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바로 되어야

 

▶ 동야자이야(同也者異也)는 같은 것이란 다른 것이란 뜻이다. 그러

므로 함부로 이단이라고 헤프게 불러서는 안 된다. 자기하고 다른 것이

이단이라면 자기 자체 속에도 다른 것이 좀 많겠는가? 그렇다면 죄다

가 이단일 것이다. 나 아니고서는 모두가 이단인 것이다. 한 가지라고

할 것이 하나도 없다. 동야자이야(同也者異也)는 또 사뭇 다른 것은

같다는 뜻도 된다. 머리하고 발하고는 절대 다른 것이다. 그러나 다르

다고 해서 다르게 움직이면 되겠는가? 그래서 우리의 머리와 발은 같

은 것이다. 그러나 그 같다는 말 속에 다른 것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

는 마침내 일치할 것이다. 같은 것이라도 따지면 다르고, 다른 것이라

도 따지면 같은 것이 된다. (1956)

 

▶ 성경의 경(經)자는 항상 지낼 경자로 항상 갖고 있다는 뜻이다. 또

남이 남긴 길을 항상 줄곧 걸어간다는 뜻의 경자도 된다. 몇 백 년 몇

천 년이 가도 지구 위에서 사는 사람은 다시 여기에 생각을 하고 또

하게 되는 그러한 뜻의 경자라 하겠다. 선각자의 기록이나 말씀을 성경

이라고 하는데 나의 성경관은 몇 천 년이 가도 자꾸 사람들이 돌아보

게 되는 말씀은 다 성경이라고 하고 싶다. 소위 교회 본의의 기독교 교

인은 이 사람을 대단히 싫어하는 즐로 안다. 이 사람이 생기어 먹은 것

이 제 생긴 대로 하는 것이지 억지로 어떻게 만들어 가지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적어도 신구약 성경은 성경으로서 오래 가도 버릴 수 없는 진

리정신이 담겨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신약성경을 위주해서

말하는데 신약의 말씀도 구약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다른 종교의 경

전도 다 구약성경과 같이 보아야 한다는 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

다. (1956)

 

▶ 루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 이야기가 불경 법화경에 똑같은 탕자 얘

기가 있다. 예수의 가슴속에 탕자 얘기가 처음 나올 수 있었듯이 인도

사람의 가슴속에서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인도로 건너갔는

지 불교가 팔레스타인으로 간 것인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1956)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

시 짜게 만들겠느냐?그런 소금은 아무 데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 사

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

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마태오 5'13~14) 이 말씀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라는 바른 뜻을 알아야 한다. 음식에 맛이 없어 심

심하지 않게 소금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썩어 가는 생선도 소금에 푹

절이면 금방 굳굳해져 더 썩지를 않는다. 사람이 삼독(三毒)의 욕심으

로 썩어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소금이다. 또 빛이란 세상을 비쳐주는

등불만이 아니다. 햇빛 달빛도 거짓 빛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비쳐오는

진리의 빛을 말한다. 이 진리의 빛은 내 마음에서 비춰진다. 곧 하느님

께서 주신 얼나가 썩는 것을 막는 소금이요 어둠(무명)을 물리치는 빛

인 것이다. 이렇게 참뜻을 알아야지 그렇지 못하면 유치한 글로밖에 보

이지 않는다. (1956)

 

▶ 나더러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으십니까? 선생님은 기도도 안 하시

고 교회에도 안 가시고 찬송도 안 하시지요?"라고 묻는다. 나도 대답

하기 쉽게 예수 믿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늘날 내가

하는 말을 듣고서 저렇게 말하는 사람이 무슨 크리스천이냐고 말할 것

이다. 그래서 나는 아예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무종교다'라고 말하

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예수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나의

유일한 스승이다. (1956)

 

▶ 이스라엘 백성이 무서운 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그 믿음이란 의를

위한 싸움이다. 이스라엘은 과거 2천 년 동안 망국민족으로 떠돌아 다

녔으나 그들의 신앙은 지켰다. 이런 점을 생각하고 시편을 읽어보면 사

람마다 시대마다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1956)

 

▶ 마침내 당신의 성소에 들어와서야 그들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시

편 73편) 하느님의 성소에 들어와서야 그 악한 놈들의 마지막을 깨닫

게 되었다는 말이다. 전에는 악한 놈들이 잘 사는 것을 보았을 때 배가

아팠는데 지금 그럴 필요가 없게 된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성소에 들어가서야 깨달았다고 해서 몸이 성소에 들어간 것을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속 성소에 들어간 것은 곧 원칙에 들어간 것을 말

한다. 다시 말해서 원칙의 임자인 하느님 앞에 갔다는 뜻이다. 그동안

에 악에 사로잡혔던 자신이 원칙에로 돌아섬으로 해서 악인들의 결국

을 환히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마침내는 우로 올라간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땅에는 아무것도 남길 것이 없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며 가는 곳마다 대접과 칭찬을 잘 받았다는 것이 영원히 사

는 길은 아니다. 그런 것 다 잊어버리고 떠나가는 것이다. 원칙으로 진

리로, 얼나로 가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1956)

 

▶ 원자(元子)란 말은 본래 하느님 아들을 일컫는 것이다. 원자인 독생

자가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십자가이다. (1956)

 

▶ 사람은 좀 친해져야 할 것 같고 많이 모이면 일이 잘 될 것 같고 또

그것이 소위 역량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기대일 뿐 그렇

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속의 속은 사상이다. 사람은 사상이 같다고

하더라도 이내 숙친해지면 서로 달라진다. 달라지면 이견(異見)이 나

온다. 이러한 '나에게 오라. 나의 신조만이 여러분을 구원하고 여러분

의 사는 길일 것이다. ' 마치 이슬람교에서 무함마드가 한 손에 코란을

한 손에 칼을 들고 권유하듯 한다. 이런 짓이 다 자기가 미정고(未定

稿)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무엄하게도 하느님 자리

까지 뺏어 앉겠다는 것이다. (1957)

 

▶ 섭섭한 것이 없으면 반가운 것도 없고, 쓴 것이 없으면 단 것도 없

다. 떠나서 섭섭하지 않으면 반가운 것도 섭섭한 것도 없다. 섭섭한 것

이나 반가운 것이나 어떤 면에서는 같다. 근원이 같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떠나서 섭섭할 것 없고 만나서 좋아할 것도 없다. 세상에서는 반

갑고 서운한 것을 모른다면 모른다고 아주 야단을 한다. 인사치레를 잘

하는 사람은 감정의 몇 곱절을 나타낸다. 그러면 인사를 잘한다고 한

다. 그러나 나는 기운이 쇠해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무심해지는 감정이

더해지는 것 같다.

   허락해 주시는 이 시간에 허락된 일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 사

이의 인연을 생각할 때는 무슨 생각이 있을 것인데 나는 그것이 도무

지 없다. 단지 이 시간을 불가불 다른 세계 다른 사람하고는 상관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 심지어 집안 식구까지도 상관이 없다는 것, 이것

하나는 인정하는 기쁨이 있다. (1957)

 

▶ 원수를 사랑하라'(마태오 5:44)고 예수는 가르쳤다. 원수를 미워하

는 것만이 원수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노자(老子)도 원수를 덕(德)

으로 갚으라고 했다. 미운 사람에게는 곧은 것으로 대하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미워해야 할 것을 미워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그 놈 때문

에 바로 되는 것이 없는데 미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는 짓을

미워하되 덕(德)으로 곧(直)음으로 미워하라는 말이다. 이것이 덕으로

갚는 것이 된다. (以德報怨) 미워할 것을 미워하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듣기 어렵고 시행하기 어렵다. 역사는 너무나 미워할 것을 사랑

아닌 방법으로 그릇되게 미워했기 때문에 된 노릇이 하나도 없다. 미워

할 것을 미워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따로 있다. 삼독(三毒)이 일어나

는 방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삼독을 언제나 채찍질해서 다스려

나가야 한다. 오히려 자신의 삼독(三毒)을 잘 다스리는데서 성인(成

人)이 된다 (1957)

 

▶ 나는 요새 부끄러워서 예수 믿는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늘 이단이라

고 해서 안 믿는다고 하는 것이 차라리 좋지만 인제는 그나마도 믿는

다는 것이 부끄러워졌다. 믿는다면 무슨 외래(外來)의 무당같이 보인

다. (1957)

 

▶ 요한 계시록은 본래 내가 덮어놓고 보지 않으려고 한 것인데 이 세

상이 말세가 되었다고 떠들썩하고, 예수 믿는 자만이 부활해서 하느님

을 만나고 예수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예수가

30대에 죽은 것이나 90살까지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차이는 무엇을 말

하는 것일까?남을 위해 죽은 사람, 억울하게 죽은 사람, 핍박받고 죽

은 사람 이들은 모두 예수가 흘린 피에 못지않는 대속을 하고 죽어간

사람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자기가 세수한 물을 성수라며 먹이는 등 예수의

이름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은 그 무슨 짓들인가? 끝없는 이

세상에서 예수의 재강림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릴 필요가 없었다. (1957)

 

▶ 영원한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는 데 대표할 만한 하느님 아들인 예

수는 참으로 혼자 산 사람이다. 예수는 대자연처럼 아무 말 없이 십자

가를 지고 가시었다. 혼인하지 않고 혼자 살아 온전한 사람 노릇을 했

다. 공자(孔子)의 인(仁)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독신성인(獨身

成人)이 이것이다. 그리스어로 사랑을 아가페(agape)라고 하는데 아가

폐(我可蔽))이다. 제나(自我)를 버려야 참 사랑이 나온다. (1957)

 

▶ "사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고린도후서 5:7) 이 구절은 우리가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아서 소

유하는 것 같은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산다는 뜻이다. 사

도 바울도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

을 바란다고 했다. 보이는 것이란 얼마만큼 보이는 것인가? 한숨의 세

계에서 바랄 것이 무엇인가?세계 밖으로 나아가 담대해야 한다. 그러

면 미혹하지 않는다. 믿음으로 살아가고 보이는 것으로 안 한다는 것을

굳게 믿고 나가야 한다.

   물질이 아닌 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보이는 존재에 결코 만족하지 않

고 그 이상을 바란다. 믿음이란 밑바탕에서 밀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추리(推理)라는 말은 밀어서 자꾸 올라가는 뜻이다. 밀어나가는 것이

아는 것이다. 아는 것으로 자꾸 밀어나가면 훤히 트이는 데 이른다. 이

것이 깨달음이다. 아는 것을 더 밝게 하는 것이 추리이다. '밀어 믿음

으로' 하늘밑을 이 세상에서 들어 밀어서 하느님에게 닿을 때까지 올

라가자는 것이 믿음이다. (1957)

 

▶ "하느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

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시편 73:28 개역성경)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나는 좋사오니 이 몸 둘 곳 주님이시라 하신

일들 날날이 전하리이다. " (시편 73 :28 공동번역)

   내가 주 하느님을 피난처로 삼으면 그처럼 굳건한 반석이 없다. 여기

서 행사를 전파하겠다는 것은 인생의 원칙이 이렇다고 분명히 깨달은

것을 그대로 사람들에게 증거하겠다는 것이다. 신구약 시대가 따로 있

고 동서양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으로서 찾고 찾은 뜻을 집어

넣은 것 그 이상 무엇이 없다. 인도교, 유대교, 기독교, 불교, 회교 또

는 온갖 인생철학을 다 쥐어짜도 이것밖에 나오는 것이 없다. 인생으로

서 깨닫는 데 이 위에 더는 없다. (1957)

 

▶ 종교는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얼나를 깨달으면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증인이 되어야 하거늘, 하느님의 권능이란 미명(美名)을 이용하여 이

상한 소리로 부흥을 하려 한다. 그리하여 금이나 돈이 쏟아져 구체적인

돈 밥·옷의 부흥이 된다. 어쩌다 우연히 들어맞은 것을 보면 우리 동

포들은 무슨 권능을 본 것처럼 돈이나 금가락지를 마구 내놓는다. 그것

으로 무엇을 하느냐 하면 그냥 차에 실어 가지고 간다고 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백성들의 돈을 빼앗아 먹는 도둑놈의 소리를 듣고 있다. 이렇

게 예수를 팔고 다니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957)

 

▶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요한

17 : 13 개역성경)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에 감사하는 마음을 충만하게 해 준다는 뜻이

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얼나)를 보내 주시고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이 된다. (1957)

 

▶ 우리가 왜 하늘나라에서 내 쫓겼는지 몰라도 예수는 문득 생각이 거

기에 미치면 통분(痛憤)하게 여겼다고 한다. 근본인 얼나를 회복하지

않는 한 온전한 자유는 있을 수 없다. 그냥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들

노릇을 하겠다고 해도 이 나라 백성은 본성을 회복할 리가 없다. 이 나

도 예수만큼 하느님을 사모하고 있는데 나는 예수가 통분히 여긴 것처

럼 똑같이 통분히 여길 줄은 모른다. 통분하면 결코 이 세상의 것에 달

라붙지를 않는다.

    '맨 처음 태초부터 모시고 있는 나의 하느님 아버지' 이 한마디 말씀

은 분명히 참된 말씀이다. 사람으로서는 예수나 나나 같다. 그러나 예

수가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 그것만으로 주(主)라고 한다

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와 상관이 없다. 예수는 실로 태초부터 하

느님 아버지와 같이 있었다는 말씀(얼나)을 주(主)라고 하는 것이다.

모두가 다같이 하느님 말씀의 얼숨을 쉬는 일만은 줄곧 이어가야 한다.

얼숨을 쉬는 이는 모두가 동기 (同氣)이며 동포(同胞)이다. (1957)

 

▶ 세상에서는 득의(得意)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득의란 정의에 입각한

이상을 실현시켰을 때 득의했다고 한다. (1957)

 

▶ 예수가 본 길(道) 참(理) 얼(生命)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람

이 하느님으로부터 땅에 내려왔다가 다시 위로 올라가는 것을 길(道)

이라 보고 그 길을 환하게 걸어감을 참이라 보고 아버지와 아들이 환

한 빛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얼이라고 본 것 같다. 사람의 아들(人子)

은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간다. 이보다 환한 길은 없다. 이 길을 틀리

지 말고 곧장 쪽바로 가는 것이 참이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만나는 것

이 얼나이다. (1957)

 

▶ 나는 어제 저녁에 먹은 밥은 예수의 살로, 물은 예수의 피로 알고

먹고 있다. (저녁 한끼만 먹었음) 미사의 성찬 때에만 그같이 알고 먹는

것이 아니라 항시 먹는 밥이나 듣는 소식도 예수 그리스도로 알고 먹

고 듣는다. (1957)

 

▶ 시편 73장은 따져보면 시편 37장과 내용은 어떻든 뜻만은 같다고

할 수 있다. 욥기에서 인생 문제가 심각히 나타나는데 욥기에 나타난

것에 비슷한 것이 시편 73장과 37장이다. 욥기 전체를 통해 보느니 얼

핏 그 대신으로 시편 73장과 37장을 보는 것이 가깝다. (1957)

 

▶ 이 세상이 괴로운 까닭을 원죄(原罪)로 돌리는데, 이 사람이 늘 하

는 얘기지만 원죄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삼독(三毒)을 말한다.

우리는 이 삼독의 원죄를 피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무엇을 따먹어서

그의 자손이 이같이 되었다고 자손들에게 죄다가 뒤집어씌우는데 그따

위 말이 어디 있는가?그것은 일종의 신학으로 그렇게 생겨 나온 것이

다. 스스로 우리 자신을 반성해보면 알 수 있다. 못된 뿌리가 세 개가

있음을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 삼독을 우리는지워버리는 데

힘써야 한다. (1957)

 

▶ 예수는 잔치를 부정했다. 네게 반대로 답례할 수 있는 이를 잔치에

청하지 말라고 했다. 잔치는 아무리 잘해도 뒤죽박죽(斗祝薄祝)이 된

다. (1960)

 

▶ 괜히 서로 충돌하여 남의 잘 믿는 신앙을 흔들어 놓을 필요가 없다.

아는 목사들하고도 성경 이야기는 안 했다. 신앙은 서로 다른 데로 같

다. 나도 16살(만 15살)에 입교하여 23살(22살)까지는 십자가를 부르

짖는 십자가 신앙이었다. 우찌무라(內村鑑三)라는 이는 외국 선교사에

반대하여 사도신경의 정신에 입각한 성경 본래의 정통 신앙을 세웠다.

나는 무교회의 선생이 될 수 없다. 우찌무라나 무교회는 정통이지만 나

나 톨스토이는 비정통이다. (1960)

 

▶ 오늘의 류영모는 지금뿐이다. 어제도 아니요, 내일도 아니다. 우리

가 여기 모이는 것도 습관이어서는 안 된다. 금요일이니까 오후 2시에

모인다는 것이 언제나 하는 습관이 되면 못쓴다. (1960)

 

▶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다지만 개혁은 무슨 개혁을 했는가? 루터

는 영웅형이다. 독일 같은 데서야 이런 영웅이 난 것이지, 이런 데서야

무슨 영웅이 필요한가?나 같은 사람이 못하는 짓을 했으니 영웅이다.

마틴 루터는 제가 장가가고 싶어서 그랬다는 가톨릭의 말이 맞다. 루터

와 칼빈이 개혁했다지만 개혁된 게 뭐 있는가? 오히려 성(性) 문제에

있어서는 가톨릭이 옳다. 로마서 8장 3절에서 6절까지에 있는 바울의

말이 옳다. 이 세상에서는 살(肉)이 아니고 얼로 살아 올(律法)을 옳게

이루려고 제가 애써야 한다. 제가 스스로 애쓰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1960)

 

▶ 일요일 예배하러 간다면 맘을 깨끗이 꼭 씻어버리거나 깨뜨려 버리

자는 마음으로 가야 한다. 얻은 게 있으면 남에게 들려 주자는 마음으

로 가야지 그저 모임에 빠지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서는 못쓴

다. (1960)

 

▶ 시편 82편은 매우 긴한 글이다. 외워도 좋다. 예수도 이 시편의 글

을 인용했다. 예수가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고 했다

고 사람들이 참람하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는 시편 82편의 글을 인용

하여 하느님의 집에서 일보는 자도 신(神)이라고 했는데 하느님의 독

생자가 와서 아버지와 하나라고 한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했다. (1960)

 

▶ 이사야 53장에 예수가 고난받고 이기는 걸 말했다. 예수 나기 7~8

백 년 전에 이런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만이 그런 게

아니고 말하는 사람이 지극히 높은 이의 아들이란 자각(自覺)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해당되는 그림이다. 4.19 의거 때 죽은 아우들도 다

이와 같다. 그들이 가엾다면 그렇게 가엾을 수가 있는가?그 아우들이

뭔가? 다 바른 말을 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들이 나타낸 것은 바른 뜻

을 나타낸 것이다. 예수.석가가 별 게 아니다. 다 바른 말을 한 사람

이다. 우리가 종교를 신앙하는 것도 바른 말을 하자는 것이다. 바른 말

은 스스로부터 해야 한다. 그저 말씀이라 말씀뿐이다. 이 세상에서 큰

일이란 말씀을 바로 받아 바로 전하는 게 큰 일이다. 달리 큰 일이 없

다. (1960)

 

▶ 나의 맡은 바는 일개 잽이(役割)다. 모든 사람의 속사람(얼나)을 일

깨울 잽이를 내가 가졌는데 그게 맘속의 얼나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

의 책임이란 것은 참으로 무겁다. 얼나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란

책임이다. (1960)

 

▶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또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싸우지만 도(道)

와 행(行)이 둘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도 따로 행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도즉행(道래行) 행즉도(行則道)라야지, 가면 길이고 길이면 가는 거

다. 통히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가는 거다. 안 가는 놈이 어디 있는가?

땅 덩어리(지구)도 제 갈 길을 간다. (1960)

 

▶ 시간을 돈이라고 하는데 때를 아끼다가 이렇게 일요일에 우리가 모

였다. 우리가 모일 수 있는 틈은 무슨 은혜인가? 터(장소)란 안 쓰이는

터가 없다. 다 쓸 수 있는 터다. 그런데 이렇게 궁색한데도 놀린 터가

있어 우리가 모였으니 이게 무슨 은혜인가? 이런 게 모두 무슨 거룩한

것이 있어서 그런 거다. 우리 조그마한 속알이 아닌 무슨 거룩한 속알

이 넘치는 게 있어서 그런 거다. (1960)

 

▶ 살(肉)로만 사는 살살이 (육신생활)는 살 너머는 못 간다.이것은 정

말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도 살(肉)은 살이요 얼(靈)은

얼이라고 했다. 눈을 감고 입을 닫고 묵념을 해야 한다. 눈은 살 속에

못 들어간다. 관상(觀相)보다 더 깊이 못 본다. 살(肉)에 막히고 만

다. (1960)

 

▶ 이 세계의 정신사(精神史)는 이사야가 있으므로 큰 고개를 넘었다.

3천 년이 지난 오늘도 바로 이사야와 같이(이사야 61장 읽으며) 말할

수가 있다. 이사야도 가슴에 성탄을 느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

다. 3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사야와 같이 얘기할 수밖에 없다. (1960)

 

▶ 야훼 하느님도 다 이사야 가슴속에 있는 거다. 하느님(야훼)이 위에

서 무슨 말을 한 건 아니다. 그런데 소설을 쓰는 사람이 허구를 진실처

럼 써야 믿게 되고 힘이 있듯이 하느님(야훼)이 말씀했다면 듣는 사람

이 있다. (1960)

 

▶ 기독교를 믿는 자는 예수만이 그리스도라 하지만 그리스도는 예수만

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이

다. (1960)

 

▶ 찬송은 난 할 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할 때나 일할 때는 찬송이 참

좋은 것이다. (1960)

 

▶ 한 달 만에 우리가 만났는데 그저 만나서는 싱거운 일이다. 우리가

서로 만나서 해결된 문제가 있으면 이를 증거하거나,또는 의심이 분명

히 생겼다면 그것을 서로 주고받는데 의의가 있고, 만나서 반갑지 그렇

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새 것을 자꾸 서로 주고받아야지 하던 말

그대로 평생가야 새 것 하나 없으면 그게 뭔가?그래 가지고서 만나면

무얼 하겠는가7(1960)

 

▶ 벌린 춤이라 안 추지 못하고 추는 체하는 게 이 세상이다. 목사.중

노릇을 일생 하는 것은 벌린 짓이라 안 하지는 못하고 하는 체하는 것

이다. 그건 생명의 노래가 아니다. (1960)

 

▶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을 죄악 세상이라 한다. 하느님 앞에 죄인이라

는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 앞에 자수(自首)해야 한다. 우리가 머리 들

고 다니는 게 자수다. 자수하지 않으면 하늘 목숨(天命 얼나)을 받지

못한다. (1960)

 

▶ 요새 불교.기독교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신통(神通)이라는 기

이한 것을 구한다. 종교가들도 제법 무슨 신비한 능력이 있는 체한다.

그렇게 하다가 많은 사람이 입신(立身)하게 되면 많은 사람을 모을 수

있으니까 제법 능력이 있는 것처럼 한다. 그래 가지고 그 사람들이 믿

으면 많은 사람에게 전도한 게 되니까 좋다고 생각한다. 요새 종교란

게 다 이렇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는 교육적인 의의(意義)가 있다고 말한다. 그

런데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좋다고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하

는데 많이 모이면 도리어 허식으로 흐르거나 술주정과 난장에 빠지고

만다. (1960)

 

▶ 나는 기도 찬송 성경 해석은 안 한다. 그런데 요샌 나는 참선과

기도를 한다. 이같이 참선하고 기도하는 게 내가 기울어지는 데

다. (1960)

 

▶ 이렇게 우리가 모이는 것도 유한(有閑)이다. 유한을 잘못 쓰면 죄악

이다. 유한한 시간을 팽팽한 긴장으로 보낸다면 영구히 후회 안 할 것

이다. 게으르게 멍청하니 있다가 어디 가서 말 한 마디하라면 머리가

멍해 말도 못하는 그런 지경에 가서는 안 된다. 이야말로 죄악이

다. (1960)

 

▶ 종교는 자유인데 자기가 어떻게 믿든 자기가 분명한 것을 믿으면 된

다. 남의 말 듣고 믿으면 그게 무엇인가? 한 마리의 개가 의심이 나서

짓는데 다른 개들이 따라 짓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1960)

 

▶ 영원히 오고 가는 생명인데 마침내 한 생명으로 완성하는 그 생명이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전체의 생명이지 어떤 시대 어떤 인물의 것이

아니다. (1960)

 

▶ 누가복음 11장은 적 요긴하다. 예수교를 분명히 알 수 있는 데다.

내가 퍽 좋아하는 것을 힐티도 퍽 좋아했다. 35~36절 여기서 마음의

빛이라는 걸 분명히 했다. 그러나 성경에도 수십 년 동안 보아도 의심

밖에 안 나는 부분이 있다. (1961)

 

▶ 구약시대에도 그랬지만 예수도 이 세상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장가 시집 가고 그러다가 멸망하고 마는 데라고 했다. 오늘날에도 이

세상에는 악한 게 더 늘어가고 있다. 악한 것이라 해로운 건데 이게 자

꾸 늘면 늘었지 줄어들지 안 한다. 이 몸과 맘의 제나(自我)는 수성(獸

性)의 노예인데 짐승들이 모인 사회가 잘 되어 갈 리가 없다. 어쨌든

사람은 겉으로 나오지 말고 속으로들어가 참나에 이르러야 한다. 제나

로 죽고 얼나로 솟나야 한다. (1961)

 

▶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땅에 부딪친다. 그러나

예수가 위로 오르신 것처럼 나도 올라감을 믿는다. 예수와 나와는 이

점에서만 관계가 있다. 그 밖에 속죄니 하는건 믿지도 상관도 없다. 예

수의 십자가 보혈이 이 몸을 사(赦)하는 지를 나는 모르겠다.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