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머리를 하늘에 두고 사는 사람이 하느님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

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어깨에 지는 것이 옳다. 하느님을 머리에 이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나가는 일을 하지 않는

다. 그러나 남을 짓이기는 일은 살 일 난 듯 잘한다. 남을 짓이기려는

사람은 개인이나 나라나 다 망한다. 일제(日帝)도 망하고 조선(朝鮮)

도 망했다. (1956)

 

▶조상에게 제사 드리는 것이 효(孝)요 하느님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

이 경(敬)이다. 이는 모두 정성을 쏟아야 하는데 요새 말로 하면 정신

통일을 해야 한다. 마치 햇빛을 렌즈에 모으면 불이 붙듯이 우리의 정

성을 쏟아 정신을 통일하면 위로부터 계시를 받고 눈이 열린다.

   제사는 정성이 문제지 형식은 문제도 아니다. 그래서 공자는 형식적

인 제사는 보기도 싫다고 했다. 기독교의 예배도 마찬가지다. 진실이

담겨야지 형식적인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옛날 사람이 정신을 통일하

기 위하여 목욕재계한 것처럼 요새 예배를 보는 사람도 준비에 준비를

하여 정성을 쏟고 정신을 통일해야 한다.

   이상(理想)을 실현한 사람만이 위대한 인물이다. 제사는 결국 위대

한 인물이 되는 길이다. 제사는 잠깐 절하는 것이 제사가 아니다. 평생

동안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이 제사다. 사람되는 것이 저

사다. 제례는 사람되는 것의 상징일 뿐이다. 내가 사람되면 모든 사람

들이 좇아 사람이 된다. 그것이 제정일치(祭政一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의 참뜻을 알면 백성 다스리기가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쉬

워진다는 것이다.

   조상의 제사를 우상숭배와 같은 것이라 하여 부모의 죽은 날짜까지

잊어버려야 한다고 선전하는 목사가 있다. 세상에 이런 말이 어디 있겠

는가? 그런가 하면 한편에서는 추도회 때 제상에 차릴 것 다 차려 놓

고 절만 안 하면 된다고 설치는 교인도 있다. 제사는 생전에 계시듯이

정성을 다하여 정을 나타내면 된다. 살았을 때는 약 한 첩, 과일 한 톨

대접하지 않은 주제에 논밭 팔아 제사 지낸다고 법석이다. 3년상을 치

르는 동안 온 집안이 말이 아니게 된다. 제사 때문에 예수 믿는다는 사

람이 생겼다. 교회가 이것 하나 구해 주었다. 나는 초상집에 갈 때는

금식(禁食)을 하고 간다. 돌아간 분을 추도하기 위하여 금식을 한다.

대접하고 대접받고 하는 이게 무슨 추도인가?(1956)

 

▶옛날 중국의 천자(天子)가 제사 지낼 때에는 우리나라에 사직공원과

같은 교사(郊社)에 가서 천제(天祭)를 지냈다. 그것은 제왕만이 드릴

수 있었다. 천자(天子)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기 떼문이다. 지

금 기독교에서는 누구나 기도할 수 있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

느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만 자유를 누릴

수 있고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자유가 없다. 동양의 전제시대에는 자

유라고는 오직 제왕만이 가지고 있었다. (1956)

 

▶우리는 자연 자체의 변화를 알아야 한다. 이것을 지화(知化)라 한

다. 정신은 궁신과 지화를 요구한다. 정신이 궁신지화(窮神知化)하면

만물의 변화와 만사의 변천을 알게 되어 제나(自我)의 수성(獸性)에서

놓여 나게 된다. 그러면 음란에서 쾌락을 누려 보자든가, 큰 데 매여

돈을 모아 보자는 등의 욕심은 부리지 않게 된다. 궁신지화를 모르면

자유와 평등을 말하면서도 실은 그것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궁신지

화하려는 정신의 움직임, 그것이 곧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로 곧

참(誠)이다. 매임(拘束)에서 떠나 자유가 되고 모음(蓄財)에서 떠나

평등이 된다. 자유는 궁신에서 오고 평등은 지화에서 온다. (1956)

 

[주] 궁신지화(窮神知化) 우로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성령의 권위로 제나(自我) 욕망

    을 다스려 절제함. 곧 기도하는 신앙이다. 주역 계사전 하편 5장에 나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극치는 하루에 한 끼씩 먹는 일이다. 그것은

정신이 육체를 먹는 일이며 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일이기 때문

이다. (1956)

 

▶제사 제(祭)자는 고기를 손으로 받들어 무엇인지 가리키고 싶은 것

을 보인다는 뜻 모음(會意) 글자이다. 고기를 들고 있는 것이 있을 유

(有)자가 되었다. 몸뚱이를 든다는 말이다. 몸통이를 들고 있는 것이

있음(有)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몸뚱이를 바쳐서 위에서 무엇인가

를 보이는 것을 기다리는 우리들이다. 제 몸뚱이 하나를 가지고 살아가

는 것이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제(祭)를 지낼 때는 목욕재계라 하여 몸을 깨끗이 해서 제사를 지낸

다. 칠재삼명(七齋三明)이라 하여 7일 동안 씻을 것 씻고 3일 동안은

맘을 밝게 하고자 조용히 지낸다. 이리하여 제(祭)를 지낸다. 제(祭)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궁극적으로 성명(誠明)하자는

것으로 하느님을 알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에 제(祭)를 지내는데

정성이 지극하고 밝은 이는 천하를 다스리는 데 무슨 어려운 일이 있

을 리 없다는 것이다. 천하를 처리하는 데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것 같

다는 것이다. (1956)

 

▶제(帝)자는 위를 가리키는 고(高)의 머리와 묶을 속(束)을 붙여서

된 글자다. 하나에다 묶어 놓는다는 뜻이다. 라틴어 종교(religio)라는

뜻과 같다. 종교란 하느님과 나가 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우(하느님)에

서 내려온 얼이 있어 그 얼이 우리를 다스리고 있다. 우리는 무엇인지

모르는 시초의 자리를 향하여 추원(追遠)하고 있는 것이다. 임금 제

(帝)자는 알 수 없는 시조신(始祖神)을 찾는 그 일을 하는 것이

다. (1956)

 

▶본래 백성은 자기 조상만을 제사 지내고 천자(天子)인 대제사장이

온 천하를 대표해서 자기도 알 수 없는 조상(上) 이상의 것에 대하

여 체( )를 올렸다. 이것이 즉 절대 하느님에게 들어가는 길이다. 이

체( )의 이치를 알면 천하를 다스리는 데 막힐 것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은 개개인이 하느님 앞에 나와서 체를 받쳐야 한다. 모든 사람이

이 체를 알고 나간다면 이 세상은 조금 더 바르게 되고 정신이 나아갈

것이다. 자기가 나아가 보본(報本)하는 것이다. 이 사람의 가온찍기

( )는 체제( 祭)를 말하는 것이다. (1956)

 

▶마음에 없는  제사는 음사(淫祀)라 했다. 또 복을 바라서 지내는 제

도 음사라 했다. 무엇을 바라고 하는 제(祭)는 미( )라 했다. 제사를

잘 하면 복이 많이 오고 집안이 평안해 진다는 것은 전부가 아첨( )

이다. 이것을 유교에서 말한 것이다. 예수교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

다. 예수는 하느님께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라고 했다. 무당도 왼

전한 무당이면 모른다. 선무당들이 들끓으면 백성이 못살게 된다. (1956)

 

▶우리는 가는 길을 추원(追遠)한다. 추원이란 제사 지내는 것으로 먼

데를 좇아가는 것이다. 요즘 추도회라는 것이 있다. 좇아가서 자꾸 새

로운 생각을 하여 보는 것이다. 100주년 기념추도회라는 것이 있는데

100년이 지나도 슬프단 말인지 모르겠다. 가신 것이 슬픈 것이 아니라

자기 서러움을 알아야 한다. 자기 서러움이란 자기가 세상 떠날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은 영원이 사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멀

지 않아 떠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으로 추모(追慕)나 추원(追遠)

을 아는 사람은 자기 갈 길 자꾸 쫓아가서 그 길을 끝까지 밟자는 사

람이 다. (1956)

 

▶공자(孔子)는 말하기를 제(祭)를 지낼 때는 받을 분이 꼭 있는 것처

럼 하라고 했다. 나는 아버님 기일(忌日)을 맞아 그날 밖으로 나가 어

려운 사람을 도와 주기로 했다. 이러한 일을 할 때도 공자의 말 그대로

돌아가신 분이 계신 것같이 한다. 제여재(祭如在) 그것이다. (19if)

 

▶동양에서는 공자(孔子) 증자(曾子)가 산 희생을 갖다가 제사를 지낸

다 해서 피를 먹는 일이(血食) 있었다. 공자가 혈식을 했다고 공자가

마신 피니 나도 어디서 얻어먹어야 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선다. 이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1956)

 

▶나더러 크리스천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한다. 기도하는

것이 크리스천이다. 기도라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하면 배돈(陪

敦)하게 한다. 배(陪)는 재판을 조심스럽게 하기 위해서 판결에 입회하

고 의견을 말하는 배심원의 배(陪)를 말하는 것이다. 정중과 조심의 뜻

이 포함되어 있다. 돈(敦)은 후하다는 뜻이다. 기도는 조심조심 후하게

정중히 두툼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정신적인 호흡 바꾸어 말하면 성령의 호흡인 원기식

(元氣息)을 두텁게 조심하여 깊이 숨쉬는 것이다. 나는 찬송할 줄 모

른다. 그러나 찬미는 표한다. 찬미는 좋은 것을 좋다고 하는 것이다.

맥박이 뚝딱뚝딱 건강하게 뛰는 소리가 참 찬송이다. 다른 것은 부러워

하지 않는다. (1956)

 

▶세례라고 해서 물 한 방울 어디에다 뿌려 주는 것이 세례가 아니다.

날마다 낮 씻고 몸 벗는 것이 세례다. 우리는 몸의 먼지를 떼어 버리는

데 열심히 해야 한다. 이 세상을 지나가는데 자꾸 먼지가 우리에게 날

라 온다. 그러므로 자꾸 씻는 일을 해야 한다. (1957)

 

▶단식하는 것도 부모에게서 받은 몸 고생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내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보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나 간디의 피

와 살은 먹을 수 없으니까 제 몸을 고생시키면 제 살 제 피를 좀 얻어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이런 점을 인도에서는 알고 있었다. 아니

전 인류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다. 다른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1957)

 

▶사람에게는 악마가 될 소질이 충분히 있다. 하느님마저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사람은 왜 이렇게 생겼을까? 하느님의 뜻을 좇아 바르게

되는 것을 보고자 해서라고 할 수 있다. 이 고동(鼓動)이 우리를 하늘

로 올려 보낸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려는 이 고동이 우리를 붓다로 만들

고 이 고동이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한다. 이 고동을 잘못 쓰면 우리를

나쁘게 하지만 이 고동이 우리를 사람 노릇 하게 한다. 그리하여 이 세

상에서는 곧이(貞)가 불가능하지만 욕능(欲能)하려고 한다. 이것이 성

인(聖人)들의 고동이었다. 또한 이것이 우리의 고동이다. 하느님을 향

한 올바른 고동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최후의 승리를 가져

다 준다. (1957)

 

▶예수교 신앙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겠다는 입지(立志)가 들어 있다.

불교에서는 성불(成佛)하겠다는 의지가 있다. 신앙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러한 길이 있으면 꽉 붙잡고 끝까지 가 보아

야 한다. 적어도 영원한 생명을 얻겠다는 바람을 잊어서는 안 된다.이

것을 다른 사람이 업신여겨도 나는 해야 한다. 내가 하는 것이지 딴 사

람이 내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만 얻도록 그 생각만 하라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

을 한 번 붙잡으면, 죽으면 죽었지 놓지 않겠다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

이다.

   성불(成佛)하기를 바라면 그 길을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이것이 진

리파지 (眞理把持)다. 성불하는 이치가 있으면 그것을 기어코 깨닫겠다

는 염원(念願)이 염불(念佛)이다. 염불한다는 것은 붓다의 이름만 부

르는 것이 아니다. 만일 깨닫는 이치가 있으면 꼭 붙잡고 그 자리에까

지 가는 것이 염불이며 신앙이다. (1957)

 

▶지혜의 광명(光明)이란 정신적인 직관력(直觀力)을 말한다. 만물을

직관하여 볼 수 있는 힘이다. 정신의 광명으로 만물을 비춰보는 세계가

지혜의 세계이다. 마치 등잔불을 계속 태워 만물을 비추듯이 거룩한 뜻

을 태워 지혜의 광명으로 세상 만물을 비추게 된다. (1957)

 

▶기도의 생활을 하는 것을 수행(修行)이라고 하는데, 유교(儒敎)에서

는 기도를 수신이라고 한다. 입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한

다. 그러면 마침내 머지않아서 하느님께 다시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도록 참나를 길러 가는 것이다. 여기

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1957)

 

▶원래 기도라는 것은 이러해야 한다. 무슨 감동을 주기 위하여 고개

를 숙이게 하고 강연식으로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다. 판에 박은

듯한 기도와 예수가 한 결별의 기도를 자세히 비교해야 한다. 우리는

공연한 거짓되고 허식된 기도는 하지 말아야 한다. 기도할 때에 이 세

상이 너무나 괴로우니 빨리 데려가 달라고 하는 기도는 더욱 안 된다.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 달라고 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

하루 자기 사명을 다 해야 한다. (1957)

 

▶이 백성이 주검을 위해서는 돈을 많이 쓰나 삶을 위해서는 쓰려고

않는다. 살아 계시는 부모님에게는 인색하다가 죽고 나면 빚을 잔뜩 지

면서 초상 치르는 데는 돈을 많이 쓴다. 그리하여 초상 치르느라 부모

가 물러준 논밭이 날아간다. 그래야 효자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

대로 그 논밭을 지켜나가는 것이 효자다. 기독교 신자는 한 70년 동안

제사를 안 지냈으므로 복을 받았다. 관혼상제를 지나치게 잘 지내는 것

은 참 통곡할 일이다. 기독교가 제사를 금한 것은 참으로 감사해야 할

일이다. 사람이 죽은 데 촛불을 켜 놓고 절하고 울고 하는 그게 뭔가?

더욱이나 성당.예배당에 촛불을 켜 놓고 있으니 그게 무슨 짓인

가?(1960)

 

▶"먼 길을 언제 다 갈 건가'라고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자꾸자꾸 계속

해서 가면 가게 된다. 가고 나면 그저 온 것 같다. 성불(成佛)도 마찬

가지다. 자꾸자꾸 참선을 하면 언젠지 모르게 번뇌를 벗어나 참이신 니

르바나(Nirvana)님에게 닿는다. 기독교도 마찬가지다. 내 속이 밝아지

는 것이 그가 오시는 이 (얼나)다. (1960)

 

▶사람은 사랑의 대상을 늘 찾는다. 마음의 기량(器量)이 큰 사람은

영원절대에 가서야 진.선.미(眞善美)가 있다고 한다. 기량이 작은

사람은 이 땅의 작은 걸로 만족해 버린다. 그러나 기량이 커감에 따라

자꾸 높은 것으로 바뀐다. 기량이 아주 크면 사랑의 대상을 영원 절대

(하느님)에 둔다. (1960)

 

▶기도 참선은 하느님께 뭐 좀 해달라고 조르는 것이다. 해와 달의

틈바구니에서 철이 없어서 우리가자꾸 좀 해달라고 조른다. 뭘 조르나

하면 좀 쉬게 해달라고 조른다. 안식(安息).안심(安心)을 달라는 것

이다. 그런데 아주 영 쉬라면 싫단다. 70년을 살면 2만5천 밤을 쉬는

걸 복습하게 된다. 제일 가는 안식은 영 쉬는 것임을 가르쳐 주었는데

도 모른다. 여기에 있는 분들도 20년이나 40년 뒤에는 이 말이 소용될

것이다. 40년이 그리 긴 게 아니다. (1960)

 

▶나는 위에서 은혜가 쏟아지는 믿음을 갖지 않는다. 여기서 이렇게

한 이상 더 은혜를 바라지 않는다. 이 정도라도 할 수 있는 게 위에서

오는 게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이걸 생각하면 무한한 감사를 드린

다. 너희가 필요한 건 이 세상에 다 있다고 예수가 말했다. (1960)

 

▶기도하면서 살겠다는 게 종교다. 암만해도 안 될 것 같은 걸 기를

쓰고 기도하라고 기독교에서 말한다. 두드려라, 찾으라는 것은 떼라도

쓰면서 자꾸 조르면 주신다는 말이다. 종교를 잘 믿으려면 기도를 잘해

야 한다. 그런데 나는 기도하라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하느님에게

는 영원한 생명 (얼나)만 구해야 한다.

   인도 사상에서는 열성이 깊고 지극하면 모든 게 다 이루어진다고 한

다. 열성과 기도가 부족해서 안 되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얻기 전에

는 기도하는 열성을 그치지 않는 게 훌륭한 산 종교다. 기도가 곧 종교

인 것이다. 유교에서는 제사를 정성껏 지내야 한다고 한다. (1960)

 

▶형이상(形而上)은 신비다. 결코 이 땅에서 기적을 찾지 말아야 한

다. 형이상의 세계는 절대존재(絶對存在)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

람이 맘으로 골똘하면 무엇이 귀에 들리든지 눈에 나타난다. 그게 내

맘속에서 된 일인지 또 객관적으로 환청(幻聽)이나 환상(幻想)이 있었

는지 어떻게 아는가?주관적으로 됐다고 단언할 수도 객관적으로 있었

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1960)

 

▶幻기도(祈禱)를 새남이라고 한다. 옛 미신시대에 사자(死者)를 위한

무당굿 송경(誦經)을 새남이라고 했다. 길을 가리켜 돌아가게 함이란

뜻도 있다. 사자(死者)의 영흔혼을 돌아가게 하고자 송경(誦經)을 한다.

『死者의 書』가 죽은 이를 위해 읽는 경전이다. 저 세상으로 돌아갈 길

을 일러준다(指路歸)는 것이다. 우리들이 하는 기도 참선 등은 자기

의 길을 스스로 하는 분명한 새남이다. 자기가 스스로를 잘 보내야 한

다. (1960)

 

▶절대로 큰 것(하느님)은 우리는 못 본다. 아주 더 할 수 없이 온전한

큰 것을 무(無)라고 한다. 나는 없는 것을 믿는다. 없는 것은 모르니까

믿는다. 있는 것은 아니까 안 믿는다. 기도할 때 하느님이 여기 오시는

게 아니다. 우리가 그 품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안 들어가지면 들어가

려 힘써야 한다. 갈 때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잊고 가야 한다. (1960)

 

▶기도는 혼자서 해야 한다. 제 기도는 제가 해야 한다. 여럿이 모여

할 때는 암만해도 하는 척하게 된다. 거짓으로 하는 기도는 미워해야

한다. (1960)

 

▶여기서는 겨를을 찾지 말고 얼나라의 겨를에 가기를 힘써야 한다.

거기는 영원한 안식의 겨를이 있다. 이렇게 넉넉한 겨를에 갈 것을 생

각하면 이 작은 데서 서로 잘났다고 다투고, 힘든 일 않겠다고 다투지

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도 긴 겨를(安息)이 심심해서 여

기 온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것을 한 번 생각하면 참선이요 명상이 된

다. (1960)

 

[주] 겨를: 여가 또는 안식을 뜻한다. 겨울(冬)도 겨를과 통한다

 

▶자기가 자기에게 맞는 말씀을 외워야 한다. 처음에는 물론 모방이지

만 좀 지나서는 자기에게 긴한 말씀을 외워야 한다. 요새는 내가 시간

이 점점 늘려 가는 게 있는데 기도문 외우는 것과 맨손 실내운동을 하

는 데 1시간 반이 걸린다. 내가 좋아서 매일 외워도 자꾸 새로운 맛이

난다. 하나도 힘없는 글이 없다. 그 속에 생명의 성령이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꾸 외움은 그 속에서 성령을 받기 위해서다. (1961)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주기도)라고

하는 기도는 정말로 여기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이 땅에 들러붙지 말라고 한 기도다.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