는 것이다. 각 사람의 주관적인 신관(神觀)이 다 다르기 때문인 것이다. 사람마다만 다른 것이 아니라 개인도 그 사람의 정신성장에 따라 신관이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끼리는 같고 너희와는 다르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나 신관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얼나를 깨달은 사람의 신관과 얼나를 깨닫지 못한 제나(ego)의 사람들이 간주(추정)하는 신관이 그것이다. 얼나를 깨달은 이는 맘속에서 얼의 하느님을 만난다. 몬(물질)과 얼(정신)과 빔(허공)으로 된 온통(전체)이 하느님이시지만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정체(正體)는 얼(성령)이다. 그 얼은 맘속의 생각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예수가 말하기를, “하느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루가 17:20~21, 한글개역).

 

너희 맘속에서 찾는 것은 깨닫는 것이다. 제나(ego)로 죽고 얼나로 솟나는 것이 깨달음이다.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를 참나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죽음의 생명인 제나에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옮기는 것이다(요한 5:24). 그러므로 얼나로 솟난 이는 하느님과 하나이기 때문에 모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얼나로 솟나지 못하였으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 다만 밖의 어떤 것을 하느님으로 추정할 뿐이다. 해나 달을 하느님으로 받드는 것이 한 예이다. 그래서 예수가 얼나를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요한 4:22, 한글개역)고 하였다. 이렇게 알지 못하는 것을 하느님으로 받드는 제나(ego)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땅의 나라를 전횡하는 독재자(황제)와 같이 생각하여 공세를 바치듯 제물(祭物)을 바친다. 그래서 예배가 곧 제사(祭祀)와 같은 의식을 치룬다.

 

그러나 얼나를 깨달은 이의 예배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을 숨쉬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명상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예수가 말한 얼과 참으로 예배하라고 한 것은 명상의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이들은 참인 얼나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이들을 찾으신다. 하느님은 얼(성령)이시라. 예배하는 이가 참인 얼나로 예배하여라”(요한 4:23~24, 박영호의 역).

 

예수가 성전에서 짐승들을 잡아 바치는 제사의식(祭祀儀式)을 일삼는 유대교를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세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마태오 9:13, 공동번역). “성전보다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오 12:6, 공동번역).

 

이 말은 유대교 성전을 향한 무차별 포격이라 할 것이다. 골방에서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빨아마시듯이 하느님의 얼생명(성령)을 받아 숨 쉬는 예수에게는 제사의식이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도 얼나를 깨닫지 못할 어린이들이나 나이 많은 늙은이 그리고 지적인 장애가 있는 이들에게는 진실하고 정성된 찬송가를 부르는 등 간소한 의식(儀式)예배는 인정하리라 믿는다. 그들에게 얼나의 깨달음을 가르치고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나를 깨달을 수 있는 지적 능력이 있는 이에게 깨달음의 신앙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성녀 마더 테레사가 살았을 때 마음에 빛이 없는 캄캄한 어둠이었다는 고백은 우리에게 큰 충격이었다. 영성신앙을 제대로 안 가르쳤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몸뚱이란 바람 앞의 촛불이요 여울물의 물거품이다. 언제 꺼질지 몰라 불안 초조를 떠날 수가 없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자신보다 위력을 지닌 어떤 존재에게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빈다. 자기가 비는 것으로 마음이 놓이지 않으면 영험이 있다고 소문난 샤먼(사제, 巫人)을 찾아가서 빌어주기를 의뢰하게 된다. 직업적인 샤먼들은 기복자들에게 자연히 많은 제물과 의식의 비용을 바라게 된다. 샤먼들은 그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복자의 불안 심리를 더 조장하기도 한다. 살아서의 재앙과 죽어서의 형벌을 과장한다. 샤먼들이 종말을 경고하고, 죄악을 들추고, 지옥을 들먹이는 것은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부추기려는 의도이다. 사람들의 불안감이 심각할수록 샤먼들은 기복자들을 다루기가 쉽기 때문이다. 참으로 가증스런 기만이요 협박인 것이다.

 

샤먼들은 겉으로 엄숙한 제사와 신령스런 의식(儀式)으로 기복자들에게 카타르시스(katharsis)를 느끼게 한다. 점술적인 예언과 축복으로 불안을 해소시켜 준다. 능란한 안수와 최면으로 신유(神癒)를 믿게 된다. 그러면 바친 재물이 아깝지 않게 된다. 그리고 더 많은 헌금과 시주를 유도하게 된다. 이것이 옛날이나 이제나 제사와 의식종교의 말하고 싶지 않고 알고 싶지 않는 이면이다. 예수는 이 사실을 꿰뚫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는 말이 “이 눈 먼 인도자들아,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그대로 삼키는 것이 바로 너희들이다”(마태오 23:24, 공동번역)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교세가 창성한 사찰이나 교회에 유능한 샤먼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성공적인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한다. 소로우는 ‘죽은 뒤에도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향기로운 삶이라야 성공적인 삶을 살은 이’라고 하였다.

 

사람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역사는 속일 수 없다. 역사는 오래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다. 아직도 이 나라에는 유능한 샤먼들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서구에서는 기복종교가 사양길에 들어선지 오래다. 바울로의 대속교리도 넓은 의미의 기복종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흘린 보혈의 공로로 지옥형벌에 떨어질 것을 구원받게 된다는 것이 아닌가? 이제 서구사람들은 사제들의 샤먼적인 언행이 진저리가 나서 교회를 떠나고 있다. 사람들이 샤먼들의 속내를 알아차릴 만큼 총명해진 것이다.

 

“나는 나자렛 예수의 반종교적인 영성신앙에 감동받은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다. 동시에 예수의 이름을 붙들고는 있지만 너무 자주 예수의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하는 기독교 때문에 화가 난다. 갖가지 방법으로 예수의 가르침과 본보기를 교리로 성문화하고 이념화하고 제도화하는 종교 때문에 나는 매우 슬프다. 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고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어떤 종교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바르게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누군가 ‘나는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다’라고 말할 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예수를 상상한다. 그러나 종교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영적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하느님과 연관을 맺는 길이어야 한다”(카베이, 『예수 종교를 비판하다).

 

예수보다도 5백년 먼저 깨달음의 신앙을 체험하고 가르친 이가 석가이다. 석가는 참선이라고 하는 기도명상 밖에는 어떤 종교적인 제사나 의식을 행한 일이 없다. 그는 제사와 의식의 종교인 브라만교를 멀리하였다. 신전의 제사와 의식을 완전히 멀리하여 무신론자라 오해받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스님까지 스스로 무신론자로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석가는 예수처럼 제사와 의식을 올리는 제나의 구복종교를 부정한 것일 뿐 니르바나님이라는 하느님을 깨닫고 믿었다. 톨스토이와 마하트마 간디도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하였다.“비구여, 물질을 싫어하고 욕심을 없애고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바로 해탈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얼나를 깨달아 니르바나님을 얻는 것이라 한다”(『잠아함경』28, 열반경).

 

적멸보궁이 석가의 하느(니르바나)님 신앙을 뚜렷이 증거 해 주고 있다. 하느(니르바나)님을 모신 보궁이란 뜻이다. 적멸은 니르바나를 의역한 것이다. 그러니 불상이 필요가 없다. 이 사실을 모르는 스님들이 적멸보궁에 진신사리를 모셔 불상이 없다고 말한다. 진신사리는 스투파(탑)에 모시지 적멸보궁에 모시는 것이 아니다. 석가를 신앙의 대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석가의 니르바나님 신앙을 복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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