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삶이란(眞善美)

 

▶증자(曾子)가 하루에 세 가지로 나 자신을 살핀다. (一日三省吾身)

는 것은 몸만을 살핀다는 것이 아니라 그 몸 속에 있는 정신을 살핀다

는 것이 될 것이다. 유교에서는 몸이라 할 때 우리가 가족을 집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정신을 가리킨다. 정신을 살핀다 하여 몸을 돌보지 않

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제정신을 담고 있는 몸이니 이것도 살펴야 하

는 것이 옳게 자기를 살펴보는 것이 될 것이다. 사람은 몸만 가지고 사

는 것이 아니다. 금수와 같이 몸만 가지고 살면 사람도 편하겠는데 사

람은 그렇게 편하게 되지 못하고 있다.

   남에게 곧은 맘(忠)으로 했는가? 안 했으면 더 곧은 맘으로 하라. 남

을 사귀는데 믿음(信)으로 했는가? 미쁘게 하지 않았으면 더 미쁘게

하라. 이전부터 이어내려 온 말씀을 이어받았으면 그대로 이어받아 가

지고 다음에 이어 가는데 익숙하게 했는가? 안 했으면 더욱 익히도록

하라. 이렇게 세 가지를 살펴야 되겠다고 증자는 말했다. 여기서도 충

신습(忠信習) 여러 말이 나오는데 다 한 말씀밖에 없다. 세 가지를 살

펴야 한다는 말도 결국 하나(一, 하느님)를 살펴야 한다는 말이

다. (1956)

 

▶이 세상에서 양심 있게 사는 사람이 자기의 삶을 누리는데 진선미

(眞善美)를 찾으려고 할 때 '조히'라고 한다. '조히'라는 말은 '꾀'라

는 말로 쓸 수 있고 '좋게'라는 뜻으로도 쓸 수 있다. '조히'라는 말은

욕심이 많지 않다. 그러므로 조급하게 굴지 않는다. 급해도 조히조히

하게 된다. (1956)

 

▶이 몸둥이 자체는 '나'일 까닭이 없다. 그래서 제나(自我)라는 것이

있으면 못산다. 제나(自我)라는 것이 없어야 참 삶을 살 수 있다. 이것

이 석가.예수를 비롯한 모든 성현들의 일치된 주장이요 가르침이

다. (1956)

 

▶얇은 것 중에 얇은 것은 시간보다 더 한 것이 없다. 일생을 두고 만

나 보지 못한 분을 꼭 만나 보았으면 하는 분이 있다. 그러한 것을 언

젠가 생전(生前)에는 한 번 만나 보겠지, 이번에 못 만났으니 요다음

만나 보겠지 하게 된다. 이러다가 처음이요 마지막인 인생에 못 만나고

만다. 이 다음에는 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얇은 것인가? 얇은 것 가운

데 얇은 것이 시간이다. 이러한 얇은 시간을 밟고 가는 우리 인생은 참

으로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1956)

 

▶사람은 하느님 나라요 니르바나님 나라인 저 건너 언덕(彼岸)에 이

르러야 한다. 저 언덕에 가려면 참으로 전전긍긍 소심익익(小心翼翼)

에 이르러야 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조심조심 아슬아슬 가야

한다. 임시로 사는 여기를 불행으로만 돌리지 말고 조심해서 영원한 생

명을 찾아가야 한다. 떠날 때는 환하게 이륙(離陸)을 해야 한다. 깊은

바다는 하느님을 향해 이륙하는 앞 바다보다 깊은 것은 없다. 용감하게

영생의 피안(彼岸)을 향하여 출항하는 데 감사하는 일념(一念)으로 아

주 이륙하는 그보다 깊은 뜻이 어디 있겠는가?세상을 나온 뒤로 우리

는 자꾸 이 깊은 바다를 향하고 있다. (1956)

 

▶지극한 선(至善)의 자리에는 이제 한 번 딛고 서면 움직이지 않고

멈춰야 한다. 진리는 한 번 얻으면 잊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과 하나

된 자리에서 부동(不動)이다. 이를 지어지선(止於至善)이라 한다. 글

자가 대단히 좋다. 참으로 안다는 이는 이러한 것을 얻는 사람이

다. (1956)

 

▶'고삐가 길면 밟힌다'는 말이 있다. 언짢은 일을 길게 하면 치욕스

런 망신을 당한다는 말이다. 고삐가 길면 밟힌다는 말은 소극적인 지어

지선(止於至善)인데 이런 지선(至善)은 누구나 다 한다.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1956)

 

▶주역(周易)에 이섭대천(利涉大川)이란 글이 있다.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는 것이다. 집을 떠나서 험한 산 깊은 물을 수 없이 건너고

크고 작은 사건을 수 없이 겪으면서 연단되고 단련된 사람만이 이롭다

는 것이다.

   또 주역에 휘광일신(揮光日新)이란 글이 있다. 산꼭대기는 해가 제

일 먼저 뜨고 해가 제일 늦게 진다. 산은 높아서 언제나 빛난다. 사람

의 마음도 산처럼 언제나 독실(篤實)하고 휘광(揮光)해야 한다. 두텁

고 빛나는 곳에 인격이 무럭무럭 자라서 그 속알이 날로 새로워진다.

속알(德)이 자꾸 되어 나가야 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1957)

 

▶남들이 한다고 나도 하는 일이 많은데 이런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가 알고 해야지 남들이 한다고 나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바람둥이가 하는 일인지 어진 사람이 하는 것인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무엇을 하려면 처음과 끝을 분명히 해야 한다. (1956)

 

▶어느 날 초상집에 갔다 오는 사람들이 술에 취해서 길가에서 싸움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결국 살인이 났다. 초상집에 먹으러 가지 않았던

들, 초상집에서 대접하지 않았던들 문상객 가운데 생초상은 나지 않았

을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교훈삼아야 한다. (1956)

 

▶참(하느님)을 찾으려면 내 속에 있는 긋(얼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이르기를 "하느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

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안

에 있느니라"(누가 17:21-개역성경)고 했다. 참(하느님)과 긋(點)은

그 크기가 다르다. 참(하느님)은 가장자리 없는 무한대(無限大)이고

긋은 자리만 있고 없는 점과 같다. 그래서 긋(點)이라 한다. '긋'은ㄱ

은 하늘이고 一는 땅이고 ㅅ은 사람이 합쳐진 것이다. (1956)

 

▶무명용사(無名勇士)의 죽음과 영웅주의의 영웅과는 다르다고 생각

한다. 참 영웅은 무명용사들일 것이다. 그러나 살아남아 훈장이나 달고

영웅소리 듣는 영웅은 참 듣기 싫다. 이러한 영웅이 세계에 많으면 인

류의 불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56)

 

▶사람은 누구나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고달픈 삶을 겪게

된다. 중국의 이상시대라는 요.순(堯舜)시대에도 병이 있었고, 병신

(장애)도 있었고 고아도 있었다. 그 밖에 어려운 경우가 많이 있었다.

이스라엘의 전성시대라는 다윗시대에도 어려운 사람은 또한 어려웠다.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나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내게 되어 있다(人

生見今生活難)

   우리의 생명이란 영원한 시간.공간 가운데 하느님의 명령으로 잠깐

누리는 것이다. 잠깐 꿈을 꾸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일에 삶이란

꿈을 깨면 다 그만이다. 인생이란 꿈을 깨면 시원할 것이다. 부자(富

者)나 천민(賤民)을 가릴 것 없이 고달픈 삶을 사는 동안 멸망의 생명

인 제나(自我)에서 영원한 생명인 얼나(靈我)로 거듭나 옮겨야 한다.

그것을 하느님의 생명으로 들리는 것이라고 한다. 영원한 생명(天命)

으로 솟나 성령의 지혜를 얻어 얼나가 있음을 증언해야 한다. (生命終

吉天命亨)(1957)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우리가 따질 수 없는 크

고 참된 존재이시라 없이 계신다. 없이 계시는 하느님께 도달함이 지천

(至天), 지선(至善), 지성(至誠)이다. 모두가 겸손한 표현이다. 우리가

성인들의 전언왕행(前言往行)을 알면 하느님에게 다다른 것이다. 지지

(至知) 곧 아는 것에 이른 것이다. 하느님은 내 속에 있다. 하느님의

말씀을 알면 그것이 하느님에게 다다른 것이다. (1957)

 

▶종일건건 석척약(終日乾乾 夕惕若-주역)이란 저녁때까지 조심

조심해서 자연스럽게 있다는 뜻으로 그대로 간다는 것이다. 저녁까지

조심한다는 것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 뜻도 있다. 우리는 매일 아

침과 저녁을 맞이하지만 정작 아침은 뱃속에서 나올 때요, 정작 저녁은

죽는 때이다. 우리가 조심조심 저녁을 맞으러 갈 때 대장부답게 초연히

맞이해야 한다. 그러면 '왜 죽어'따위의 말은 나오지 않게 된다. 우리

는 밤낮 없이 쉬지 않고 그 죽음의 저녁을 맞으러 가고 있다.

   인생은 무상(無常)하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이것을 알면

대장부답게 지내갈 수가 있다. 우리가 밤낮 없이 가는 것을 알면 우리

는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가듯이 한 번 픽 웃고 죽는 길에 들어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대장부다. (1957)

 

▶인문(人文)을 위해서 무슨 사업을 하겠다는 마음, 성공을 하겠다는

마음은 이미 사(邪)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좋은 일을 해서 저절로

이름이 나는 것은 다르다고 할 것이나 애초부터 진리 아닌 이름나기를

바라고 성공하기를 바란다면 사(邪)가 끼지 않을 수 없다. (1957)

 

▶지금 사람들은 기분이라는 것을 가지고 사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기분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대기 중에 우리가사니까그 대기

의 공기가 우리 몸에 와서 접촉하는 거기에 어떤 때는 좋게 느끼고 어

떤 때는 언짢게 느끼는 것 같다. 그리하여 날이 궂은 날이면 나쁜 기분

이 더 많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것은 속이 어두워서 그렇다. 마음속

이 밝을 것 같으면 그런 일이 없다. 제가 제대로 살 것 같으면 날이 궂

었다고 기분이 나쁘고 날이 개었다고 기분이 좋고 하는 그러한 일이

어디 있는가?(1957)

 

▶정의일관(正義一貫)의 삶이 좋으나 그렇게만 될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은 악과 선이 반반이 있어 선(善)이 강하면 선한 사람이고 악(惡)

이 강하면 악한 사람이다. 참나를 자각(自覺)한 사람의 수효가 많으면

덜 억울한 세상이 될 것이다. 복잡하게 생긴 우리 인간인지라 사람의

판단이 공평하기가 어렵다. (1957)

 

▶"칼을 도로 칼집에 꽃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 "

(마태오 26:52) 이처럼 칼을 쓰는 이는 칼로 망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돈이 칼이 되었다. 돈이 있는 곳에 칼이 번쩍인다. 칼을 번쩍거리지 않

고는 돈을 수습할 수가 없다. 돈을 (나쁘게) 쓰는 이는 돈으로 망할 것

이다. (1957)

 

▶사람은 쓸데없이 호기심(好奇心)이 생긴다. 호기심이란 참 이상하다

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기(奇)자는 대가(大可)라고 붙여 쓴 것으로 크

게 옳다, 또는 큰 것이 좋다는 뜻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호기유미(好奇

肉味)로 잘먹고 잘살자는 것이다. 호기심도 형이상(形而上)으로 구하

면 옳은 것이 될 수 있는데 형이하로 쓸 것 같으면 잘못된다. 사람들이

마약을 좋아하는 것도 호기심 때문이다. 이처럼 양심에 어긋나는 일도

한사코 쫓아간다. 한량없는 호기심을 만족시키려고 하다가 인생을 그

르친다. 그리하여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을 속여 혹세무

민(惑世誣民) 하기에 이른다. 혹세(惑世)라는 말이 혹시나로 들리는

것도 재미있다. 호기(好奇)는 확실히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우러난

다. (1957)

 

▶몸나는 죄악된 수성 (獸性)을 지녔으나 얼님을 머리에 이므로 거룩함

을 입을 수 있다. 더러운 수성(獸性)을 자꾸 덮어 버리고 지극히 깨끗

하고 거룩하게 되어 보겠다는 것이다. '거룩'이 무엇인지 몰라도 우리

가 머리를 하늘로 두고 얼님(靈長)의 일을 다 하려고 하는 것은 이 거

룩함을 바라는 것이다. 얼님(聖靈)을 머리에 이어야 할 것을 덜(魔鬼)

을 등에 업으면 더럽은(더러운) 놈이 되고 만다. 만물의 영장(靈長)이

라는 사람이지만 얼님을 버리면 형이하(形而下)의 짐승으로 떨어지고

만다. (1957)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리에 참여할 수 있을까?사람은 악과 선

의 바탈(性)을지녔기에 선이 악을 이겨내자는 것이다. 안 되면 그만두

는 것이 옳으나 그럴 수 없는 인생이기에 하느님을 신앙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 늦은 것 같고 자기가 하면 될

것도 같아 급히 하려고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에 있고 하

느님의 뜻이 있으니 그냥 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 우리가 할 일

은 수성(獸性)과 싸워 이기면서 하느님의 권능을 믿고 오래 참고 기다

리는 것이다.

   우리가 얼나를 깨닫고 제나(自我)를 이겨 나가는 데 힘차면 힘찰수

록 참된 삶을 이룬다. 비록 몸나는 어머니의 하문(下門)으로 태어났으

나 얼나는 하느님의 성령을 힘입은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하느

님의 얼(성령)이 통해야 하느님 아들의 권능을 얻어 안심입명(安心立

命)을 할 수 있다. 얼나를 깨달아 하느님의 나라에 드는 것이 안심입명

이다. 이래서 예수처럼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을 증언하게 된다.

믿음은 무슨 효험을 바라거나 병이 낫거나 한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온전하지 않으니까 온전한 하느님에게 자신을 바치는 것이 완전한 믿

음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1957)

 

▶이순신 장군은 훌륭한 장군이면 장군이지 동상은 왜 세우는가? 그것

을 빌어 자기를 보아 달라는 짓이다. 충무공의 정신을 받들어야지 그

육체를 야용(冶容)해서 잘 차려놓으면 무엇 하는가?결국 자기의 야용

(冶容)을 더 잘해보겠다는 것뿐이다. 이 백성이 이러니 아마 좀 높은

자리에 있으면 자기도 동상하나 세워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없지 않을

것이다. 여유만 있으면 그 짓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하느님을 위한

것도 자기의 야용(冶容)을 위한 것이라면 그 역시 우상이 되는 수가

있다. 여간한 주의가 필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1957)

 

▶인격의 온전함이 순결하고 청정한 독신생활을 가능하게 한다. 누구

를 의지하거나 기대거나 하는 것이 없고 혼자서 똥오줌을 가누게 되고

남녀문제를 초월하게 되고 생사문제를 초월하게 된다. (1957)

 

▶마음에 바람을 일으키는 것이 번뇌요 애착이다. 남녀문제에 바람이

일어난다. 내가 없는 마음은 깨끗이 남녀를 초월한다. 남녀의 바람이

자고 생각의 호수가 깊으면 그곳이 니르바나님 나라이다. 남녀유별(男

女有別), 부부유별(夫婦有別)하여 똥오줌을 싸 뭉개는 어리석은 짓은

벗어나야 한다. 이것이 그늠(금욕)이다. 똥오줌을 가린다는 것은 변소

에 간다는 말이고 철이 들었다는 것이다. 똥오줌을 못 가리고 밤낮 싸

는 싸개들이 현대인이다. 강아지처럼 똥오줌도 못 가리면서 밤낮 사랑

이니 섹스(sex)니 하는 것은 사랑도 성(性)도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평범 (平凡)을 좇지 않고 자꾸 진미 (珍味)만을 찾는

다. 본체는 언제나 평범한 것이다. 깬 사람은 언제나 평범을 찾는다.

평범한 것이 본래적인 것이다. (1957)

 

▶누구든지 귀와 눈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예쁜 모습에 빠지고 고운 목

소리에 홀리면 망한다. 사람과 사물에 끌리지 않고 빠지지 않으면 온갖

법도가 다 꼭 바르게 된다. 사람을 무시하게 되고 사람을 노리개로 여

기면 자기의 인격을 상실하게 되고 물건에 마음이 끌려 매달리게 되면

정신을 잃게 된다. (1957)

 

▶맫이(節) 곧이(貞) 굳셈(强)이 사람이 지닌 인격의 핵심이다. 이는

진중(鎭重)이라 할 수 있고 곧이는 명건(命健)이라 할 수 있고, 굳셈

은 세력(勢力)이라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욕심이 없을 때 마음은 안심

되고 마음이 안심되어야 우리의 생명이 힘차게 일어선다. 몸의 고픔(욱

망)을 놓아야 안심이 되고 얼을 이고 설 때 입명(立命)이 된다. (1957)

 

▶정치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이 민주주의라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는 것이 자유주의다. 제나(自我)의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자

유(해탈)이다. 우리를 제나의 욕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성령 (얼나)이다.

 

▶생활의 핵심이 되는 중요한 문제는 식.색(食.色)이다. 식.색이

생활의 핵심이다. 식.색의 정체를 모르면 삶을 바로 살 수 없다. 삶의

핵심을 못 붙잡으면 자기를 사랑한다고 하고 남을 사랑한다고 해도 사

랑이 못되고 해(害)치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의 진면목(眞面目.참

나)은 드러나지 않은 채 애매한 세상에 자칫하면 인생을 헛살기 쉽다.

보아서는 돈도 있고 지위도 있어서 세상에서 출세하는 것 같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썩은 무 같아서 아무 슬모없는 인생이다. 이 나라사람들이

언제 얼나를 깨달아 삶에 정곡인 중정(中正)을 꼭 찌를 수 있는 알찬

인생이 될 수 있을까?(1957)

 

▶하루하루가 심판인 것을 알아야 한다. 시간이 심판이요 역사가 심판

이다. 허송 세월이란 있을 수 없다. 깨어서 사는 것이다. 지나간 것은

찌꺼기다. 찌꺼기는 돌볼 것이 못된다. 내일을 찾으면 안 된다. 내일은

아직 도착되지 않은 손님이다. 언제나 오늘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다.

인생은 어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일에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오늘

오늘 오늘에 있다. (1957)

 

▶사람들이 다 늙어서야 '인생이란 공허한데 바쁘기만 하고(人生空有

忙) 만사에 분수는 이미 정해 있다(萬事分已定)'라는 소리를 한다. 모

든 일이 사주팔자라고만 해도 안 되지만 칼빈 신학이 아니더라도 큰

테두리 안에서는 분이정(分已定)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불교에서는

인연 아닌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한다. (1957)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요한 10:17-개역성경) 목

숨을 스스로 버린다는 것은 자살한다는 뜻이 아니라 살신성인(殺身成

仁)한다는 말이다. 생명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도 살신성인을 말한다.

정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누구에게서 배워서만이 아니라

저절로 알 수 있는 일이다. 육신을 죽이고 생명(얼나)이 살아야 한다.

육신의 껍데기를 벗어 버리면 또렸해지는 것은 우리 얼생명이다.

24,578은 내가 오늘까지 밥을 먹고 살은 날수다. (1957)

 

▶개성 사람은 경제를 잘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의 경제 목적은 돈

을 모은 다음에는 노름(도박)하러 다니고 산소치레나 하고 첩 (妾)을

얻는 것이 고작이었다. 경제를 넓은 데다 목적을 두었다면 동양에 제일

가는 부자가 5백 년 동안에 몇 사람은 나왔을 터인데 경제의 목적이

그만큼 좁다보니 큰 부자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기껏 부자가 되어

노름하러 다닐만하고 산소치레나 하고 첩이나 두었으면 남부럽지 않은

신세라 삶의 목적은 이루어진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개성 사람이 경제에 눈을 뜬 것은 고려조가 망하자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하여 경제에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5백 년 동안 세월이 지

나감에 개성사람들이 장사를 잘했으나 결국 보는 눈이 좁아서 그만 저

모양으로 되고 지금 개성 사람으로서 장사 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

렵게 되었다. (1957)

 

▶우리는 나라를 망해도 보고 다시 찾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가족주의적인 유교사상에 파묻혀 있으면 이

험한 세계 조류에서 다음 우리에게 돌아을 차례가 무엇이 될지 걱정스

럽다. 지금 우리가 산소치레나 하고 족보타령이나 할 때가 아니다. 송

장은 안 보이게 치우면 되고 선조는 그 이름이나 적어 놓으면 된

다. (1957)

 

▶거짓 빛(태양)가운데서 세상에 맘을 내어서(生心) 참이 될 리 없

다.생심하면 죽는다. 몬(物)에 맘이 살아나면 안 된다. 물색(物色)에

틀어박히면 죽는다. 우리는 물질을 심판하러 왔다. 물질을 물색해서 집

어쓰겠다고 온 것은 아니다. (1957)

 

▶이상한 것을 중히 여기는 것을 진중(珍重)이라 한다. 사람들은 괴상

한 취미를 진중하는데, 이것이 잘못이다. 진미(珍味)라 해서 70먹은 늙

은이가 괴상한 취미를 찾는다. 어지간히 맛을 다 보았을 터인데도 그

모양이다. 8가지 진기한 맛(八珍味)이 있다고 한다. 달아나려는(走) 것

을 한 번 가지겠다(取)는 것이 취 (趣)자이다.

   언젠가 먹어 본 맛이 참 좋았는데 그런 맛이 또 없나 하고 찾아다닌

다.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아이들이 무슨 맛이 있나 하고 호기심을 일

으켜 별일 다 저지른다. 여기에는 나쁜 본을 보인 어른들의 죄가 크다.

친애(親愛)와 존경(尊敬)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이 사회가 이 모양으

로 타락해 버린 것이다. (1957)

 

▶내 몸은 오 척쯤 된다. 여러분은 세 치쯤 더 클 것이다. 흙이 우리의

오 척 몸둥이를 일으켜 세웠다. 대기(大氣)의 산소가 사람 노릇 하라

고 자꾸 내 호흡을 시켜 준다. 그러한 가운데 마음이라는 것은 만고(萬

古)의 옳은 뜻에 가서 젖으면 이 목숨이라는 것에 영원한 얼이 일어난

다. 내가 얼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얼이 나를 일어서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아들(얼나)이 아버지(하느님)를 만난다. 그러나 아

버지 따로 있고 아들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얼생명

으로 하나이지 둘이 아니다. (1957)

 

▶성인(聖人)이 무엇이냐? 몬(物質)에 빠지고 미끄러지려는 나에게

몬을 차 버리고 깨끗해 보라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얼로 거룩해 보자

는 것이 성인이 아니겠는가? 우(하느님)에서 내려오는 얼로 자꾸 거룩

한 생각을 하여 웃(하느님)자리와 같이 거룩해 보자는 것이 성인이 아

니겠는가?내 위가 없다고 하는 이들은, 내 위에 누가 있으랴 하는 이

들은 지각(知覺)이 없기로 마치 철없는 사람과 같다. 제 머리가 가장

위인 줄 알고 일을 저지르니 그 하는 일마다가 못된 짓이 될 수밖에

없다. (1957)

 

▶요즘처럼 맛으로 사는 시대에 사람들은 참(眞 ·하느님 ·얼나)을 찾

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참은 사람들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하느님의 뜻

을 이루겠다고 나서야 참이 가까워진다. 참은 곧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참을 알자는 것은 사람의 슬기이다. 이 슬기(지혜)는 사람이 지닌 속알

(얼나)에서 나온다. 이 속알에서 나오는 슬기를 반야바라밀다라고 한

다. 그 속알이 있기에 우리가 짐승 노릇에 빠져있는 것을 건져 참이신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참을 알려

는 슬기가 있어야 한다. 참을 알려는 슬기는 참나(眞我 얼나)에서 나

온다. 참을 찾으려는 원동력은 슬기에서 일어난다. 참은 성령이신 하느

님이시다. 참을 찾아 알게 하는 것도 하느님의 성령(얼나)이다. 성령의

얼나가 하느님 아들이다. (1957)

 

▶공자(孔子)가 강가에 서서 냇물을 보고 무상(無常)함을 한탄했다.

그것은 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것

이다. 모든 인생은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흘러간다. 사람들은 집에 머

물고 있으니 가는 것 같지 않지만 집에 머문다는 것은 먼 길을 떠나가

다가 하룻밤 묵어 가는 것밖에 안 되는 것이다. 3대째 눌러 사는 집이

라 해서 영원한 것 같으나 사람이 무슨 영원한 게 있겠는가? 사람은

밤낮 없이 가는 걸 안다면 우리는 저녁 잠자리에 들어가듯이 한 번 싱

긋 웃고 죽음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대장부가 아니겠는

가?(1957)

 

▶소심출세(小心出世)라는 말은 말조심해서 출세하란 말이다. 마음이

란 것은 크게 먹으면 교만해져 안 된다. 작게 작게 아주 작게 해서 빈

마음이 되어야 한다. 출세한다는 것은 행세한다는 뜻인데 넓은 세상에

나가 본다하여 출세했다고 한다. 요즘 출세라는 것은 거드름 피우며 나

다니는 것을 출세하여 행세하는 줄로 안다. 본래 출세는 그런 게 아니

다. 백성들이 좀 나와서 일 좀 해달라, 정말 복되게 해달라고 할 이는

소심자(小心者)라야 한다. 맘이 크다가는 전부 삼켜보고 싶은 맘이 생

겨 못된 행세를 하게 된다. 올바르게 하려면 소심출세하여 붓다

(Buddha)와 같이 이 세상 위로 올라갈 곳까지 올라가 구경각(究竟覺)

을 이루어야 한다. (1957)

 

▶불경은 붓다님의 말씀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오면서

전해진 얘기를 말한다. 그러나 모든 작품이나 저술들은 물질세계의 사

진첩에 불과하지 정신은 아니다. 정신은 지나가는 것이다. 오늘 이 시

간 만나서 말씀을 생각하는데 이것은 정신이다. 지나간 뒤에 속기나 녹

음을 해놓은 것은 하나의 사진첩이지 결코 정신은 아니다. (1957)

 

▶이 지구는 커다란 잔치를 하고 많은 손님을 청하고 있다. 40년 뒤는

인구가 지금의 두 배로 늘어난다고 한다. 사람들이 오래 살게 되어 사

망률이 적어지고 있다. 곧 손님이 잔치 집에서 일어서지 않으려 한다.

손님을 더 붙잡아 두자는 게 이 과학문명이다. 시간선상에서 출생률과

사망률이 경주하고 있다. 1천7백 년 뒤에는 인간의 무게가 지구의 무

게와 같아진다. 2천4백 년 뒤에는 사람의 무게가 태양의 무게와 같아

진다. 곧 1천7백 년 뒤에는 지구에 모래 하나 안 남고 모두 사람 몸뚱

이가 되어 꿈틀거리게 된다. 결국 사람이 자연을 정복하자는 구경(究

竟) 목적이 지구 위에 사람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되었다. 이것이 이른

바 인구폭발이다. 인구폭발은 원자폭탄보다 무섭다는 것이다. 이렇게

위급한 문제의 해결은 삼독(三毒: 탐 ·진 ·치)을 이겨 내는 순결(純

潔)에 있다. 이 몸은 짐승인데 우리는 짐승의 욕심을 버리고 사람 노릇

하자는 것이 순결이다. 이는 2천5백 년 전에 석가가 말했다. 인구 증가

의 문제는 중대한 문제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할까? 나는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걱정하는 것이 곧 기도이다. (1960)

 

▶이 세상에는 만물(萬物), 만사(萬事)가 있는데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事)와 물(物)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事)와 물(物)이

있다. 전자(前者)를 좇아가고 후자를 피하려고 한다. 사람들은 좋은 것

을 추구하려 골몰하고 있다. 남들이 좋은 것이라 하는 것에도 나는 보

려고도 않는 것이 많다. 이것은 극단으로 다른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사상가이든지 버리지 못하는 게 있는데 진 선 미(眞善

美)가 바로 그것이다. 진 선 미의 내용은 다르지만 다 이를 추구한

다. (1960)

 

▶아버지께서 주신 우리의 개성대로 살아야 한다. 짠 놈은 짠맛을, 매

운 놈은 매운 맛을 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밖에다 버림을 당한

다. (1960)

 

▶이 세상에서 미인(美人)과 부귀(富貴)는 병(病) 아니면 죄(罪)다.

정말 온전한 세상에 부자와 귀인이 있을 리가 없다. 온전한 세상에서는

미인도 병신도 없다. 미인을 세상에서 권장하는 것은 이 세상이 병들어

서 그렇다. 장애인에 대해서는 내가 괴로움을 받을 걸 저 사람이 대신

한다는 생각이 들어야 옳은 것이다. 미인도 마찬가지다. 눈살이나 눈총

을 받는 것이 제일 괴로운 것이다. 불구나 미인은 눈총을 많이 받으니

괴로운 것이다. 거기에 미인은 유혹을 받기가 쉽다.

   남녀관계에 냉전 쪽으로 천품을 타고난 것이 강한 자는, 냉전 쪽으로

가고 열전 쪽으로 천품을 타고난 것이 강한 자는, 열전 속에 죽어나는

것이다. 냉전과 열전과는 분명 두 길인데 이 두 가지가 다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냉전하는 사람이 열전하는 사람을 잘못이라 할 수

는 없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다 있을 이유가 있어 있는 것이다. 다

자연스런 것이다. 자연스럽지 못하면 안 되는 것이다. 몸은 물질이니

물질의 법칙을 따른다. (1960)

 

▶이 세상은 어른이 없는 시대다. 영화 광고에 키스(입맞춤)가 무언

가? 어린이들에게 성생활을 하게 허용 않으려면 대낮에 극장 앞에 그

런 그림 붙이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들이 저희들끼리 입만 맞출 것 같

은가?그렇게 커서 뭘 할 것인가? 이건 우리가 단단히 싸워야 할 것이

다. 나는 역사의 종교적 종말관은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다

른 의미로 종말관이다. 원자전쟁, 인구폭발 공해문제로 지구의 종말이

올 것을 부정할 수 없다. (1960)

 

▶이 세상은 거짓이다. 이 세상에서 참(眞)은 못 본다. 선(善)도 미

(美)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서 참(眞)인 것 같은 것은 절대의 참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참(眞)은 제 것이라야 참인데 이 세상에 참은 빌

어 온 세상이라 참이 없다. 이 세상에서는 불만이 있고 결핍이 있는 것

은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하신 하느님이 참에로 자꾸 오라고 하신

다. 이 세상에 진선미(眞善美)는 없다. 그러나 이를 잊어버리지 말라고

사이비 (似而非)의 진선미 (眞善美)를 둔 것이다. (1960)

 

▶우리는 이제 예에 살지 않으면 다음 순간 이제 예는 가 버린다. 이

제 예에서 만족해야 한다. 이제 예에서 무엇을 찾아야 한다. 진 ·선 ·

미(眞善美)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보통은 중간에서 그만둔다. (1960)

 

▶이 세상에서는 흔히 이 만하면 미(美)다. 선(善)이다라고 하려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진선미가 없다. 절대(絶對)에서는 이 세상에서

처럼 진선미가 따로따로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의 하느님께서는 진

이면서, 선이면서, 미일 것이다. 진.선.미의 하느님이시다. (1960)

 

▶자유(自由)는 제 맘대로 한다는 게 아니다. 전능자도 제 맘대로 못

하는데 그 밖의 딴 게 어떻게 제 맘대로 하겠는가?자유란 내가 한다

는 뜻인 유기(由己)다. 책임을 제 스스로 제가 단단히 져서 옆에 사람

에게도 책임을 묻는 게 자유다. 그게 니르바나님에게 든 사람이다. 4

19 혁명의 어린 아우들은 책임을 단단히 묻지 않았는가?(19fo)

 

▶적어도 생각하는 이는 높고 멀고 큰 것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 머리

보다 더 높고 멀고 큰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상대세계에서 솟아나가

야만 산다는 뜻이 우리에게는 줄곧 있다. 이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다. 그런데 간다고 해야 알아듣기가 쉽다. 참나가 예서(상대) 계로(절

대) 가고 있다. 차(車)는 벌써 탔고 예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

다. (1960)

 

▶우리의 맘은 덧없는 것이다. (心無常) 나는 예수 믿소 하고는 그 다

음에 하는 말이 흔히 '맘 하나만 잘 쓰면 되지'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

는 사람은 맘이 덧없다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즉심시불(卽心是佛)이

라고도 하지만 맘이 모든 죄악의 괴수라고도 했다. 게가 맘의 스승이

되어야지 맘을 너의 스승으로 하지 말라"(대반야심경)고 했다. 맘에 따

라가서는 안 된다. (1960)

 

▶제나(自我)가 없어야 한다. 사사(私事)가 없어야 한다. 올(理)만이

사사(私事)가 없다. 진리에는 사사가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했

는데 참(法 Dharma.참나)에는 제나가 없어서 내가 좋아한다. (1960)

 

▶이 세상 떠날 때는 맘이 시원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아직 준비가

못된 것이다. 의지하지 않을 곳에다 의지했기 때문에 죽을 때 시원하지

못하다. (1960)

 

▶이 세상에는 진선미가 없다고 나는 말한다. 진선미란 영원해야 하는

데 이 세상에서 진선미라고 하는 것은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어지

곤 한다. 이렇게 있다 없다 하는 것은 참 진선미가 아니다. (1960)

 

▶믿는 것과 아는 것은 둘이 아니다. 믿어야 더 잘 알아지고 더 잘 알

아야 더 잘 믿게 된다. 이렇게 믿음이란 건 자꾸 자라는 거다. 자라는

것이 생명이다. (1960)

 

▶좋은 것은 머리에 이어야 한다. 우리 머리가 위로 들린 것은 하느님

을 모시러 함이다. 하느님 소리가 싫으면 진리라고 해도 좋다. (1960)

 

▶애당초 뭣인가 오리라고 생각함이 잘못이다. 뭣이 오리라고 생각하

는 데서 주의(主義)가 나온다. 예수가 재림한 지상천국(地上天國)이니

미륵불이 온 불국정토(佛國淨土)니 하다 못해 공산 유토피아가 온다느

니 하고 떠든다. 오긴 뭐가 오는가? 진화니 발전이니 하는 데서 속는

다. 진화 ·발전하면 무슨 좋은 게 있을 것이라는 미신은 죄다가 하고

있다. 인류 역사가 물질적인 것은 죄다 본 것 아닌가?그 밖에는 별 다

른 게 없다. 우리가 본 것밖에는 없다. 무엇을 차차 개선해 보려고 함

이 잘못이다

   과거에 전 인류의 운동으로 술, 담배를 하지 않게 힘쓴 이도 있었지

만 지금은 사람들이 술을 더 많이 마시고 담배를 더 많이 피우고 있

다. (1960)

 

▶사람이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기를 바라고, 땅 위에서 장생불사(長

生不死)하기를 바라는 것은 도(道) 닦는 게 아니다. 영원불변하는 것

은 진리의 정신을 낳는 얼나뿐이다. (1960)

 

▶사람은 제가 무던하거니 생각하면 덜된 거다. 얼굴도 그럴 거다. 나

가 제법 잘났거니 하는 생각이 있으면 낮짝이 두꺼우니까 그런 생각들

하는 것이다. 낮짝이 두꺼우면 암만해도 그 얼굴은 꼴 보기가 싫다. 하

늘 그물은 크지만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잡는 다고 노자(老子)가 말했

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그물은 암만해도 빠지는 데가 있다. 미스코리

아 선발대회로 이 나라에서 제일 아름다운 미인을 뽑는다지만 정말 미

인은 아무래도 빠진다. (1960)

 

▶참(眞)이란 허공밖에 없다. 없어야 참이고 있는 것은 거짓(假)이다.

이 땅 위에서 선(善)이란 반짝하고 마는 것이다. 한순간 반짝하고 사라

지는 게 선이다. 4.19 의거도 반짝한 것이다. 그 뒤를 따라 추도식이

니 뭐니 하는 것은 더러운 거고 지저분한 거다. 어찌 보면 그런 건 죄

악이다.

   매운 맛이 없으면 굳은 게 없다. 마음고추(忠烈) 하나만은 꼭 지켜야

한다. 미(美)는 선(善)이 있어야 미다. 선(善)은 진(眞)이 있어야 선이

다. 미(美)는 만지면 없어진다. 선(善)은 자랑하면 없어진다. (1960)

 

▶이 세상 살림이란 분명 꿈이다. 꿈인 줄 알지만 아무리 깨려고 해도

꿈속에서는 못 깬다. 우리는 이 꿈을 죽을 때 깬다. 그런데 꿈인 줄 알

고 꾸면 참 좋다. 종교.신앙이란 좋은 꿈꾸는 거다. 좋은 사상은 좋은

꿈이다. 이 현실이 꿈인 줄 알고 꾸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웃을 수

가 있다 (1960)

 

▶돈을 둥글게 만든 것은 잘 돌아가라고 한 것이다. 처음에 돈을 생각

한 이는 경제가 잘 돌아가라고 한 좋은 생각이다. 이게 잘 돌아갔으면

은혜가 됐을 터인데 잘 돌아가는 반면에 걸리기도 잘한다. 돈이 있어

간단히 돌릴 수 있어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 잘 못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돈이 잘못 돌아서 그렇다. 몸에 피가 잘 돌아야 건강하듯 사회

는 돈이 고루 잘 돌아야 건전한 사회이다. 돈이 걸리지 말고 몰리지 말

고 제대로 잘 돌아야 개인이나 민족이나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우리가 먹는 것은 간단히 해야 한다. 먹는 것을 글이니 문화니 팔아

먹지 말고 겨우겨우 살아가야 한다. 글이나 전도나 설교해서 돈벌이해

서는 안 된다.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했다. 일 안하고 살

겠다는 것보다 더 나쁜 게 없다. 그러면 노예밖에 안 된다. 미국같이

경제가 풍부한 나라에서는 그래도 좋지만 이 나라에서 지식을 지껄이

고 신령한 무엇을 말하고서 돈을 받아먹는 다는 건 참 못할 짓이다.

   돈은 이해관계로 얽혀 주고받는다. 급한 때는 폭리를 남기게 된다.

그러니 약은 되도록 쓰지 말아야 한다. 병은 급한 것이라 약값은 폭리

다. 약은 될수록 쓰지 말아야 한다.

   품팔이 피팔이는 참이 아니다. 노력이나 피의 대가로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대로 아침에 온 이나 저녁에 온 이나 다

같이 돈을 주어야 한다. 우리가 사람끼리 만났으면 그날 일용할 양식은

주어야 한다. 그러니 저녁에 온 이도 다 똑같이 주어야 한다. 품의 삯

으로 돈을 주는 게 아니다. 그것은 결코 참이 아니다. (1960)

 

▶한 사람이 추켜도 올라갈 텐데 만 사람이 진 선 ·미(眞善美)라고

추기면 하늘도 얕아질 게 아닌가? 한국의 처녀에서 진선미를 뽑는 것

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진선미에 뽑힌 소감을 말하라고 하니 '뭐라 말

할 수 없다'고 했다. 만약에 만 사람이 날더러 거짓(假)이요, 잘못(惡)

이요, 밉다(醜)라면 땅이 휘청거릴 만 할 것이다. 하늘 땅은 그대로 있

는데도 제 마음이 그럴 것이다. 이기붕은 땅이 뒤집히는 것 같아서 땅

속에 안 들어갈 수 없어서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게 이 세상이

다. 참을 찾는 사람은 이런 외부사(外部事)에 초연해야 한다. 좀 성공

했다고 우쭐할 것도 없고 좀 안 된다고 풀죽어할 것도 없다. 이 세상은

이렇게 복잡한 세상이지 단순한 세상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

불경을 읽는다. 마음이 허공같이 청정(淸淨)하면 누가 훼예(毁譽)한다

해도 수미산(에베레스트 산)같이 움찍 아니해야 한다 (1960)

 

▶한량없이 권선(勸善) 심미(審美)하자는 게 인생이다. 진선미(眞善

美)를 한정 없이 추구하는 게 인생이다. 진선미는 영원하지 않으면 않

된다. 이 세상에는 진선미가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이를 추구하는

것은 아마 우리가 이를 잃어버린 모양이다. (1960)

 

▶사람이 새벽에는 높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높

은 생각을 가지기 어려워진다. 낮에는 몸살림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리

는 낮은 이 땅을 떠나 영원한 절대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맨 꼭대기

절대로 가는 거다. 새로 뭐 되는 게 아니다. 영원 절대만이 우리의 신

망애 (信望愛)다. (1960)

 

▶세상에는 늘 가는 게 없다. 사람이 한때 지성(至誠)을 할 수 있지만

늘 끊이지 않게는 잘 안 된다. 지성(至誠), 열성(熱誠)은 우리 속에 조

금씩은 있다. 그러나 곧 없어져 버린다. 우리 마음이 풀어져 무엇에 끌

려 간다. (1960)

 

▶이렇게 우리가 모이는 것도 유한(有閑)이다. 유한한 시간을 잘못 쓰

면 죄악이다. 유한한 시간을 팽팽한 긴장으로 보낸다면 영구히 후회 안

할 것이다. 게으르게 멍청하니 있다가 어디 가서 한 마디말을 하라면

머리가 멍해 말도 못하는 그런 지경에 가서는 안 된다. 이야말로 죄악

이다. (1960)

 

▶성경.불경을 읽어 진리(얼나)를 알았다면 거짓이다. 말로 나타낼

수 없는 영원한 님을 만나 언어도단(言語道斷)을 못했으면 거짓이다.

진리(얼나)를 알아서 종교를 가진 게 아니다. 도리어 진리(얼나)를 모

르니까 종교를 갖는 거다. (1960)

 

▶하루하루를 졸라매어 기도하는 가운데 마침내는 영원한 생명 줄에

잇닿아서 영원한 생명(얼나)에 들어가는 것을 믿어야 한다. 사람은 영

원한 생명을 깨닫자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불교에 가까운데 불

교는 영원한 생명 (얼나, 法我)을 깨닫자는 것이다. (1960)

 

▶푸른 나무는 겉으로 푸르게 나타내는데 속에는 불을 쌓아 놓았다.

푸를 청(靑)자는 생(生)자와 단(丹)자가 합해서 이뤄진 회의문자다. 생

단(生丹)한 마음이 정(情)이다. 연애를 해도 정사(情事)할 만큼 되어

야 인정할 수 있다. 이 만큼 이라도 불을 못 뿜는다면 그것은 못된 장

난에 불과하다. 교육의 목적은 정조(情操)를 바로 갖는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생심 (生心)을 하되 무주착심(無住着心)해야 한다.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