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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종교

 

                                                                                                                                                                  박 영호


종교는 선택이 아니고 필수다. 종교를 모르면 인생을 모른다. 불교에서는 무엇을 깨달아야 한다고 깨달음을 중요시한다. 그런데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고 정각이라고 무상정등정각 아눅다라삼막삼보리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착각속에 살고있기 때문에 그 착각을 깨트려야 하기 때문에 깨달아야한다고 한다. 우리가 얼마만한 착각속에 살고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우리가 21세기 산다고 하고 21세기가 확실한 것 같지만 아주 허무맹랑한 것이다.지구가 탄생한 지가 46억년 되고 우주의 빅뱅이 생긴지가 130억년 전인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가 사는 2천 몇 년이라는 것이 아무 뚜렷한 무슨 개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앞도 무한하고 뒤도 무한한데 그냥 2천 몇 년이라고 정하고 올해는 2천 몇 년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지 영원한 미래 영원한 과거를 생각한다면 2천 몇 년이라는 것은 허무맹랑한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2천 몇 년이라는 것을 태산같이 믿고 서류에서 틀리면 난리가 난줄 안다. 공간이라는 것도 서울 어디라고 하는데 이게 확실한 것이 전혀 아니다. 지구가 은하우주속에 있고 은하우주는 어디에 있는가? 은하우주 이상만 되면 뭐가 뭔지 모른다. 은하우주에만도 1억개 이상의 별이 있는데 그런 은하우주가 1억개 이상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가장자리 없는 공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인데 우리가 서울 어디에 살고 또 몇 년도에 산다고 정확한 장소와 시간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속에 살고 있는데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착각속에 살고있는 것이다. 정확한 답은 우리는 어디에서 어느때 살고 있는지를 모르는 것이 정확한 답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막연해서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알 수가 없으므로 종교라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내가 뭔가? 나라는 것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전체가 규정이 나야 내가 그의 하나의 일원이 되고 부속품이기 때문에 전체가 결정이 안나면 내가 뭔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요즘 외국에서 입양되었다가 자기 아버지 어머니를 찾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생부 생모를 안다고 내 정체를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극히 말단적인 자기 정체를 밝히는 것이다. 우리 개인은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서 모두 우주적 소산이다. 우주가 없으면 내가 있을 수가 없다. 우주가 뭔지 결정이 나야 거기서 태어난 나자신의 정체를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종교란 여러 사람이 종교란 무엇이라고 규정을 내린다. 쉽게 이야기 하면 나는 전체의 부속품이다. 전체속의 개체다. 전체가 알아져야 개체의 좌표가 결정이 난다. 그래서 전체를 알자는 것이 종교다. 나는 부속적인 개체인데 전체가 규정이 되지를 않는한 내가 뭔지를 알 수가 없다.

토인비의 종교의 정의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떻게 규정이 되는 것인지 밝히는 것이다. 절대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종교라고 한다. 종교를 영어로 religion 이라고 한다. 라틴어로는 렐리 기오 religio. 뜻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재결합시킨다는 뜻이다. 윗상자와 묶을 속자를 합한 것이 임금 제다. 옛날에는 하나님을 제라고 했다. 진시왕때부터 황제라고 하면서 사람이 스스로 제에 올라갔다. 옥황상제 제는 하나님을 말한다. ()와 나의 재()묶음이다. 렐리기오와 동일한 뜻이다.

종교가 1500개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있는 신흥종교만 해도 4~5백개가 된다고 한다. 세상에는 무수한 종교가 있다. 18세기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 있다. 그중에서도 어떻게 판단을 하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불교의 깨달음이라는 것이 판단이다. 우주를 어떻게 판단을 내리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칸트는 판단력이 결여된 사람은 백치다. 도저히 구원할 길이 없다고 한다. 미숙한 사람이 무언가? 판단을 잘 못하면 미숙한 것이다. 판단을 잘못하면 미친 실성한 사람이 된다. 그런데 판단력 비판을 쓴 칸트도 옳바르게 판단을 못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이성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실천이성비판에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한다. 하나님이란 인간의 이성으로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생활에 절대로 필요하다. 필요하므로 하나님을 전제하고 실천이성비판을 말한 것은 철학자로서는 해서는 안될 비약을 범한 것이다. 없으면 없는 것이고 있으면 있는 것이지 우리가 필요하니 하나님이 있어야겠다. 그 영향으로 엄청난 유물론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칸트가 말을 잘못했고 판단을 잘못했다. 그러면 왜 칸트가 잘못한 것인가.

서양의 2천년 역사가 하나님을 찾아온 서양의 역사가 어떻게 하나님을 찾느냐는 것이다. 결론은 칸트가 도저히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없으면 없는 것이지 유물론자들은 인간들이 필요해서 관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하나님이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무신론이 옳다는 것이다. 관념이란 실제는 없는 것이다.용이란 실제로 없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든지 그려낼 수 있다. 그것은 관념이다. 옛날 사람들이 회오리바람이 불면 바람이 돌면서 위로 오르는 것을 보고 용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실제 용이란 것은 없지만 관념으로 만들어 냈다. 유물론에서 하나님이란 것도 관념이라고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다석선생님이 21세기에 합당한 올바른 신관을 만들었다. 다석 선생님의 공로가 무엇인가? 지금 서양에서 불교가 굉장히 커지고 있다. 왜냐하면 기독교로서 도저히 돌파해 나갈 수가 없어서 불교를 끌어들인다. 우리나라 노자 번역본이 20여종 되는데 서양에는 200개가 넘는다. 노자 장자가 서양에서 유행하고 있다. 왜 그런가? 기독교와 서양철학으로 도저히 21세기를 열어나갈 수 없으므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동양에서 찾기 위해서다. 그러면 왜 칸트가 잘못했는가? 하나님은 간단히 이야기 하면 전체다. 전체가 하나님이다. 전체란 가장자리 없는 무한한 허공이다. 무한한 별들이 나고 죽는다. 별들도 일생이 있어서 젊은별들은 푸른색이 나고 늙은별들은 붉은색이 난다. 일생이 수십억년정도 간다. 불랙홀에 의해서 별이 생기고 갑자기 빛이 나면서 폭발해서 일생을 마치는 것이다. 이것을 초신성이라고 한다. 이런 것이 계속 되풀이 되고 있다. 빅뱅이 135억년 전에 있었다면 그전에는 무엇이 있었나? 우주이 한번을 폭발했는지 두 번을 폭발했는지 알 수가 없다. 우주란이 별이 한개도 없을 때도 허공은 있다. 허공은 없앨 수가 없다. 무한한 허공에 별들이 있든 없든 바다에 고기가 있어도 없어도 바다다. 허공속에 별이 하나도 없어도 아무리 많아도 허공은 허공이다. 창세기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해서 무엇을 만들고 보기에 좋았더라하고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은 신화다. 아무 것도 없는데 별들이 생겼다. 누가 우주를 만들었나. 허공이 만들었다. 허공을 산스크리트로 수냐타라고 한다. 허공이 하나님이다. 불교에서는 허공을 이야기하는데 기독교와 서양철학에서는 허공 말을 못한다. 지금 허공 이야기를 하는 곳은 불교와 노자 장자다. 노자 장자는 허공보다 무라고 하는데 무보다는 허공이라는 말이 더 좋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신앙으로는 누구 못지 않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명을 하는 말은 한마디도 없다. 빌립보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니 나를 본자가 하나님을 보았지 왜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하느냐. 그렇게 밖에 말을 못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전제한 사람만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지 하나님의 존재에 의심을 갖고 기독교를 믿으려면 참 힘들다.

러셀이 성결교회를 다녔는데 유명한 무신론자다.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해서 하나님까지 가는데 그럼 하나님의 아버지는 누구냐? 하나님의 아버지는 없다. 하나님이 아버지 없이 존재할 수 있다면 이우주 조차도 하나님없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기독교쪽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논리가 엉성하기 때문에 반론할 수가 없다. 서양에서는 거의 다 기독교 신자인데 자기는 천재라서 무신론자라고 으스대면서 산 사람이다.

불교쪽에서는 모든 생멸하는 소위 연기설 이라고 하는데 생멸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불교와 노자의 논리전개는 부정적인 논리를 많이 쓴다. 왜 그러냐하면 상대적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색수상행식 오온 안이비설신의등 감각기관으로 인식하는 것은 전부 거짓이라는 것이다. 불경에 보면 계속 부정하는 것이다. 상대적인 것을 전부 아니라고 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남는 것은 허공만 남는다. 별도 인간도 생멸하는데 거짓이고 남는 것은 허공밖에 없다. 허공이 무시무종이고 불생불멸이다. 허공은 부정할 수없고 남는 것은 허공만 남는 것이다. 허공이 허공뿐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성리학에서는 체니 용이니 한다. 허공이라는 체가 있다면 성령이라는 용이 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불성이다. 허공이 죽은 허공이 아니다. 대통령은 일반인을 장관으로 만들 수 있고 장관을 평민으로 만들 수도 있다. 허공은 유를 만들어낼 수도 거두어 들일 수도 있는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게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령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예수와 부처는 성령을 체험하고 구경각을 이룬 사람인데 칸트는 이성만 가지고 붙들고 있다. 이성은 병아리가 알에서 뚫고나오라고 각질이 생기는 것이다. 이 상대세계를 뚫고 나오라고 각질이 생긴 것이 이성인데 우주를 깨트려야 하는데 상대세계를 깨트려야 하는데 옳게 뚫지를 못한 것이다. 이 상대세계를 완전히 깨트려낸 사람이 예수와 석가다. 땅속에 마그마 용암 불덩어리가 있다. 분출하면 라바 lava가 된다. 우리가 땅을 파고 들어가서 마그마가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는가? 지구의 직경이 6km가 넘는데 어떻게 용암있는 곳까지 파고 들어갈 수가 있는가. 땅밑에 불덩어리가 있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화산이 터져나오므로 땅밑에 불이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아는가? 칸트 말처럼 하나님은 찾을 길이 없는데 하나님의 성령이 내마음가운데 터져나와서 성령이 있는 줄을 알고 성령이 하나님인 줄을 안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의 마음속에 성령이 샘물처럼 용암처럼 분출해 나온다. 그래서 하나님은 허공이면서 성령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불성이라고도 하고 노자 장자처럼 도라고 해도 상관없다. 성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개체의식을 깨트리고 전체의식으로 터닝을 하라. 옮겨가라고 이야기를 한다. 다석선생님은 2천년전의 예수님이나 부처님에게 왔던 성령의 나가 얼의 나가 내 마음가운데도 왔다고 한다.

나를 보면 몸이 있고 맘이 있다. 보통사람들은 이것을 에고를 나로 알고 산다.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은 얼의 나라는 것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보통사람들은 에고만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짐승으로 사는 것이다. 성령의 나 얼의 나는 하나님의 생명이고 하나님에게서 온다. 하나님처럼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예수님은 바람과 같아서 성령이 오고 가는 것을 모른다고 한다. 부처님이 80살에 돌아가셨는데 석달뒤에는 죽는다고 하면서 나는 생노병사를 여의었다고 한다. 석달뒤에는 죽는다고 하면서 또 생노병사를 여의었다고 한다. 부처님 같은 분이 거짓말을 하겠는가?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노병사를 여의었다고 하면 죽지를 말아야한다. 죽는데 무슨 생노병사를 여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럼 부처님이 거짓말을 한 것인가? 부처님은 거짓말을 할 턱이 없다. 이 이야기는 에고인 몸과 나는 죽는데 얼의 나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아는 에고의 나이외에 어떤 영적인 생명을 붙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득도를 하고 가빌라성으로 돌아왔다. 금의 환향을 한 것이다. 그런데 밥빌어 먹으러 다닌다. 태자의 신분인데. 사람들이 태자가 밥빌어 먹으러 다니는 것을 보려고 야단들이다. 정반왕이 석가에게 우리 샤카족에게는 거지라고 없는데 집안 망신 시키느냐고 이것을 말렸다. 부처님이 나는 샤카족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몸과 맘 에고로는 자기가 정반왕의 아들이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에고는 참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얼의 나는 하나님에게서 받았기 때문에 육신의 아버지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나는 부처의 계통이기 때문에 우리 부처의 계통 선배들도 다 밥빌어 먹었으니 나도 밥빌어 먹는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다.마리아가 고향에서 예수님이 미쳤느니 하며 나쁜 소문이 들리므로 아들이 걱정이 돼서 동생들 데리고 예수님이 제자들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제자 한사람이 예수에게 가서 선생님 어머님이 동생들하고 왔습니다고 전하자 예수님이 거들떠 보지도 않고 여기 있는 여러분이 내 어머니요 동생들이요 형제들이다. 고향에서 자기를 찾아왔는데 얼른 뛰어가서 어머니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는 것이 보통의 마음이다. 그런데 거들떠 보지도 않고 나는 저여자 하고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데로 사는 여러분들이 내어머니요 형제들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불효막심한 일이다. 육신 핏줄 혈연관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참나인 얼의 나 soul로 그렇다는 것이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비슷한 정도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 사람이 부처님이고 부처님의 말씀데로 산 분이 예수님이다. 전구가 여럿이지만 전원은 같듯이 예수 석가가 개체는 달라도 영적근원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이 부처님도 되고 예수님도 되었으므로 다를 까닭이 없다. 5백년 차이가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똑같은 것이다. 미래의 하나님은 허공이시며 성령이시다라는 것이 21세기의 신관이다. 한신대 김경제 교수 또 심일섭교수 정양모 교수는 원로 신학자들이다. 21세기에 다석사상이상의 신학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이야기 한다. 그분들은 제도권에 교의신학안에 있는 분들이다. 다석선생님은 교의신학 밖에 있는 분이다.

그러면 이제 전체라는 것이 규정이 된다. 허공과 성령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개념을 바꿔야된다. 로마의 씨스티나 성전에 미켈란제로의 손이 마주칠려고 하는 천정화가 있다. 이게 하나님이라고 한다. 인태신이라고 하는데 말이 되지 않는다. 기독교 사도신경에 예수님이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 우편에 있다고 한다. 무소부재한 하나님에 우편 좌편이 어디 있는가? 임금의 좌우정 우의정 같은 생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런 유치한 생각으로 20세기 수십억의 기독교 신자를 이끌고 온다고 하는 것은 기가막힐 노릇이다. 성령이시며 허공이신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부속품이다. 전체가 하나님뿐인데 칸트는 하나님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말이 되는 소리인가. 허공이나 성령으로는 바뀌지 않지만 상대적 세계는 자꾸 바뀐다. 하나님은 정체(正體)로서는 바뀌지 않고 한쪽으로는 바뀌는 상대세계를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안바뀌면서 바뀌고 바뀌면서 안바뀐다. 성령과 허공으로서는 안바뀌지만 모든 상대세계도 하나님의 일부분이다. 이 전체가 하나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의 세포노릇을 하고 있다. 우리는 부분인데 전체가 없다고 하면 개체가 전체가 없다고 하면 말이 되는가? 감히 전체의 부속품이 전체를 없느니 모르느니 할 수 있는가? 모른다는 것은 차라리 정직하다. 없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러면 이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면 이 사회의 모든 가치관이 바뀌어져야 한다. 칸트는 하나님은 도저히 찾을수 없다고 하고 심지어 니체는 하나님은 죽었다고 한다. 나고 죽는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김용*은 뭐 위대한 설법이나 하는 듯이 니체가 어떻고 저떻고 한다. 하나님 죽었다는 소리가 대단한 소리인가? 미친 소리다. 나고 죽는 것은 우리 개체들이 나고 죽지 하나님은 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그런데 불교쪽에서는 하나님을 인정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 소리를 하면 질색을 한다. 호랑이가 화약 냄새를 싫어하듯이 하나님 소리를 하면 질색을 한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신앙의 대상이 되어있다. 불상앞에서 절을 한다. 그러면 부처님의 신앙은 어떤가? 부처님은 불상앞에 절을 한 적이 없다. 기독교는 예수님이 신앙의 대상이 되어있고 불교는 부처님이 신앙의 대상이 되어있다. 예수님과 부처님은 그럼 자기자신을 신격화 시켰겠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예수를 잘 믿으려면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를 말고 에수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부처님을 잘 믿으려면 부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를 말고 부처님의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 부처님은 무엇을 믿었는가? 니르바나님을 믿었다. 음역은 열반이고 뜻으로 의역한 것이 적멸이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나는 이세상에 와서 니르바나님께 이르는 대도를 열었으므로 너희들은 이를 잊지마라.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은 니르바나님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들이 니르바나를 내던져버렸다. 완전히 잊어버렸다. 겨우 사람 죽었을 때 열반들었다고 한다. 열반 들었다고 하면 사람 죽었다는 뜻이다. 또 적멸은 번뇌가 있는데 촛불 불어서 끄듯이 훅 불어꺼버리는 것이 적멸이다. 이런 무식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불교계의 지도자들이다. 무엇을 훅 불어 끄는가? 니르바나를 잊어버렸다. 그래서 지금 불교에서 해야될 일이 니르바나를 찾는 일이다. 불교에서는 니르바나와 다르마. 다르마를 법이라고 번역은 잘못된 것이다. 영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다. 다르마는 얼의 나다. 다르마는 내속에 온 영성이다. 니르바나는 무소부재한데 내속에 왔을 때는 다르마로 온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한데 내속에 왔을 때는 영적인 나라고 한다.

예수님이 내가 이야기 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내속에 하나님 아버지가 계셔서 하는 말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니라. 얼의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예수님에게 선한 선생님이요 하니 왜 나를 선한 선생님이라고 하느냐. 선하신 이는 하나님 한분뿐이다. 그때는 에고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소리는 얼의 나를 두고 하는 소리다. 다르마는 얼의 나로 부처님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무소부재한 우주에 그득차 있는 호연지기인데 내속에 온 것은 다르마라 하고 바깥에 있는 무소부재한 전체는 니르바나라고 한다. 브라만과 아트만. 아버지와 아들. 다 똑같은 말이다. 예수님이 아들이라고 할 때는 에고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영적인 나로 하나님은 아버지요 나는 아들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동국대 불상에 페인트 칠을 하고 불상을 부수고 불을 지르고 하는데 우상숭배 하지 않는 걸로 따지면 불교가 더 철저하다. 원래 부라만교가 우상종교이고 지금도 그렇다. 그것이 싫어서 배척한 것이 부처님이다. 부처님 돌아가시고 5백년 무불상 시대가 이어졌다. 아쇼카왕이 불교를 널리 알리려 석주 큰 기둥을 세웠는데 거기에도 부처님 상은 없다. 알렉산더가 처들어가서 간다라미술이 들어오면서 불상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불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bc 1세기 전이다. 우리나라에 적멸보궁이 5군데 있다.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음사. 적멸보궁은 개인적인 절 이름이 아니다. 불상이 없고 방석만 있다. 왜 불상이 없느냐고 하면 진신사리를 모셔서 불상이 없다고 한다. 무식한 소리다. 진신사리는 탑에 모신다. 탑이라는 것이 무덤이다. 스투파라고 한다. 적멸보궁에 진신사리를 어떻게 갖다놓는가. 이것은 니르바나를 모시는 보배로운 궁전이라는 뜻이다. 그러다 보니 불상이 필요없다. 부처님의 신앙을 나타내는 흔적이다. 부처님이 어떻게 자기를 신앙할 수 있는가? 부처님은 니르바나님을 섬겼기 때문에 니르바나님을 모신 보배로운 궁전이다. 부처님의 신앙은 불상을 믿은 게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지금의 불교는 천지차이다. 도교도 마찬가지다. 노자 장자하고 아무 관계가 없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 교회에 가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러 절에가는 것 연목구어다. 백년 천년 배워도 예수님 부처님의 참가르침은 배울 수가 없다. 불교도 부처님은 니르바나라는 참하나님을 믿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 뭔가. 하나님 알려고 온 것이다.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ego에서 soul로 터닝하려고 왔는데 본목적은 다 잊어버리고 엉뚱한 짓만 하고 있다. 얼마 안되면 죽을 것 송장후보생 이것만 위해서 돈벌고 애쓰고 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예수님과 부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무엇인가? 몸뚱이를 위해서 너무 일하지 말라는 것이다. 얼마 안가면 송장 될 건데 무엇하러 그렇게 위할려고 하는가?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가라는 것이 예수님과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건데 실천을 하지 않고 교회가서 절에가서 비는 것은 우리 잘 살게 해달라는 기복종교 구복종교다.

제일 중요한 것은 분수령이라는 것이 있다. 소백산맥에서 이쪽으로 가면 낙동강 이쪽으로 가면 한강이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가 얼의 나를 깨닫기 위해서 가는 종교가 있고 몸뚱이를 위해서 신앙하는 종교 둘로 나뉘어진다. 지금 교회나 절에 가서 신앙하는 것은 전부 몸뚱이를 위해서 병낫게 해달라 아들 딸 낳게 해달라 취직하게 해달라 대학교 붙게 해달라 몸뚱이를 위해서 비는 것 뿐이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그게 아니다. 단학 기학 하는 사람도 종교적인 배경도 있지만 결국은 몸뚱이 건강을 위해서다. 전부다 그것이다. 틱낫한도 무슨 명상법해서 화풀고 건강해지라고. 그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이다. 원칙은 얼의 나를 깨닫고 깨달으면 저절로 안심입명이 되면 왠만한 화병은 다 없어진다. 얼의 나를 깨닫는 종교야지 집안이 잘되고 어떻고 저떻고 하는 구복종교는 종교가 아니고 예수님 부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 불교에서 나의 나기전 진면목을 생전 진면목이 무어냐. 화두로 삼아서 일평생 그러고 있는데. 스님들은 잘 안가르쳐준다. 나는 쉽게 가르쳐주는데 우리의 나기전 죽은후의 진면목은 무언가. 하나님이다.아무것도 없는데 우리가 이렇게 되 있는 것은 손오공이 털하나 뽑아서 후 불면 많은 손오공이 생겼다고 하듯이 상대적 존재는 하나님의 변화된 모습이다. 변화됐으므로 오래 가면 안된다.원상복귀로 무로 돌아가야한다. 우리는 있다가 없어지면 아버지 죽었니 어머니 죽었니 자식 죽었니 하고 울고불고 하는데 없어지면 대단한 영광이다. 하루에 방귀뀔 때 마다 나는 죽는 상대적 존재이구나 하고 심판 받는 것이다. 로마의 군인들이 전승장군으로 돌아올 때 옆에서 교만해 질까바 당신위에 황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요라고 일러준다. 우리도 그때마다 나는 상대적존재인데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 에고를 위해서 살지를 말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꽉 붙잡으면 가치관이 달라진다. 지금까지 귀하던 것이 하나도 귀하지 않게 된다. 부처님이 득도를 하고 왜 임금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가? 영원한 생명 이 자리에 가게 되면 임금자리같은 것은 뒷간자리도 안된다. 그래서 안하는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이솝우화의 신포도같이 가망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12번 와서 하라고 해도 안하는 것이다. 진리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옛날에 임금에게 가까이 가면 당상관이라고 했다. 하나님과 독대하고 싶지 대통령과 독대하고 싶겠는가? 하나님 찾아가는 길은 몇가지가 있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그것은 본능적이다. 누가 가르쳐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좋은 경치를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입이 벌어져 감탄을 하게 된다. 사진을 찍고 싶은 사람은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은 시를 쓴다. 그것을 아름다움의 신이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착한 것 선보다는 못하다. 아무리 선한 사람도 부처님과 예수님의 진에 가면 무색해진다. 다석선생님은 아름답다는 것은 누군가 알고 싶다라는 뜻이라고 말한다. 미라는 것은 제일 낮은 것이다. 다석선생님은 이땅에는 미와 선과 진이 나누어져 있는데 하나님은 미이면서 선이면서 진이다. 우리는 미에서 선으로 선에서 진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길이다. 하나님에게 올라가야 한다. 밀레의 만종이 미술적으로는 그렇게 잘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성당의 새벽종소리가 울리는데 기도를 한다는 그자체가 그림 이상의 어떤 뜻을 내포했기 때문에 밀레의 만종이 우리에게 명화로 다가온다. 선과 진이 내포되어있는 그림이 되어있어 더 값어치가 있다. 신앙이 포함되 있다. 그림이상의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다. 진선미를 누가 제일 먼저 이야기 했는지는 잘 모른다. 노자에 나오고 파스칼의 팡세에 나온다. 다음의 세가지는 힘--믿음이다. 어릴때는 힘센 사람이 최고다. 스포츠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힘에 체력에 어떤 매력을 느낀다. 미켈란제로 라파엘이 근육에 힘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 다음에 힘보다는 아는 것이 한참 더 높다. 아는게 힘이다. 옛날에는 경찰병력이나 군인들이 캠퍼스에 들어가면 안된다. 더욱이 성당에 들어가면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힘보다는 군인이나 경찰보다 캠퍼스가 더 거룩하다는 것이다. 교회에 들어가면 안되듯이. 힘을 좋아하기 보다는 앎을 소크라테스를 좋아하게 되고 그보다는 믿음의 사람을 좋아하게 된다. 인류에 많은 사람이 나왔지만 예수 석가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다.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과 부처님은 믿음의 사람이었다.

종교는 마루의 가르침인데 마루는 꼭대기를 말한다. 지붕마루라고 한다.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신라의 임금을 마립한이라고 한다. 하나님에게 배우는 것이 종교다. 마루가 말씀이 된다. 하나님이 곧 말씀이니라. 종교는 하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에게만 배우려고 하는데 제일 높은 지경에 간 사람은 하나님에게 배워야 한다. 예수님 부처님 공자님 전부 하나님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예수님이 땅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말라. 하나님 아버지가 아버지다. 땅의 스승을 스승이라고 말라. 하나님아버지가 참 스승이다. 땅의 사람에게만 배우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하나님에게 배우려고 하는 것이 종교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배우는 것이다. 어릴 때는 부모님의 사랑만 있으면 만족한다. 스무살이 넘으면 부모님이 아무리 사랑해줘도 만족할 수 없다. 이성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해서 그렇다. 이 때는 이성이 살아가는 힘이다. 다음은 자녀시대다. 사십이 넘으면 부부의 사랑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아들 딸이 생기면 백프로 양육의 대상이다. 섬길(양육) 대상이 없으면 삶이 할 일이 없어진다.사랑할 섬길 대상이 있어야 내 생명이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마하트마 간디는 부처님이 큰 실수를 했다고 한다. 제자들에게 일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만나면 따지겠다고 한다. 그런데 일하는 것보다 빌어먹는 것이 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이 빌어먹는 것은 애기노릇해 주는 것이다. 민중의 간난아기 노릇을 해주는 것이다.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기쁨을 만족해 주기 위해서다. 지금도 태국에 보면 아침마다 스님들에게 열심히 밥을 갖다 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 요즘도 큰바위나 큰 나무에 빌고 11일날 동해바다에 가서 해돋는 것 보고 절하는 사람 꽤 많다. 그거 전부 일월숭배사상이고 원시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부모에게 만족하고 이성에 만족하고 자녀에 만족하는 이거야 말로 원시종교다. 이 세상에 왠만한 사람들은 이렇게 하다가 끝난다. 자식이 결혼해서 독립하면 삶의 목적이 없어진다. 자식을 위해 전력투구를 하다 섬길 대상이 없어지면서 갱년기 우울증이 엄청 많다. 인생의 목적이 없어져서 그렇다. 자식이 인생의 목표였는데 자기 짝을 찾아가고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들이 내생명을 투자할 대상을 찾지를 못해서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러면 스승님을 찾아가야 한다. 스승은 예수님이고 부처님이다. 그냥 스승님이 아니고 인생의 스승님이다. 땅에 오신 하나님이다. 예수 부처님을 잡던 노자 장자를 붙잡던 인생을 업그레이드를 해야한다. 30~40세 되어서는 선생도 필요없고 하나님에게 가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 좋다.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다. 성령이 하나님이다. 성령 따로 있고 하나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성령이다. 성령한데 가르침을 받는것이 하나님에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소위 영감 인스피레이션이다. 생각도 못했던 것이 갑자기 탁 떠오를 때가 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주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게 배워서 그렇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스승이면서 내 아버지가 된다. 그런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거기까지 가야 인생의 최고의 경지에 까지 올라갈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영적인 나는 하나다. 죽어서 우리 에고 아무개가 영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예수님 만나고 부처님 만나고 그런 것은 필요없다. 그러면 하늘나라에도 불교 기독교 유교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죽으면 어떻게 되나. 하나님 되는 거다. 나기전에는 무엇이었나? 하나님 이었다. 우리의 본모습은 하나님이다. 이 몸뚱이 가지고 사는 것은 잠시 잠깐이다. 별똥별이 1초에 떨어진다. 우리 인생이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별똥별 하나 떨어지는 순간이다. 시 잠깐 사는 여기에 너무 매달려 희로애락에 붙잡힐 필요가 없다. 고민 많고 마음이 상하면 공원묘지에 산책이나 한번 다녀 오라고 한다. 죽은 사람에게 당신 살아서 울고 불고 고민했던 일 지금와서 생각하면 어떠냐 하고 물으면 부질없는 짓했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잠깐이다. 다 부질없는 짓이다. 돌아갈 때 까지 그냥 도반 길동무 삼아 상대방을 더 위해주고 간다. 조금전에는 없었고 조금 후에는 없어질 나자신. 조금만 건딜면 신경질 내고 완전무장을 하고 있다. 누가 나에게 공격을 하거나 싫은 소리를 하거나 손해를 입히면 그냥 폭발해서 난리를 친다. 데이빗드 호킨스가 인간의 심리발달을 17단계로 나누었다. 공격적인 것. 정신단계에서 제일 낮은 단계이다. 21세기의 종교는 종교통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마하트마간디는 1000사람이 있으면 1000개의 종교가 있다고 했다. 목사들끼리 모여도 신앙이 똑같은 게 아니다. 나자신도 5년전의 나와는 정신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가 다르듯이 정신적으로 성장을 한다. 신학이라는 것이 theology 인데 데우스(theod)+로고스(logos)이다. 희랍의 신과 말씀이 합쳐서 신학이다. 종교는 신학이라는 말과 똑같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배워야한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것을 배운다. 아무리 문화가 발달이 되도 과학은 우리의 생활의 방편 수단이 되지 어떤 목적을 결론 낼 수는 없다. 아무리 과학이 발달되어도 종교는 없어지지 않고 종교야 말로 더 필요한 것을 알게 된다. 톨스토이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 문제다라고 했다. 평화가 깨지는 것은 공통분모가 깨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공통분모가 되어야 하는데 천황 모택동을 신으로 모신다. 예수님이 내나라는 이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 내나라는 저따위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개인을 초월해야하지만 가정을 초월해야하고 국가를 초월해 하나님께로 가서 너와 내가 없는 너속에 나를 보고 나속에 너를 보는 그런 때가 되어여한다. 우리가 개체로 나누어졌지만 운명의 자로 재면 내가 너고 너가 나다. 우리는 없는 데서 허공에서 나와 가지고 다시 다 허공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도 개체로 나누어졌지만 내가 너고 너가 나라는 것을 알고 운명의 자로 재면 똑같고 얼마던지 바꿔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면서 사는 게 현명한 우리 종교생활이다. 지금 세계의 평화를 가져와야 할 종교가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다. 전체가 올(all)이다. 알라도 올이라는 뜻이다. 엘리 엘리의 엘도 전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이슬람이 원수다. 고주몽이나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왔다고 한다. 알에서 나왔다는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왔다는 뜻이다. 다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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