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도 진리의 말씀

 

▶세상에 머물러 묵는(住)다는 것은 실상은 몸둥이만 묵는 것이지 참

나가 묵는 것이 아니다. 묵(住)는 것은 묶(束)이는 것이다. 몸이 묶이

지 참나는 자유다. 참나(얼나)에는 묵는다는 것은 없다. 상대적 존재인

몸이 묵지 절대 존재인 참나(얼나)는 묵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서 응당히 묵지 않는 얼나로 살아야 한다. (應無所住以生其心)

머무를 것 없는 것이 참나인 얼나다. 예수도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

한 것이 아니다"(요한 18:36)라고 했다. 얼나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한

데 시간 ·공간 내에 제한을 받으면서 묵을 까닭이 없다. 묵지 않는다는

것은 시간 ·공간에 갇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오고 갈 필요도

없고 나고 죽을 까닭도 없다. (1956)

 

▶쌀을 되는 되(升)는 될 것을 되고는 곧 비워야 다음에 될 것을 또

될 수 있다. 될 것을 자꾸 되어 님기는 것이 화(和)이다. 중용(中庸)이

라는 것도 될 것을 다 되고 바로 님긴다는 뜻이다. 우리의 마음이란 됫

박이다. 됫박은 될 것을 되고는 금방 비우는 것이 석가가 말했다는 응

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以生其心)의 자리다. 이 석가붓다의 가르침

은 깊은 뜻이 있다. 처음부터 마음은 내지(生心) 말아야 하는데 살아

가면서 생심(生心)하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은 내어도 머무는 데가 없

어야 한다. 마음의 되(升)로 곡식을 되되 금방 되어 님겨 비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나(얼나)에서 나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모든 상

대적 존재를 부정(否定)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상대세계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절대인 얼나뿐이다. 참나가 얼나이다. 참나(얼나)를 그늘

지우는 잡념(雜念)은 자꾸만 지워야 한다. (1956)

 

▶붓다(Buddha, 부처님)가 되려고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붓

다는 이 세상의 별 고생을 다했다. 붓다는 이상적인 나라의 임금이다.

지금 미국의 대통령 이상이다. 세상의 임금들은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

복된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여 놓고는 천하를 다 제 사유물(私有物)로

알았다. 그러나 붓다는 그것이 아니고 죄다 주고 죄다 버렸다. 나라도

내버리고 임금 자리도 내버렸다. 심지어 부모, 처자 궁궐을 다 버렸다.

그것뿐 아니라 눈을 때달라면 때주고 다리, 팔, 배, 골수까지 내준다는

것이다. 그 전(20대)에 내가 그 소리를 스님으로부터 처음 들었을 때

내가 그 스님에게 묻기를 "인도의 옛날 사람들은 골수 같은 것이 다

소용없었던 게지요"라고 했더니 그 스님이 '그게 무슨 소리요'라면서

언짢아 했다. 그런 말은 달라면 무조건 준다는 것이다. 준다는 것을 더

힘있게 나타내느라 인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1956)

 

▶불교에서 성문(聲聞)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배우는 이로써 인생이

무상(無常)함을 느끼는 정도의 사람이다. 연각(緣覺)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깨달으려고 하여 니르바나님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지경에 이른

정도의 사람을 일컫는다. 연각은 대승(大憎)이고 성문은 일승(一僧)이

다 (1956)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줄여서 법화경(法華經)이라고 한다. 법

(法)은 다르마(Dharma)로 진리 (眞理)를 말한다. 묘법이란 오묘한 진

리다. 화(華))는 꽃이다. 여기서는 오묘한 진리의 꽃이다. 연화는 연꽃

인데 꽃 가운데 꽃으로 더러운 물 속에서 피어도 더러운 물에 물들지

않는다. 인도 사람들은 이것을 매우 좋아해서 사람의 생각이 더러운 몸

에서 나지만 생각은 더러움을 타지 않고 깨끗하다는 뜻으로 쓰인

다. (1956)

 

▶불교에서는 이 세상의 빛은 더러운 빛이라 하여 참빛(니르바나님의

빛)이란 뜻으로 적광(寂光)을 말한다. 성경에서는 해와 달이 없다. 해

와 달은 빛이 아니다. 해와 달의 빛은 덜된 빛이라고 한다. 사람의 생

명이나 짐승의 생명이나 이것은 참 생명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참이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다만 참을 찾는 존재이다. 우리가 참 생명(얼

나)을 찾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참(진리)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철학이나 종교에서도 하

느님을 보고 알아서 하느님을 찾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내가 거짓나라

참나를 찾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참(얼)의 긋(點)이 하나

찍혀 있다. 이것이 참을 찾고 빛을 찾고 하는 것이다. (1956)

 

▶마음에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번뇌요 애착이다. 남녀문제에 바람이

일어난다. 내가 없는 마음은 깨끗이 남녀를 초월한다. 남녀의 바람이

자고 생각의 호수가 깊으면 그것이 니르바나님이다. 남녀유별, 부부유

별하여 똥오줌을 싸 뭉개는 어리석은 짓은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가늠

이요 그늠이다. 똥오줌을 가린다는 것은 변소에 간다는 것이요 철이 들

었다는 말이다. 똥오줌 못 가리고 밤낮 싸는 싸개들이 현대인이다. 강

아지처럼 똥오줌도 못 가리면서 밤낮 사랑이니 섹스니 하는 것은 사랑

도 성(性)도 아니다. 그것은 똥오줌에 지나지 않는다. 남녀를 구별할

줄 아는 것이 붓다(Buddha)이다. 식색(食色)을 초월하는 것이 붓다

(Buddha)이다. (1957)

 

▶앉아 있는 붓다의 모습은 참에 가까운 상이다. 인도에서는 앉는 것

을 귀하게 여긴다. 참선(Dahyana, 禪那)이 그것인데 앉아서 아주 완

전에 들어가려는 것이다. 석가가 6년 수행을 끝내는 마지막으로 자신

이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

었다. 밤낮 없이 앉은 채 마귀잡념과 싸워 마침내 영원한 생명인 참나

(法我, 얼나)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앉는 일에 골몰하는 이는

성불(成佛)할 수 있을 것이다. 자꾸만 참나(얼나)를 깨닫겠다는 일이

붓다가 될 사람의 일이다. 성경의 가르침도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

아야 한다는 것이다. 참나를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앉아서 배기는 일을

 참고 배워야 한다. 학교에서 불과 몇 년 동안 앉아 있는 일을 배울 뿐

세상에 나가서는 초조하게 서성거리다가 시간을 다 보내 버린다. (1957)

 

▶석가붓다는 12인연이 무명행(無明行)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무명 때

문에 지옥이 전개된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

수 있는데 눈을 감았기 때문에 지옥에 빠지고 만다. 맘의 눈을 뜬다는

것은 진리 (참나)를 깨닫는다는 말이다. (1957)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이라고 해서 업보(業報)로 태어

난 것이 인생이다. 전생(前生)에서 이 짓을 한 업보의 몸으로 이승에

나온 것이 우리이다. 이승에서 지금 잘 살고 못 살고는 전생의 업보라

고 한다. 신업에는 삼악(三惡)이 있다. 살인, 음란, 도둑질인데 몸에서

그 짓이 나온다고 신업이라 한다. 신업의 근본은 의업(意業)인 삼독(三

毒)이다. 탐냄(貪), 성냄(瞋), 음욕(痴) 이 세 가지가 독(毒)으로 뱃속

밑에 꿈틀거리다가 호시탐탐 삼악을 저지른다. 구업 (口業)에는 거짓말,

못된 말, 실없는 말, 또 한 가지는 쉼게 말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

짓 증거하지 말라는 네 가지가 있다.

   신업의 3악 구업의 4악 의업의 3독을 합해서 십계명이 되어 있다.

이 중에 3독이 밑바탕이다. 호기(好奇), 무방(無妨)하면 이 3독이 참여

한다. 이에 『여오에서 소공의 말이 평소 한가할 때 삼가서 무방하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1957)

 

▶몸 사람으로는 호기심 (好奇心)으로 살맛(肉味)을 찾아다니는 삼독

(三毒)의 짐승이다. 그래서 몸의 근본인 수성(獸性)은 3악과 친하려고

한다. 하느님의 아들인 얼 사람으로는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라가려고

한다. (1957)

 

▶사람이 바라는 공평(公平) ·자유(自由)를 언제 만나 볼 것인가. 맘

에는 공평 ·자유를 찾는데 삼독(三毒)인 몸나가 악을 저지르려고 한

다. 악을 보면 끔찍한 대도 자꾸 악이 세상에 나오는 것은 삼독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진생(瞋生)이라고 할까?이 진(瞋)이 없으면 내가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의 정자와 우리 어머니의 난자가 무슨 인격

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것이 서로 활동하고 경쟁하여 나라는 게 나왔

다. 이렇게 진(瞋)이 동(動)해서 나온 나도 진(瞋)이다. 그리하여 하는

짓마다 진(瞋)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시작도 경쟁이니 일생 동안

진(瞋)이 내게서 떠날 리가 없다. 그래서 이 인류 역사는 예수나 간디

를 잡아먹어야지 안 잡아먹을 수 있겠는가?(1957)

 

▶유정능득(有定能得-『대학)이란 정함이 있어야 능히 얻는다는 말

이다. 정(定)은 집안에 앉아 있는 것을 말한다. 일찍 인도 사람들은 앉

아 있는 것을 바로 가는 것으로 알았다. 참선의 원리가 그렇다. 참선에

들어감을 입정(入定)이라 하고 참선에서 나가는 것을 출정(出定)이라

고 해서 앉아있는 상(像)을 퍽 존중한다. 정(定)의 위치는 믿는 것을

정(定)하는 것이다. 참나(얼나, 法我)를 깨닫고자 성불(成佛)의 자리를

찾겠다고 앉아 있는 것이 정 (定)이다. (1957)

 

▶이 세상에서 대부분의 일은 식색(食色) 두 가지에 귀착된다. 세속적

인 사람끼리 만나 이야기하면 결국에는 식색 두 가지에 가 닿는다. 석

가·예수 ·톨스토이 ·간디는 명백히 식색의 두 가지를 따라서 살아서

는 안 된다고 말했다. 교제는 사람끼리 필요하지만 하필 남자가 여자와

또 여자는 남자와 교제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나?식색에 대해서는 수

천 년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인간이 안 해본 게 없는데 또 자꾸 연

구해 암수끼리 일평생 동안 이랬다 저랬다 하다가 말 것인가?(1960)

 

▶마침내 사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라는 꿈을 깨자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불교에 가까운데 불교는 꿈을 깨 니르바나님에게 이르

자는 것이다. (1960)

 

▶금강경이 어떠니 능엄경이 어떠니 하면서 어느 경전이 좋으냐고 묻

는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지 자기 앞에 있는 것을 잡아서 하면 된다.

자기 앞에 오는 택시를 잡아타면 갈 수 있는 것과 같다. 제 손에 들어

오는 걸 가지고 공부하면 된다. (1960)

 

▶기독교만 말씀(로고스)이 아니다. 불교도 말씀이다. 설법(說法)이라

하는데 법 (法)이란 진리 (Dharma)란 말이다. (1960)

 

▶깨달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염불(念佛)이다. 아미타가 중생

이었을 때 내가 성불(成佛)하게 되면 내 이름을 부르는 이는 누구라도

성불하게 하는 붓다(Buddha)가 되게 하겠다는 원력(願力)을 세웠다.

그래서 누구나 '나무아미타불'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게 이상한 암

시요 최면이다. 그러나 이제는 아미타불 타령은 그만둬야 한다. 이젠

역(逆)하게 들린다. 철학을 했거나, 신앙을 했거나 진리의 생명을 좀

키워 나가다가 그만 주저앉아 버린다. 그리하여 모두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린다. (1960)

 

▶성명(性命, 얼나)은 절대다. 하늘 땅이 갈린다 해도 끄덕 않는다. 이

게 불성(佛性)이다. 나는 염불(念佛)을 하는 건지 크리스천인지 모른

다. 신앙인지 철학인지 모른다. (1960)

 

▶불교에서는 18계(6근6식 6처)가 벌어졌다고 하는데 이 벌어진 게

다 두 가지씩이다. 두 가지란 '좋다'와 '싫다'이다. 그리하여 18계가

36가지가 된다. 또 과거 현재 .미래의 고(苦)로 3갑절 하니 108번뇌

가 된다. (1960)

 

▶우리가 깨치지 못했으니 공(空)과 물(物)이 다른 것 같지만 깨치면

같을지 모른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허공(虛空)은 그릇이요 물질은 그 그릇을 채운 거다. 물질이

없으면 그릇이 소용이 없다. (1960)

 

▶나는 계(절대)서 나온 나그네다. 허공을 건너갈 나그네다. 불교는 제

계(彼岸, 니르바나님)에 가야 한다고 반야바라밀다(Pajna Paramitta)

라고 한다. 이 세계는 이변계(二邊界)인 상대세계다. 이게 있으면 저게

있다. 미(美)가 있으면 추(醜)가 있다. 이게 상대세계이다. (1960)

 

▶몸나란 여섯 뿌리(六根)의 기관을 부리라고 준 부림치(使喚)로 둔

   기계라고 볼 수 있다. 이 부림치를 잘 부려서 니르바나(Nirvana)님

   께로 가야 한다. (1960)

 

▶천상천하에 유아독존(唯我獨尊)이란 형이상하(形而上下)에 나밖에

없단 말이다. 높다는 존(尊)은 존(存)이다. 나는 무식해서 잘 모르지만

요새 철학자들이 말하는 실존(實存)이란 말도 이 나라는 게 정말 참

확실하므로 그저 쉽게 보낼 게 아니다란 말이어야 한다. 혼자 나서 혼

자 죽는데 그 사이에 무슨 짝이 있을 리 없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

란 함께 수도(修道)하자는 말에 대한 대답이다. (1960)

 

▶불교에서는 우리가 난 것부터가 고(苦)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의 성

(性, 얼나)은 불생불멸이라고 한다. 이 말의 의미는 불교를 믿지 않으

면 모른다.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불성(佛性.法身 얼나)이 내게 있

음을 믿는 것이다. (1960)

 

▶우리가 좀 더 깊게, 넓게 살 수 없는가? 하는 문제가 이 사람이 말

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생명으로 말이지 육체적으로는 그렇게 안 된다.

석가·노자 ·예수는 정신적으로 영생한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그

들의 말을 듣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하고 상관이 없다. (1960)

 

▶반야심경을 자세히 알면 불교 일반을 알 수 있다.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는 이는 이 반야심경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생각하는 사

람이 이쯤 갔다는 것은 큰 보물이다. 우리는 그저 얻으려 한다. 여기

온 것도 무슨 소득을 바라고 온다. 그러나 얻는다는 데서 망한다. 무소

득이면서도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아눗다라삼먁삼보디 (無上正等正覺)

를 얻었다고 한다. 우리의 말은 할 수 없이 또 뒤집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보디(진리)를 얻었다고 해야지 잃었다고 할 수는 없다. (1961)

 

▶붓다(Buddha)는 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다. 불성(佛性 얼나)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이 아닌 불성(얼나)은 니르바나

(Nirvana)님 나라에 들어간 것도 나온 것도 아니다. 붓다가 몸으로 났

다가돌아간 것은 중생을깨닫게 하는 방편이다. 예수도 마찬가지 말을

했다. 이 몸나를 벗어 버리고 얼나로 솟나 하느님 아버지께 돌아가면

한량없는 기쁨이 있다고 했다. (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