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多幸)
노인은 벌초를 가고, 밤산에서 홀로 밤을 줍는데
힘도 들고 배고 고픈데 산을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조금 남은 부분을 마저 줍고 내려가는 것이,
다시 산을 올라와서 줍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후 1시가 되어서야 산을 내려올 수 있었다.
노인이 없다보니 아내도 덩달아 바빴다.
같이 일손 놓고 들어선 주방, 둘이서 함께 차려 맞이한 점심,
식은 밥에 계란후라이, 열무김치, 참기름을 넣어 다른 반찬은 꺼내지 않고 젓가락이 필요 없는
비빔밥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웠다. 이때 ‘다행’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새벽 5시반부터 움직이기 시작해서 맞이한 이 밥 한 그릇,
종일 일하고도 밥 한 그릇 받지 못하는 사람에 비하면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반찬 없다고 투정하지 않고 맛나게 밥그릇을 싹 비울 수 있는 이 허기감,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가을일은 아무리 바삐해도 해가 져야 끝이 난다.
기진맥진한 몸으로 샤워를 할 때도 참 다행하다 싶다.
그러니까 해가 져서 계속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하고,
또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을 수 있으니 다행하다.
잠 잘 수 있는 방이 있어 아궁이에 매일 불을 때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노숙하며 지내는 이에 비해 따숩게 잘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누우면 쉬이 잠이 드니, 불면에 시달리는 사람에 비하면 이 또한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걸을 수 있는 다리, 온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것,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옆에 아내가 있어 다행하고, 찾아오는 친구 있어 다행하고...
밤의 수확량이 작년에 비해 영 적은데, 그래도 주울 게 전혀 없는 것보단 다행하다.
고추가 병들어 죽어가도, 감이 벌레 먹어 뚝뚝 떨어져도,
벼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부실하게 보여도 생각하기 나름..
우리 삶에 생각을 바꾸면 다행하지 않는 게 없다.
다행하다는 생각을 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또한 다행한 경우를 모두 모아보면 돈으로 할 수 있는 것보다
돈이 없어도 할 수 있는 다행이 훨씬 많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다행하다는 생각은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 아침에 컵을 깨거나, 정초에 가벼운 차량 접촉 사고 따위가 나면
‘액땜했다’고 스스로 위로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 내게 일어나는 모든 나쁜 상황을 다행으로 보는 시각,
고달픈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행(多幸)!
이 다행이라는 게 무얼까?
행(幸)이 많으니(多) 행복하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생각을 바꾸면 행복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는 말인데,
지금 처한 내 상황을 다행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
말은 맞는데, 지금 내가 맞이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고달프고 힘든다고요?
더 고달프고 힘든 사람에 비해선 다행이겠지요.
또 살아있기에 그런 고민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죽은 것 보다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