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사랑(仁愛)

 

 

▶우리가 만나 이야기하는 것도 감사할 일이다. 우리가 하루 품을 내

는데는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집안 식구의 수고가 있다. 우리가 오늘

이때까지 건강하게 살아온 까닭은 우리들보다 더 괴로움을 당하면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애쓴 앞서 간 사람들의 은혜 때문이다. (1956)

 

▶친구 사이에 '너 한번 속이려고 일부러 한번 해보았다'고 한다. 그

렇게 속인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단 말인가? 실없는 소리를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우리는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 실없는 소리만 해도 무지

한 짓인데 그 위에 변명하고 책임을 회피하며 악을 조장한다면 이 이

상 무지한 짓이 어디 있겠는가?(1956)

 

▶사람은 이해타산으로 싸우기를 좋아하는데 싸울 대상은 자기이지 남

이 아니다. 자기를 이겨야지 남을 이기면 무얼 하나. 그런데 세상에는

남 위에 서려고 하는사람이 참으로 많다. 온 세상을 깔고 앉아 보아도

자기를 이기지 못하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자기를 이기지 못하면 영

원한 생명 (얼나)은 멀다.

   남을 이기는 것은 나와 남을 죽이는 일이요 나를 이기는 것은 승리

요 생명이다. 참을 찾아 올라가는 길이 나를 이기는 승리의 길이다. 남

을 비웃고 사는 것을 자꾸 익히고 남 위에 서기를 자꾸 익히고 있다.

우로(하느님께로) 올라가는 옳은 일을 버리고 남 비웃기를 익히는 씨

알들이 뭉친 나라는 불행한 나라이다. 이 나라가 그러한 나라가 되어가

고 있다. (1956)

 

▶사람이 이 세상에서 평생을 지나가는데 마침내 참나를 찾아 서로 사

랑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 본래 하느님께서 내게 준 분량을

영글게 노력하면 반드시 사랑에 이르게 될 것이다. 사랑을 잘못하면 죄

가 될 수도 있다. 짝사랑으로 인해서 서로 때리다가 살인에까지 이른다

면 그것은 독한 탄산가스와 같은 죄악이다. 그렇지만 사랑을 너무 에누

리해서 사랑의 죄악만을 강조한다면 사랑의 본질을 놓치기 쉽다. 우리

가 사랑으로 살면서 사랑의 본원(本元)에 들면 결코 해로운 것이 될

수 없다 (1956)

 

▶친한 친구를 만난다는 것은 일생에 한 두 번 있으면 많은 것이다.

공자 같은 분은 열 명쯤 되는 것 같다. 유붕자원방래불역락호(有朋自

遠方來不亦樂孝乎-논어 학이편) 네가 나를 알아주고자 나를 찾아주

니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나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몇 백

리 밖에서 찾아오는데 죽마고우(竹馬故友)를 만나는 것같이 금방 익숙

해진다. 하룻밤을 새더라도 참 즐겁다. 세상이 알아주지 못하는 나를

찾아왔으니 얼마나 기쁜가. 예수교 불교 유교 등 믿는 종교는 다르

지만 진리는 하나밖에 없는 것을 얘기하니 이보다 더 좋은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공자가 말하기를 나를 몰라주는 것을 걱정하지 말자. 내가 남을 몰라

주고 내가 사람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을 걱정하라고 했다. 일생을 살

다가 한 번도 친구가 찾아오지 않는 일이 있다. 심히 외로워 영 남이

나를 몰라주는구나 하는 그러한지경에 도달할지도 모른다. 남이 나를

몰라주어도 노여워하지 않겠다. 왜 그러냐 하면 생전에 동지(同志) 한

사람을 얻지 못한 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해도 노여워하지 않는

다면 그 역시 그이(君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예수와 공자가 걸어간

길이 바로 이러한 좁은 길이었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하느님

만 나를 알아주신다면 그만인 것이다. 얼생명 하나로 사는 것이 영원

(하느님)으로 통하는 길이다. (1956)

 

▶우리가 이왕에 어머니 뱃속에서 조히 열 달을 살았으면 잘 나와야

한다. 또 이 세상에 나왔으면 조히 살아가야지 나만 여기서 조히 살면

안 된다. 한 어머니 배에 쌍둥이가 있었으면 나만 조히 나와도 안 된

다. 쌍둥이 하나마저 조히조히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는 나와 같은 수십 억의 쌍둥이(인류)가 있지 않은가? 이 수십

억의 쌍둥이가 조히조히 다 살아가야 된다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아니

겠는가?

   이승의 배를 버리고 다른 배를 갈아탈 때에도 나만 타면 좋겠는가?

다같이 타서 조히 갈 것을 우리는 바라는 것이다. 이 조히 살겠다는 이

것은 하느님의 큰 뜻이다. 절대(하느님)의 큰 정신이다.

   내 속에도 모순이 있고, 이 사회에도 모순이 있고, 이 우주에도 모순

이 있다. 이 모순 가운데에도 모순이 있는 까닭으로 하느님의 뜻에 좇

아 조히조히 살고 절대자(하느님)의 뜻대로 깨끗하게 살겠다는 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는 우리라는 것을 믿고 산다. (1956)

 

▶미친 척하면서 떡 장사를 보고 떡을 달래본다는 말이 있다. 농(弄)

을 하는 사람도 미친 척하고 제 하고 싶은 말 다한다. 업수이 보기도

하고 욕질도 해보고는 이것을 다 제 마음이 아니고 농으로 했다고 한

다. 요새는 친구니 벗이니 하는 것이 근심 덩어리로 되어 있다. 가장

친한 친구 사이니까 농짓거리 좀 해보았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친구인

가? 이 세상에서 다른 것이 다 없어져도 자기를 알아주는 벗 하나 있

었으면 하는 것이 인정상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맘놓고 사

귈 벗이 없다. 우리가 친구라면서 남을 웃기려고, 벗을 놀리는 일이 무

관한 것같이 생각하는데 이것은 벗 사귀는 길이 아니다. (1956)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정말 어렵게 비집어서 나온 것이다.

오고 싶은 세상이 아니라고 볼지 모르나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참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어 비집어서 겨우 요나마 세상에 참여한 것이다. 눈먼

거북이가 바다 속에 오래도록 살아오는데 100년에 한 번씩 그 눈먼 대

가리를 쪽 바다 위에 뽑아 바깥바람을 쏘였다. 또 언제부터 흘러 내려

오는 것인지 모르지만 가운데 구멍 뚫린 널빤지가 떠내려 흘러오다가

그 구멍에 그 거북이의 대가리가 쑥 끼워졌다. 그 기회라는 것이 어떻

게 되는가?사람이 태어나기란 이 맹구우목(盲龜遇木)처럼 어려운 것

이다. (1956)

 

▶대동(大同)이라는 말 또는 대동주의 (大同主義).대동정의 (大同정

義)라는 말을 쓴다. 대동이라는 말은 하나(一)라는 뜻이다. '응당히 하

나다'라는 말로써 '하나'가 옳고 가를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편이라

옳으니 위해 주고 자기편이 아니면 그르니 미워해 없애야 겠다고 하는

것은 대동(大同)의 하나가 아니다. 하나(大同)를 바로 알면 그런 생각

을 할 수 없다. 자기 주장만 옳고 다른 이는 그르니까 멸망시켜야 한다

는 소견을 가지고는 대동(大同)을 찾을 수 없다. 대동이란 온통 하나

가 되는 지혜이다. 예외라는 것 없이 누구나가 하나되자는 것이다.

   어떻게 대동(大同)이 될 수 있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대동하자는 이·

가 어디 있겠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마침내는 하늘이 되고 하나

가 된다. 모두가 하나(전체)인 하느님께로 들어가야 한다. 너와 나로

갈라져 있어야 하는 상대세계에는 잠깐 지내다가 마침내 이것을 벗어

버리고 절대자(하느님) 앞에 나서야 한다. 그러므로 말씀도 하느님의

말씀밖에 없다. 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굉장하다고 할지라도 하나(절대)

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는 하나(전체)로 돌아가는 것을 믿는

다. 하느님이 정의(正義)이므로 최후의 승리를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들어간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느님께 들어간다는 것은 이길 것 다

이기고 하나(허공)가 된다는 말이다.

   공자(孔子)의 대동편(大同篇)이라는 책이 있다. 유교(儒敎)는 송

(宋)나라 때 와서 처음으로 유교라는 철학체계가 세워졌는데 여기서는

대동정의(大同正義)라는 것을 부인한다. 유교 밖의 것은 이단시(異端

視)하여 석가와 노자(老子)의 대동주의를 아주 이단이라고 배척했다.

   이 사람의 주장은 대동하자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떠나

와서 다시 하느님께로 들어가는 대동의 길을 걷는 것이다. 세기(世紀)

가 바뀌어짐에 따라 차차 대동(大同)으로 눈을 뜨는 것이 확연히 보이

고 있다. 온 세상이 대동으로 움직이려고 하고 있다. 이것을 그대로 넓

혀가 참(하느님) 뜻을 우리 인류가 받들면 이 땅 위에 대동의 세계를

한 번 보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것을 거역하면 인류의 자멸이

있을 뿐이다. 대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 그만두는 것이 된다. 모두

가 마음 편하게 아무렇게나 생각 없이 지내자면 이 지구상에는 멸망이

올 수밖에 없다. 대동주의라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주의는 그만

두고 대동(大同)을 생각해보자.(1956)

 

▶이 사람은 돈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다. 돈 없는 사람은 누구나 다 돈

거래라는 것을 할 리가 없다. 그런데 몇 푼 안 되는 돈을 나보다도 어

려운 사람이 와서 돈을 돌려 달라고 한다. 그때 돈이 없으면 할 수 없

지만 있으면 돌려준다. 돈 갚는 기한을 정하는데 그때 빌리는 사람이

빌린 돈 이자(利子) 대신에 그 기한까지는 담배를 끊으라고 말한다.

이러한 일이 몇 번 없는 일이지만 약속을 지킨 사람은 생전에 한 번밖

에 못 봤다. 물자라는 것은 그저 마구 내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조건 주는 것은 결과로 보아 그것밖에 안 된다. 내 생각에는 반드시

조건을 하나 붙였으면 좋을 것 같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조건을 붙이는 것같이 무서운 것은 없다. 그러나 하나(一)

의 조건은 가지고 싶다. 대동(大同)의 조건이라면 받겠다. 남이 주는

너저분한 조건보다는 독립정신으로 하는 대동의 조건이라면 나는 이것

을 받고 싶다. 대동으로 한다는 것은 다 같이 잘사는 조건이 분명하니

까 받아들일 수가 있다. 대동(大同)으로 돌아가는 데는 무책임해서는

안 된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너무나 바라기만 하는 것은 안 된다. 우리

가 대동으로 들아가려는 이 땅에서 그러한 무책임한 도움이라면 차라

리 굶더라도 이것을 사양하는 것이 오히려 대동정의로 사는 것이

다. (1956)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악을 행하다

가 고통을 당하는 것보다야 얼마나 낫겠습니까?"(베드로전서 3:17) 좋

은 일하고 곤란을 받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므로 그리 알라는 말이다.

잘하는데 욕을 보다니 그러한 말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이것이 하느

님의 깊은 뜻이다. 이 편지에 이 같은 말을 거침없이 하고 있다. 진리

가 무엇인지 알고 편지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악을 행하여 고난을 받는

것보다 선을 행하여 곤란을 받는 것이 낫다고 했다. 타락된 사람에게는

특히 잘 보아둘 구절이다. 이때까지 선을 행했는데 대접이 겨우 요것뿐

인가? 나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는데 왜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나?

성경을 읽거나 기도할 때에 이런 생각이 따라와서는 안 된다. 아무 집

사람은 부자가 되고, 아무 집 아들은 유학을 가고, 아무 집 사람은 장

관이 되고 이런 생각은 바로 나아가는 정신이 아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딴 뜻에서 선을 행함으로써 곤란 받는 것이 악을

행하여 받는 고난보다 낫지 않느냐고 우리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나를

높은 생각의 지경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여러분이 선한

일에 열성을 낸다면 누가 여러분을 해치겠습니까?"(베드로전서 3:13)

17절에는 선을 행하면 곤란을 받는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누가 해치겠

습니까?'라고 했다. 이는 필시 해를 입어도 이것이 해가 아닌 것을 결

정내리자는 것이다. 참나(얼나)를 낳아 영윈한 생명(얼나)에 이르는 데

는 이렇게 괴로워하는 모순이 있다. (1956)

 

▶친구에게 술 사 주는 것이 공경이 아니다. 어려운 때, 딱한 때 마음

으로라도 보태 주고 위로해 주고 생각해 주는 이것이 공경이다. 그리고

친구가 잘못하려 할 때 그 잘못을 깨우쳐 주는 것이 공경이다. 맹자(孟

子)도 책선붕우지도(責善朋友之道)라고 했다. (1956)

 

▶이 세상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맹수나 독사 같은 것도 미워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남을 노엽게 해서는 안 된다. 창조주가 맹수나 독사를

둔 것도 다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마하트마 간디처럼 생각이 이쯤까지

미쳐야 한다. 불한당도 있어야 할 뜻이 있어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한 것이라도 미움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심하게 미워하면 마침내는

난(亂)이 난다고 했다. '원수를 사랑하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산 것은 죽이지 말라'도 이 세상의 것을 미워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

세상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 선(善)은 무조건 선이다. 무조건적인 선이

아니면 그것은 악이 된다. 악은 치워 버려야 한다. 천만번 손해를 입고

실패를 당해도 그리고 기어이 죽임을 당해도 미워하지 않는 것이 선이

며 사랑의 극치이다. 간디는 이것을 간단하게 선이라 표현했다. (1957)

 

▶사람의 마음이란 곧잘 악을 피한다. 마음이 신(神)에 가 있으면 유

신(唯神)이요, 마음이 물(物)에 가 있으면 유물(唯物)이 된다. 마음은

무엇을 객관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맘과 몸은 다른 것으로 보아

야 한다. 그래서 만나야 할 것을 만나면 마음 그대로 해야 한다. 사람

이 사람 노릇 하고 물(物)은 물 그대로 절로 되게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제대로 하는 데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인(仁)이다. 이

인(仁)은 옛날부터 내려오고 있지만 미정고(未定槁)로 되어 있다. 공

자(孔子)는 공자대로 죽기까지 인(仁)을 하려고 한 것이지 완결을 보

고 이렇다라고 내놓은 것은 없다.

   후대 사람도 역시 그 시대에 맞게 인(仁)을 하려고 했지만 아직도

완결을 못 보고 미정고로 그냥 내려보낸 것이다. 이렇게 보면 근본 그

자리는 예전 그 자리가 된다. 옛 그 자리를 그냥 하는 것뿐 그렇게 하

고 그렇게 되게 하자는 것뿐이다. 문안(文安)의 원칙은 옛 그대로 있

다. 마음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인위적으로 하려는 데서 오늘의 불행이

온 것이다. (1957)

 

▶사랑에는 원수가 없다. 원수까지 사랑하는데 적이 있을 리 없다. 언

제나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언제나 무서운 힘을 내놓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평등각(平等覺)이다. 그래서 하느님도 사랑이라고 한다. (1957)

 

▶대자대비의 세계는 곱다 밉다고 하는 애증(愛憎)의 세계를 넘어서야

한다. 그리고 남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가질 때에만 나와 남이 하나가

될 수 있다. 시원하고 좋은 세상을 가지기 위해서는 아픔과 쓴맛을 같

이 맛볼 줄 알아야 한다. 그때에만 나와 남 사이를 가로막는 산과 골짜

기를 님어서 온 세상에 사랑이 넘치고 넘쳐서 늠실늠실 춤을 추는 꿈

을 이를 수가 있을 것이다. (1957)

 

▶구정 설날이 되어서 길에는 아이들이 울긋불긋 설빔을 차려입고 다

닌다. 어른들은 얼근히 취해서 호탕하게 거닐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

러한 반면에 신문보도에 의하면 섣달 그믐에 살기가 어려워 목숨을 스

스로 끊은 이가 있었다 하니 참으로 딱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한

편에서는 굶주리는 사람이 있는데 또 한편에서는 음식을 많이 차려서

지나치게 먹고 배탈이 나서 소화제를 찾고 의원을 부르고 야단법석을

한다. 사람의 수는 점점 많아지는 형편인데 물욕은 격증하고 서로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 배를 채우지 못해서 자살까지 하는 사람이 나오

는 것을 보면 이 사회가 유기체(有機體)로서 그 기능을 잊어버린 지

오래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에는 옛날보다 유기체라는 말을 많이 한

다. 그런데 자살과 같은 슬픈 현상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유기체가 어디에 고장이 나거나 어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답답

해서 말을 할 수 없다.

   우리가 본래의 나인 참나(얼나)를 모르고서는 어떻게 하느님을 알

수 있겠는가? 참나(얼나)를 모르고서 어떻게 사회에 사랑이 깃들 수

있겠는가?사랑이 있어야 유기체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근본 나(얼나)를

모르고 있는 이 사회가 유기체가 될 수 없다. 어디가 아픈 곳인지?어

디가 쓰린 곳인지? 어디가 가려운 곳인지? 어디가 한스러운 곳인지?

전혀 모르면서 어떻게 사회가 유기체로서 돌아갈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나라는 것의 진면목(얼나)을 알아보고자 했다. 그리하여 나의 진면

목(眞面目)을 더듬어 보았다.

   그런데 지난 1월 27일에 특별한 감상을 얻었다. 이 감상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해서 그날 밤은 그냥 새우게 되었다. 이 감상을 어떻

게 해결하나 생각한 끝에 단식을 결심하게 되었다. 단식한지가 오늘로

만 닷새가 되는데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지난 번은 열하

루 동안 했는데 이번은 몇 날이 될지 모르겠다. 오늘도 집에서 이곳

YMCA까지 꾀 먼 길을 걸어나을 수 있으니까 아직도 기운은 있는 셈

이다. 이 단식은 내 자신에게 물어보지 않고 하는 일이다. 제가 산다는

것을 모르니까 자기의 맘을 알 까닭이 없다. 내가 참나를 모르고서 무

슨 말 할 용기가 있겠는가? 여러분은 나의 성격을 잘 모르는 분이 많

을 것이다. 오늘 내가 나온 것은 내가 단식 중에 있는 것을 알리려고

온 것이다. (1957)

 

▶친숙한 사이에도 이견(異見)이 많은데 처음 만난 생면부지(生面不

知)의 사람인데도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 공명(共鳴)을 느껴 금방 동지

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은 흔하지가 않다. 죽을 때까지 사귈 수 있는

친구도 이렇게 맺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사상(恩想)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1957)

 

▶사람은 누구나 빈 맘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空心觀世) 맘을 비우

고 세상을 보면 복음(福音)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세상을 바로 보는

사람에게는 복된 소리가 들려야 한다. 어느 의미로 보아서는 정말 남의

선생 노릇을 하는 지도자는 선지(先知)의 성격을 꼭 가져야 한다고 본

다. 선지(先知)의 삶을 사는 이는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없다. 그리

고서야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세상을 바로 보게 된다. 세상을 바로 보는

가운데 생각이 나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세상을 바로 보는 것

이 관세음(觀世音)이다. 이렇게 되어야 참으로 남을 도와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도와 줄 수가 없

다. (1957)

 

▶사람은 참 복잡하다. 누구를 만나보고 싶은데 잘 만나지지 않는다.

명함 한 장 가지면 곧 쉽게 흉하고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러므로 하느님의 소리인 본음(本音) 정음(正音) 복음(福音)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의 소리를 알 때 너와나의 벽을 뚫어 통할수 있다. (1957)

 

▶우애(友愛)처럼 믿음성 있는 것은 없다. 그 밖에 믿음성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과 우애의 지경에 가야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을 할 수 있

다. 이같이 서로 만나서 우애할 수 있는 존신(尊信)의 세상이란 참 만

나기 어렵다. 존신의 세상이란 살과 털이 만나는 피상교(皮相交)가 아

니라 정신과 말씀으로 하나인 것을 말한다. 요한복음에 사람의 마음 가

운데 일어나는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 혼자만이 그렇게 알고 된다는 것

이 아니다. 우리들도 다같이 하느님의 품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말씀이 사람의 껍질을 쓰고 나온 것이 아닌가? 이것을

알면 人과 言이 합하여 信인 이유를 알 것이다. (1957)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 복을 내린다는 말은 참으로 좋은 말이다.

마음이 깨끗하고 바르게 살면 복을 받게 마련이라는 것은 히브리 사람

의 신앙이다. "주님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축복하시거늘'(시편 73:1)

이라 했다. (1957)

 

▶생명을 가진 이는 영원히 사랑을 추구하여 나가는 것이다. 내가 바

로 되고 안 되고는 무엇에 달려 있느냐 하면 영원한 님(하느님)을 찾

는 사랑의 힘을 가졌느냐 못 가겼느냐에 달려있다. 제 속에 속알(얼나)

을 찾아 얼의 나라(하느님)를 찾으면 얼사랑(仁養)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나를 낳아서(重生) 하느님 나라를 찾자는 것도 근본은 얼사랑을

하여 하느님의 뜻을 이루자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이르는 길을

자꾸 거듭나는 길밖에 없다. (1957)

 

▶귀 밝고 재조(才操) 많은 사람들의 범죄행위가 많다. 이 말을 들으

면 확실히 이 세상은 개탄할 일이다. 같이 사는 이 세상에서는 사랑과

공경으로 서로 몹시 아끼는 윤리 도덕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상대를

높이 받들어 머리에 인다고 님이라고 한다. 남을 친애.존경하는 것이

예다. (1957)

 

▶참 지기(知己)라면 하느님의 뜻에 같이 하고, 하나(전체)에 통하여

하느님을 위해서는 마음을 바치고 친구를 위해서 몸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서 제일 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로

향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얕은 얼벗과 사귈 수는 없다. 자기보다 늘 높

고 자기를 높여 줄 수 있는 지기(知己)의 얼벗과 사귀지 않으면 안 된

다. 요는 존신우애(尊信友愛)를 가지자는 것이다. 윤리 도덕은 이것이

아니고는 안 된다. 사람은 얼로 사귀는 우도(友道) 우애(友愛)라야 한

다. (1957)

 

▶이 다섯 자(尺) 몸둥이를 보면 한심하다. 이에서 박차고 나가야 한

다. 우리의 머리가 위에 달린 게 우로 솟나자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진리되시는 하느님을 향해 머리를 두는 것이다. 머리는 생각한다. 하느

님을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해 머리를 두는 것이다. 하느님을 내

머리로 받드는 것이다. 하느님이 참나(眞我)이기 때문이다. 얼나로 으

뜸이 되어야 하는데 철이 없어서 이 세상에 머리(元首)가 되려고 한

다. 그러다가 머리가 무거워서 감당을 못하여 굴러 떨어진다. 주역(周

易)에는 이 세상에서 머리(지배자)가 되지 말라고 했다. 예수도 섬기는

이가 되어야지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석가는 세상의

머리 (임금)되는 것을 그만두었다. (1957)

 

▶급선무가 밥에 있으면 안 된다. 우리 식구가 입고 먹어야지 자녀의

입학도 시켜야지 하고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은 나라와 겨레를 사

랑할 수 없다. 참 나라 사랑이란 지금 당대만 아니라 3대, 4대까지 구

차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몸 살림은 겨우겨우 사는 것이 옳다.

   세 가지 옛 것이 좋은 것이 있다고 한다. 오랜 친구 얘기하기 좋고,

묵은 나무 불때기 좋고, 오랜 글 읽기 좋다는 말이 있다. 오랜 글(고

전) 읽는 이 사람이 옛날에 입던 낡은 옷을 입었고, 입은 사람이 또한

낡은 사람이니 아주 그 세 가지가 합쳐진 것 같다. 집사람이 왜 그 더

러운 양복을 입고 나가느냐고 하지만 나는 좋은 것을 어떡하냐고 대답

한다. 그러나 정신만은 새 정신을, 말만은 새로운 말을 해야 한

다. (1957)

 

▶사람이 사귀는데 얼마만큼 깊이 사귀는 것이냐 하면 껍질 퍼덕지만

서로 관계가 있는 피상교(皮相交)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가만히 생

각하면 참으로 서러운 일의 하나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 속의 속

이다. 그러나 내가 남의 속에 들어가서 보지 못할 바에는 피상교에 지

나지 않는다. 가장 가까이 지나는 부부지간, 부자지간도 피상교이다.

그 밖에 아무것도 없다. 서로가 좋으면 서로 보는 껍데기 (낮짝)를 좋다

고 대단히 칭찬을 한다. 껍질에서 동동 맴을 돈다. 여기에 매어서 떠나

지 못한다. 껍질(皮相)을 보고 미(美)가 어쩌니 저쩌니 말을 한다.

   맘속을 아는 것을 지기(知己)라고 한다. 지기는 나하고 동지(同志)

는 아니다. 그러나 나하고 관계가 있고 나를 알아준다는 지기 (知己)도

얻기 어렵다. 옷 입은 것을 보고 사람의 무게를 달려고 하는 것은 피상

교(皮相交)에 지나지 않는다. 동지로서의 벗을 얻는다는 것은 극난(極

難)한 것이다.

   우(友)는 사람이 손과 손을 마주잡고 있는 그림 글자이다. 지금은 모

두가 친구인양 악수를 함부로 하고 있다. 벗은 하느님의 뜻을 가진 사

람을 말한다. 하느님의 뜻대로 하는 사람은 나의 형제가 될 수 있다.

그러자면 모두가 예수처럼 얼나로 솟나지 않고는 벗(友)이 성립되지

않는다. 예수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했다. 원수를 사랑할 줄 알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릴 수 있

는 사람이다. 그러니 지기난득(知己難得) 득우극난(得友極難)이

다. (1957)

 

▶신(信)에서 하느님의 말씀(言)하고 사람(人)의 정신하고는 영원히

떠날 수 없다. 여기서 정말 우애(友愛)가 나온다. 신(信)이 없는 데서

는 서로의 우애가 있을 수 없다 존신우애(尊信友愛)가 곧 윤리의 규

범을 세운다. 윤리 도덕은 사람 노릇을 옳게 하는 것이요, 그것에 말미

암은 곳에 존신(尊信)이 있다. (1957)

 

▶대접과 공경은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대접이란 고이는 것이고

공경이란 높이는 것인데 고이면 높아지고 높아지면 고여야 한다. 공경

이 없는 대접은 쓸데없다.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고이는 것

이 아니라 자기에게 필요하면 고인다. 그것은 이용이지 공경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실정은 먹을 것을 많이 갖다 놓는 것이 공경인 줄

아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많이 먹여 배탈나게 하는 것은 공경도

대접도 아니다. 가축으로 대접하는 것밖에 안 된다. 참으로 공경하고

대접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온 하느님의 아들인 속사람(얼나)

을 알아주는 것이요 내 속에 속사람(얼나)을 드러내는 것이다. (1957)

 

▶어버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감히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내가 남

을 미워하면 어버이가 걱정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러므

로 도대체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 없다. 더욱이 하느님 아버지

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사람을 미워하겠는가?(1957)

 

▶오늘의 급선무는 지금 씨알들의 제일 아픈 곳을 분명하게 말하는 데

있다. 지금 아픈 곳을 말해야 하는 이는 종교인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

분이 밥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아픈 것을 바로 말할 수 없다. (1960)

 

▶친근(親近)한 이를 공경히 대접해야 한다. 자기 자식이라도 공경해

야 한다. 함부로 이 자식이라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공경이란 조심

이요 어려워함이다. 사람은 맨 먼저 다른사람의 인격을 존중하지 않으

면 안 된다. 친근한 이를 공경하지 않으면 인(仁)도 의(義)도 없어진

다. 멀리 있는 이도 애중히 해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을 찾는 근본이

다. 신분이 미천하다고 또 외국인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그리고서

제 부모에게만 효도하고 제 형제한테만 우애해도 소용없다. 크게 앉아

보면 원근 친소가 없다. 그렇다고 제 부모 형제를 버린다고 하면 안 된

다. 그러니 공자와 노자의 말도, 맹자와 묵자의 말도 다 옳은 것이다.

반대되는 게 있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 알아듣는 사람이 잘 알아들

어야 한다. 먼 곳 사람을 더 후하게 대해야 한다. 먼 곳 사람은 먼 만

큼 드물게 만나기 때문이다. (1960)

 

▶아침 저녁으로 반성할 것은 내가 남을 이용하려는가? 내가 남을 섬

기려는가 이다. 내가 집사람을 더 부리려 하는가? 아니면 더 도우려

하는가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몸이거나 집이거나 나라거나 남을 이용

하려는 것은 잘못이다. 무조건하고 봉사하자는 것이 예수의 정신이

다. (1960)

 

▶성인(聖人)은 그의 속나가 하느님의 얼이라 얼나로는 하느님과 하나

이다. '내가 이만하면 제법 크지'라고 말하는 이는 다 같잖은 이들이

다. 이 조그마한 사람에게도 신령(얼나)한 게 있는데 이 우주에는 더

큰 신령한 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유교의 하느님 사상이다. 사

랑(仁)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다. 성경에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하느님께서 무슨 꼴(형상)이 있을 리 없다. 그 꼴

(image)이란 사랑(仁)인 것이다.

   사람이란 하느님을 찾아 마침내 제 맘속에 있는 얼나를 밝히는 것이

다. 성경에 예수가 구하라, 찾아라 두드리라는 게 하느님께서 보내 주

신 얼나를 찾으라는 것이다. 기도는 영원한 진리(얼나)를 추구하는 것

이다. 유교도 계시받을 것 다 받았다. (1960)

 

▶아무리 오래 같이 있어도 남의 영혼을 못 본다. 이것이 서러운 일이

다. 눈은 들창이고 코는 굴뚝이다. 남을 안다는 것은 결국 들창 보고,

굴뚝 보고서 그 사람을 알았다는 것이다. 들창이야 종이로 발랐건 유리

를 끼웠건 또 굴뚝이야 옹기로 했건 벽돌로 쌓았건 무슨 상관인가? 사

람을 알았다는 것은 결국 어느 집에 가서 들창과 굴뚝을 한 번 보고서

그 집을 알았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건 알았다고 할 수 없다.

   서로의 속알을 내놓는 것같이 좋은 일이 없다. 동지(同志), 지기(知

己)라는 게 서로 속알을 내놓는 것이다. 얼의 골짜기라고 얼굴인데 얼

굴 속의 얼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남의 얼을 못 보고 그저

가긴가?(1960)

 

▶죽은 사람 앞에서 통곡할 것은 이 사람도 아무도 못 만나고 갔구나.

나도 누구하나 못 만나고 갈 건가 하는 생각이다. 누가 남의 속을 아는

가? 가장 가깝다는 부부사이도 서로 모르고 산다. 알아주는 사람을 만

나도 못 만나고 그저 왔다 간단 말인가?남을 알아주려면 먼저 자기를

알아야 한다. 제 속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인 얼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얼나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로 간다는 것을

알면 남의 얼나도 알 수 있다. (1960)

 

▶벗은 서로 얼을 사귄 것이다. 옛날 사람을 자기의 벗으로 사귈 수도

있다. 그 사람의 전기를 보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그 사람에게 의논

을 한다. 그게 고인(故人)의 벗인데 맹자(孟子)는 상우(尙友)라고 했

다. 몸은 돌아가 안 계시지만 정신적으로는 사권다는 말이다. (1960)

 

▶손잡는 인사가 버릇이 되었는데 이게 걱정이다. 제 주먹을 제가 쥐

어야 한다. 합장을 하고서 인사를 하거나 제 주먹을 쥐고 인사를 해야

한다. 남의 손을 잡아 흔들면 제법 가까운 것 같고 친절한 것 같으나

이게 거짓이다. 불교식 합장 경례나, 유교식의 큰절도 마음에 없으면

능청스러운 거짓이 된다. 제 주먹을 꼭 쥐는 사람들이 모여야 일이 된

다. (1960)

 

▶얼이 얼려야 어른이다. 하느님과 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

리하여 그 마음에 하님의 성령이 충만한 어른이 돼야 한다. 하느님께

서 우리 마음에 하느님의 생명인 얼을 넣어준 것은 얼을 빠뜨리라고

넣어 준 게 아니다. 얼나가 임자된 어른 되라고 얼을 넣어 준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귄다는 게 낯바닥 익히는 데서 그친다. 깊이 얼을 알려

고 안 한다. 이게 기가 막힌다. 그저 얼굴이 훤히 생기면 그게 좋단다.

얼굴이 보살같이 생겼으면 그대로 믿어 버린다. 우리가 얼굴에 막혀서

이런 짓을 한다. 우리의 얼굴이 얼나의 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

다. (1960)

 

▶완전하게 남의 말을 들으면 남의 사정까지도 알아주는 들음이 된다.

알아주니까 본다는 거다. '그 하는 말 좀 봐'라는 우리말이 있다. 이게

관음(觀音)의 뜻이다. 관음보살 사상은 불교 초기부터 생긴 게 아니고

중간에 생겼다. 성모 마리아 사상도 사도시대부터 있은 게 아니고 중세

기부터 생겼다. 아무래도 어린이는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만만하다.

이 백성이란 어린애 같아 아무래도 하느님에게 맞설 수 없는 것같이

생각된다. 그래 성모에게 의지해서 달라고 하는 거다. 관음상도 보면

여성이다. (1961)

 

▶일본의 어느 시인은 말하기를 '내가 왜 여기(세상) 있나 하는 게 나

의 시(詩)다'라고 했다. 이렇게 하면 자기가 다시 발견된다. 자기가 자

기 이름을 부르는 이는 강한 사람이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여보게

왜 이러나'하고 잘못된 길로 가려는 자기 자신을 감시하며 경고하는

이는 강한 사람이다. 내가 왜 여기 있나 하고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

보면서 너희는 뭐냐고 하게 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나의 한배(同

胞)라는 생각이 든다. 이 세계는 어머니의 자궁이요 우리는 모태(母

胎)속의 쌍둥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동포의식이 분명해진다. 유교에서

통히 가르친다는 것은 인(仁)인데 이에는 사랑, 새로남, 성함(건강)등

의 뜻이 있다. 유교에서는 별 것을 다 말하는데 인(仁)하나 이루자는

것이다. (1960)

 

▶"한 사람이 하루 인(仁)을 하면 온 천하가 인(仁)으로 돌아간다(一

日 克己復禮 天下歸仁焉-논어 안연편)"고 공자(孔子)가 말했다.

공자는 과대(過大)한 말을 하지 않는 이인데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이

는 말 그대로다. 이게 신비다. 한 정자가 난자에 적중하는 것이 모든

정자의 소원성취가 된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얼굴빛을 보아 그 사람의 마음을 알려는데, 남의 속을 알려면 그 수

밖에 없지만, 그것 갖고는 안 된다. 그래서 서로가 어지간히 알아지는

것 같아 십 년 이십 년 동안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같아 그래서 믿었

더니, 그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고 할 일이 일어난다. 이런 게 인생이

다. (1960)

 

▶중상을 당해서도 '저 어린 아우들부터 구해주시오'라고 한 김치호

(金治浩: 4.19 의거 때 중상을 입고서 사망한 서울대 농대 학생)같이

하기는 참 어렵다. 하느님의 택함을 입지 않으면 그렇게 하기 어렵다.

죽음에 이르러 수술받기를 양보한 이 사람은 무엇인가? 이게 지성(至

誠)이다. (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