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그리스도

 

●나는 예수 석가를 좋아하고 톨스토이·간디를 좋아한다. 그런데 예

수를 좋아하다 보니 예수의 이름에서 이러한 생각을 얻었다. 예수의

 '예'는 여이가 합하여 예가 되었다. 예(玆)는 곧 여기다. '수'는 재주

의 능력이다. 할 수 있느냐의 수가 바로 능력이나 재주를 말한다. 여기

의 이 재주와 능력이 예수다. 나의 매 손가락에 위로부터 내려오는 재

주와 능력이 있다. 위로부터 한량없이 내리는 수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이어진다 하느님께서 손수 내리는 그 힘이 지금도 자꾸자꾸 내린다.

한없는 능력이 이 손끝에 내리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람의 손은 하

느님이 잡고 쓰시는 붓(筆)이다. 이어이어 내려진 그 능력이 예수와 나

를 이어지게 한지도 모른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절대자에게 이어져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모양은 같다고 생각된다. (1956)

 

●흔히 사람들은 정신을 어디에 매어 놓으면 일이 잘될 것같이 생각한

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정신을 붙들어 매어놓고 싶어 하

지만 정신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마음은 자유로운데 그 본질이 있다.

그 대상이 비록 예수 그리스도라 해도 거기에 매여 사는 것은 그 대상

은 우상이 되고 내 정신은 내려가게 된다. 내 정신은 하느님 한 분을

우러를 수 있도록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매여서는 안 된다. 매어놓지 말

아야 할 것을 매놓고 모으는 것이 아닌데도 모으려고 하는 것이 우상

이다. 어디에다 묶어 놓을 수 있는 게 정신이 아니다. (1956)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은 섬김에 있다. 사람이 지닌 본연의 모습은

우리의 임자요 전체이신 하느님을 섬김에 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

가운데 참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사람을 사랑함에 가장 으뜸가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닐까?하느님과 인류를 섬김에 있어서 자기의 생명

을 바친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느님의 아들 자리에서 하느님을 아

버지로 섬겨 영광되게 하고 온 인류로 하여금 하느님 아들인 얼나라는

영원한 생명으로 살도록 본을 보인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에 하느

님 아버지를 섬기기에 맘과 뜻과 힘을 다한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기리고 찬미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 아닐까?(1956)

 

●내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스승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평생 심장

에 칼날을 받아들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도 모른다. 알아준다는 뜻

의 인(認)자는 말씀 언(言) 변에 칼날 인(刃)과 맘 심(心)으로 되어

있다. 심장에 칼날을 받아들이는 아픔이 있고서야 예수 그리스도를 알

게 되는지 모르겠다. 진주조개가 진주씨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것이

다. (1956)

 

●하느님을 아는 것은 저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에 관한

모든 자연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와 에머슨이 말하는 자연

은 하느님이시다. 사람은 하느님이라는 자연 전체의 일부분이다. 전체

자연인 하느님을 알아야 전체의 부분으로 한 군데에 있는 사람의 자리

를 정 (定)할 수 있다. 전체인 하느님과 부분인 사람의 관계를 밝혀주는

것이 종교이다. (1957)

 

●현대사상, 고대사상, 동양사상, 서양사상이라면서 무슨 구분을 둘 필

요가 없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이전을 율법시대라 이후를 은혜시대라

고 하는 이도 있지만 나는 이러한 구분도 필요 없다고 한다. 모세 오경

에도 지금 세상에서 쓰이는 모든 복음이 거의 다 있다고 본다. 나타내

야 할 것은 이미 다 나타냈다고 할 수 었다. 예수라는 분이 온 것은 이

세상에 무엇을 보이려 온 분이 아니다. 참나의 완성을 위해서 계속해서

나온 것이다. 지금도 참나를 완성하려고 그 뜻을 받아 이어오고 있다.

참나인 그리스도를 완성해 나가야 한다. 참나 하나를 완성해야 한다.

그러나 으뜸 하나(元一), 임 하나(主一)는 이렇게 발전이고 완성이고

없다. 으뜸 하나는 벌써 완성된 것이다. 온전한 하나(하느님)를 이 상

대세계에 나타내는 것이다. (1956)

 

●예수를 나는 잘 모른다. 예수는 목수인 아버지 요셉을 도와 목수일

을 하다가 집을 나가 세례 요한이 수도하는 곳에 가서 수도를 한 것

같다. 고향에 돌아와서 스스로 깨달은 것을 베드로를 비롯한 고향 사람

들에게 전하기 시작하여 점점 넓혀 예루살램에까지 나가게 되었다. 한

3년 동안 가르침을 주었는데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받아서 나중에 극

형을 당하고 말았다.

   예수는 이 세상 사람에게 주는 것을 가르쳤다. 이 세상은 주고 가자

는 세상이다. 지금이라도 줄 수가 있어야 된다. 떳떳치 못하게 무엇을

 바라고 살 바에는 차라리 이 세상에 안 나는 것이 좋다. 우주의 아버지

 (하느님)는 우리에게 무엇을 나누어 주라는 것이다. 이 제상에 산다는

 것은 주는 재미로 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왕에 주려면 예수처럼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비록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이제는 주려고 산다. 나는 세상에 대하여 나에게 주기를 바라지 않는

 다. (1956)

●우리가 예수의 지내온 것을 생각해보면 하느님의 아들 노릇을 했다

고 생각된다. 하느님아들 노릇을 하는데 아주 몸까지 희생했다. 예수가

처음으로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

는 것은 예수의 희생인 그의 살이요 피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날

마다 무엇을 먹든지 무엇을 마시든지 이 생각이 나와야 한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욕심으로 먹고 마시기를 버려야 한다. 이처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며 희생당할 때 그 제사야말로 우리가 먹고

마시는 양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알고 먹는 것이 성찬이다.

날마다 먹는 음식을 성찬으로 먹어야지 식욕으로 먹어서는 안 된다. 이

것이 상의극치일정식(嘗義極致日正食)이다. 이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

에 이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은 다 잊어도 좋은데 이 한마디만큼은 기

억해 주기를 바란다. 식사마다 보본추원(報本追遠)의 정신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면 과식하여 체증(滯症)으로 고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

다. (1956)

 

●예수를 좀 알겠다고 하고 믿는다고도 한다. 죽고 사는 것이 무엇인

지도 모르면서 상대적으로 남에게 빠지지 않고 사는 것이 은혜이고 믿

는 것인 줄 알고 있으니 답답하기 짝이없다. 사람들이 너무나 헤프게

예수를 알려 하고 또 헤프게 예수를 가르치고 있다. (1956)

 

●어떤 이가 나더러 '예수를 믿으십니까? 선생님은 기도도 안 하시고

찬송도 안 하시지요? 교회에도 안 가시잖아요? 라고 묻는다. 내 기도

는 이렇게 하고 찬송은 이렇게 한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알고

도 알지 못한 체, 알지 못하고도 아는 체(知不知 不知知)가 너무나 많

다. 세상은 알 것 같지만 모르는 것이고 모르니까 아는 척해야 되는 것

같다. (1956)

 

[주] 知不知 不知知: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이 으뜸이요, 알지 못하고도

     아는 체하는 것이 병이다. (知不知上 不知知病『노자』 71장)

 

●나 류영모가 예수를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를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

고 공자를 말하는 것은 공자를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나

공자처럼, 톨스토이나 마하트마 간디같이 하느님이 주시는 성령의 국

물을 먹고사는 것이 좋다고 해서 비슷하게 그 짓을 하려고 말한 것뿐

이다. 그들처럼 하느님이 주시는 성령의 국물을 먹지 않겠다면 예수

석가, 공자. 간디를 추앙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1957)

 

●예수의 실패는 정의(正義) 쪽의 실패다. 나도 정의 쪽에 실패자인

크리스천이 되려고 하는 것은 마지막 정의(하느님)를 믿기에 정의 구

현이 불가능한 세상에 정의가 있도록 하려는데 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정의를 실현하려 한 지 2천 년이 되었다. 아직도 정의는 설현되지 못

했지만 그러나 낙심하지 않고 그 길을 가는 것이 우리들의 일이다. 이

것이 이른바 신앙이라는 것이다. (1957)

 

●YMCA 연경반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이 적힌 성경을 연구해야 할 것

이지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다 내가 본 성경이기 때문

이다. 나는 내가 본 성경으로 먹고사는데 남보다 더 잘 먹었는지 못 먹

었는지는 모르나 나는 나만큼 먹은 내 맘 가지고 살아간다. 이 점을 여

러분에게 일러두고 싶다.

   내가 성경만 먹고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유교 경전도 불교 경전도

먹는다. 살림이 구차하니까 제대로 먹지 못해서 여기저기에서 빌어먹

 고 있다. 그래서 희랍의 철학이나 인도의 사상이나 다 먹고 다니는데

그렇게 했다고 해서 내 맷감량(飽和量)으로 소화가 안 되는 것도 아니

어서 내 건강이 상한 적은 거의 없다. 여러분이 내 말을 감당할는지는

모르나 참고삼아 말하는데 기독교의 성경을 보나 희랍의 철학을 보나

내가 하는 말이 거기에 벗어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 말의 옳

고 그름의 판단은 하느님께서 해주실 것이다. 내가 이 자리에서 이 말

을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57)

 

●예수가 오기를 기다리고 미륵불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만은 못하더

라도 큰 인물이라도 나오기를 바란다. 지난날의 그 누구만 살아 있었으

면 좋겠다고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으로 불행한 인생처럼 보인다.

전 인류가 이 불행을 지니고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불행한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이 불행에 권력 금력을 가지고 더 한층 불행

의 원인을 만든다면 사람들은 불행의 맨 밑바닥인 지옥이라는 것을 맛

보고 가는 것밖에 안 된다.

   사람들은 몇 천 년 동안 무슨 능력이나 권력을 얻겠다는 것이고 전

보다 더 깨닫겠다는 그 소리가 오늘날까지 내려온다. 이렇게 하면서 이

어져 온 것이 인류역사다. 생평(生平)의 옳은 이치와 그른 이치를 연

결해 보여주는 것이 인류역사라고 할 수 있다. 얻을 것 얻자고 하여 얻

을 지경에 갔다면 문안(文安)이라고 한다. 안식(安息)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1957)

 

●이 사람에게도 뜻 가운데 인물이 있다. 내가 잘못할 때 나에게 잘하

라고 책선(責善)하는 벗이 의중지인(意中之人)이다. 날더러는 책선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도 있지만 내게 책선을 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

도이다. 내가 참으로 마지막까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는 예수 그리

스도이다. 훌륭한 스승님을 기리는 택덕사(擇德師)에도 마찬가지다

내게 선생이라고는 예수 한 분밖에 없다. 예수를 선생으로 아는 것과

믿는다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선생님이라고는 예수 한 분밖에 모

시지 않는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이 있다. 묵은 것을 생각

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온고지신의 사제지간(師弟

之間)이다. 사제(師弟)의 관계는 이러해야 한다. 묵은 것에 익숙해야

새 힘이 나온다. 스승의 말을 녹음해 놓은 것을 듣기만 한다는 것이 아

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배워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것이 참된 사제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새로 인도(仁道)가 서게 된다. (1957)

 

●매미는 유충시대만 17년 동안이나 땅속에 살다가 성충(成蟲)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죽어 없어져 버린다. 우리도 나라는 존재로 나오기에

앞서 이런 유충시대와 같은 잠복의 기간이 있었다면 유충이 성충의 되

어야 하는 사명(使命)이 있을 것이다. 잠깐 있는 이 세상 한 때를 영원

하다고 생각할 수 없다. 절세숙명(絶世宿命)이란 것이 참으로 이상하

지 않은가? 우리는 짐승인 몸나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하느님 아들인

얼나로 거듭나 저 세상에 계시는 하느님께로 올라가자는 뜻이다. 영원

한 생명에 이르지 못하여 뒤떨어져 버림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뜻

을 알면 옆 사람에게도 알게 해서 구해야 할 임무가 있다. 이것이 예수

의 이러한 가르침을 좇겠다는 크리스천의 사명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

날의 전도는 새시대의 무당 노릇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기가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 말하지 못하게 섭섭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57)

 

●먹어야 산다는 것은 육체요 안 먹어야 산다는 것은 정신이다. 나는

지금 한 주일 동안 때 끼니를 잊어먹고 살아았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

스도를 믿는다면서도 바라는 것은 식색(食色)의 풍부함뿐이다. 그것은

마귀의 생각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

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요한 8:12) 예수는 얼나가 세상의 빛이라 얼

나를 깨달아 세상의 빛이 되라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적극적인 말씀이

다. 속죄를 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얼나의 빛이 되라는 것이다. 속죄는

너무나 소극적이다. 하느님이 보낸 성령으로 거듭난 얼나는 영원한 생

명이라 죄악의 멸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얼나로 거듭나는 것이야

말로 몸나의 속죄가 된다. 몸은 죽고 얼로 사는 것이 영생이다.

"너희는 사람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만 나는 결코 아무도 판단

하지 않는다. "(요한 8:15) 세상은 하느님의 아들인 얼나의 그리스도까

지 육체의 신분으로 판단하려고 한다. 사는 것은 얼이니 몸은 쓸데없다

(요한 6:63)고 했는데도 그리스도까지 육체로 판단하려고 한다. 그리

하여 예수를 무시했다. 몸나의 생애가 문제가 아니라 얼나의 말씀이 문

제다. 예수의 말씀이 듣는 이의 얼나를 깨운다. (1957)

 

●요한복음 12장(12절~15절)에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이 나온다. 예수

도 몇 날 안 있어 자신이 죽는 것을 알았고 또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

다. 그런데 입성의 행사를 가진 것은 잠깐이라도 참사람이 세상을 다스

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인지 모른다. 또는 사람의 죽음이 하느님께

로 들어가는 것임을 상징한 것인지도 모른다. 예수가 하나의 상징이라

고도 볼 수 있다. 일체가 어떤 의미를 들어내는 하나의 상징이다. 나도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이다. (1957)

 

●예수의 몸은 다른 사람과 똑같은 혈육(血肉)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맘은 목마르지 않으나 몸은 목마르다. 몸은 목마르고 아프지만 이 몸이

어떤 의미를 드러내는 상징이라면 입성(入城)도 하고 십자가도 지면서

천명(天命)을 따라야 할 것이다. 곡식을 위하여 거름이 있듯이 어떤

의미를 위하여 몸이 있다면 몸이 나타낼 상징은 빠뜨리지 말고 드러내

야 할 것이다. (1957)

 

●예수는 죽음을 앞에 놓고 나는 죽음을 위해서 왔다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러 왔다. 예수는 죽음을 영원한 생명(얼나)을 깨는 것으로

본 듯하다. 나무가 불이 되는 것이 죽음이다. 인자(얼나)가 영광을 받

을 때가 왔다. 진리정신을 드러낼 때가 왔다. 진리 정신은 죽음을 넘어

설 때 드러난다. 죽을 수 있는 것이 정신이다. 사람은 때와 터와 람(값

어치)을 알아야 한다. 사람은 죽을 때 죽어야 하고, 죽을 터에서 죽어

야 하고, 죽을 보람으로 죽어야 한다. 예수는 3가지를 다 계산해본 결

과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한 것이다. 새가 알맞은 때에 알을 까듯이 지

금이 죽을 적기라고 결정한 것이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다. 계

산은 끝났다. 이제 제나의 죽음을 넘어서 얼나가 드러난다. 얼나는 죽

는 것도 아니고 나는 것도 아니다. 참나인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내

가 믿는 것은 영원한 생명인 얼나이다.

 

[주]정신(精神) : 참나인 얼나를 그리는 생각 또는 얼나가 주재하는

    생각을 정신이라고 했다

 

●예수의 생명과 하느님의 생명은 얼생명으로 한 생명이다. 예수의 몸

나는 몸의 어버이가 낳았지만 예수의 얼생명은 광야에서 기도하는 동

안에 스스로 깨달았다. 깨달았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예수의 얼을 씨라고 하면 하느님의 얼은 나무에 비길 수 있다. 씨는 어

디서 왔느냐 하면 나무에서 왔다. 나무가 씨의 근원이다. 이처럼 예수

의 얼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 씨는 꼭트면 나무가 되듯이 예수의

얼은 하느님의 씨다. 예수도 나도 얼로는 모두 하느님의 씨다. 씨가 싹

터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형이상에는 하느님

이신 나무가 한그루가 있을 뿐이다. 예수의 얼나를 믿으니 내 얼나도

믿어야 한다. 얼나를 믿으니 하느님 아버지도 믿어야 한다. 얼생명으로

는 한 생명이다. 얼나를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와 나는 얼로는 같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씨다. 예수가 먼

저 익은 열매라면 나도 익어서 영근 열매가 되어야 한다. (1957)

 

●하느님 밖에 모든 것은 우리에게 우상(偶像)으로 비친다. 예수.석

가조차도 우리가 표상(表象)으로 보면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석

가도 자기의 몸을 보는 이는 붓다를 보지 못한다고 했고 예수는 자기

의 혈육(血肉 몸)을 먹으라고 했다. 몸의 오관(五官)으로 보이는 것

은 모두가 거짓이다. 영원무한한 얼로 없이 계시는 하느님만이 우상·

아닌 참나이다. (1957)

 

●예수를 유혹한 자가 예수를 데리고 높은데 올라가 밑에 있는 도성

(都城)을 내려다보이면서 모든 영광을 너에게 줄 것이니 내게 굴복하

라고 말했다. 상대세계인 이 세상을 인정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남에게 뒤떨어져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게 무리(無理)다. 도

둑놈이 세상에서 도둑질 안 하면 못산다는 것과 같다. (1957)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의 말씀줄을 온전히 이어 왔더라면 지금쯤은

세상에 이상(理想) 국가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이어오

지를 못하여 토막난 시대가 되고 말았다. 예수가 다시 온다느니 붓다가

나타난다느니 하지만 그런 분이 나타났다고 해서 사람들이 잘 살았다

는 것은 아니다. 영원한 생명줄을 올바르게 이어온 시대가 좋은 시대이

고 그 시대를 올바르게 지도한 이가 붓다가 되고 예수가 되었던 것이

다. 태초부터 이어오는 영원한 생명의 한 줄이 이어 닿는 여기가 '예'

다. '예'는 아들이 아버지가 되어 가는 자리이다. 또 영원에서 상대세

계로 떨어져서 몸부림치는 곳이 예이다. (1957)

 

●쉰 살은 세상 일을 쉬(休)고 얼숨을 쉬(息)는 나이다. 바꾸어 말하

면 공자(孔子)의 말처럼 천명(天命)을 알 때가 된 나이다. 인생살이란

잠깐 쉬고 떠나는 것임을 알면 다 이러고 저러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

을 것이다. 사람이 천명(天命)을 알 때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 예수는

이미 30대에 천명을 아는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 (1957)

 

●세상에 빠진 미혹에서 벗어나서 뚜렷하게 나서야 한다. 예수는 뚜렷

이 하느님을 모시고 태초부터 자기가 모신 아버지라고 불렀다. 나도 이

에 성령의 숨을 쉼으로 뚜렷이 하느님의 아들로 사람답게 살겠다는 말

씀 한마디만 하고 싶은 것이다. (1957)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바쳤다. 바쳤다

는 말은 밥이 되었다는 말이다. 밥이 되었다는 말은 밥을 지을 수 있는

쌀이 되었다는 것이다. 쌀이 되었다는 말은 다 익었다는 것이다. 성숙

하여 무르익은 열매가 된 것이다.

   인생은 무엇인가? 무르익는 것이다. 제물이 되고 밥이 되는 것이다.

밥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밥 먹을 자격이 있다. 온전하고 성숙한 사람

이 아니고는 밥 먹을 자격이 없다. 밥은 덜된 사람 먹으라고 지어진 것

이 아니라 참된 사람에게 공양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다. 밥이 되기까

지는 하늘과 땅과 하느님과 사람들의 손이 얼마나 많이 가고 또 간 것

일까'.낟알 한알 한알이 금싸라기 같이 익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정성

과 사랑이 들었을 것인가?

   사람이 사람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에 사람이 되려고 먹는 것이

지 사람이 안 되려면 먹을 필요가 없다. 사람이 된다는 말을 도(道)라

고 한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넉에 죽어도 좋다고 한다. 도를 들었단

말은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사람이 되면 언제나 죽을 수 있다. 알알

이 익기만 하면 언제나 떨어질 수 있다. 사람이 되기만 하면 언제나 십

자가에 달릴 수 있다. 사람이 되기만 하면 언제나 제물(祭物)이 될 수

있다. 인생의 목적은 하느님께 바치는 제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밥을 먹는 것은 자격이 있어서 먹는 것도 아니고 내 힘으로

먹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은혜와 수많은 사람의 공덕과 대자연의 공

로로 주어져 먹는 것이다. 내가 밥을 만든 것이 아니라 남이 밥을 지어

주어서 먹었다. 그것은 값을 따질 수 없는 무한한 사랑이 영글어 밥이

된 것이다. 우리가 밥을 돈 내고 사 먹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돈

은 밥이 지닌 가치의 몇 억분의 일도 안 된다. 사람들이 수고한 노동력

에 대한 대가의 일부를 치른 것일 뿐이다. 밥이 되기까지에는 태양의

빛과 바다의 물과 그 밖에 온갖 신비가 총 동원되어 밥이 지어진 것이

다. 그러니까 이것은 순전히 거저 받는 하느님의 선물인 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밥 먹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요 선물이지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은 아니다. (1957)

 

●예수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느님의 아들이니 모르는 것이 없

는 줄로 아는데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이스라엘이 회복할 때가 이때냐

고 물었을 때 예수가 하느님밖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예수는 절대

인 하느님의 권한을 믿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권능을 얻으면 얼나의 증인이 된다고

했다.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얼나로 거듭난 것을 증거하는 것이다. 하

느님께서 보내신 성령이 그리스도(얼나)요, 말씀(로고스)이요, 참나(다

르마)이다. 얼나를 증거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성령을 받아 얼나로 거듭

나 하느님과 하나인 영원한 생명으로 몸나의 수성(獸性)에서 자유하고

제나의 생사(生死)에서 자유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얼나는 영원한 생

명으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루가복

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처럼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1957)

 

●1647년 퀘이커를 시작한 조지 폭스의 말인데 참 좋아서 적어 놓았

다. "나는 사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곧 그들이 어둠에서

빛으로 마주 가게 할 일로 온 것이다. 예수가 가진 빛을 받는 사람에겐

하느님 아들의 힘을 주신다. 이 힘은 내가 그리스도(얼나)를 받음으로

얻는다. 인생에 가장 소중한 것은 빛과 힘을 얻는 것이다. "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을 힘이라고 하는데 히브리 어로 '엘리'라고 한

다. 또 야훼(여호와)는 계시(啓示)라는 말인데 빛이라는 뜻이다. 빛을

이 (理)라 하고 힘을 기 (氣)라고 한다. 성리학에 기발이승(氣發理乘)은

힘이 나고 빛이 밝다는 뜻이다. 사람의 몸은 힘이 있어야 하고 사람의

맘은 빛이 있어야 한다. 빛과 힘이 인생의 핵심이다. 정신의 빛과 영원

의 힘이 없으면 사람은 마음놓고 죽을 수 없다. (1957)

 

●예수가 '참'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말했으나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는 어떻다고 얘기하지 않았다. 묵시록에 나오는 것 같은 신비한 얘기는

도무지 한 일이 없다. 지금 사람들이 모세와 엘리아가 하느님 나라에서

어떻게 했다는 등 괜히 없는 소리를 곧잘 한다. 예수가 변모산에는 12

제자 모두를 데리고 가지 않고 3제자만 데리고 가서 말씀을 했다는데

다른 제자들을 안 데리고 간 이유를 모르겠다. 그때 거기서도 이 세상

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은 한마디도 안 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한 실내에 몇 천 명씩을 몰아넣어 놓고서는 별 말을 다 하

면서 무슨 병이 낫느니, 암시를 받았느니, 불을 보았느니, 바람을 맞았

느니 해서 조그만 경험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자랑을 하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자기가 세수한 물을 성수(聖水)라며 나눠 주고 있다고

한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적(異蹟)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상대계에 잠깐 보여 주는 게 있다. 이것은 과학으로 말할 수 없는 일인

데 자기 최면에 걸리면 바람이 차츰 커져서 큰 바람이 자기를 덮치러

오는 것 같고 또는 불이 번쩍하는 일이 있다. 이것은 진리가 아니므로

홀리지 말아야 한다. 무슨 신비 (神秘), 무슨 신학(神學) , 무슨 철학(哲

學)이라며 떠들지만 거기에 홀리면 안 된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툭툭

털고 오직 하느님만 바라고 나서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

는 것뿐이다. 내가 자리한 이곳은 태양의 발바닥 같은 곳이다. 여기 상

대계를 뚫고 절대의 나라로 세차게 올라가야 한다. (1957)

 

●오늘날의 세상을 보면 서로 높은 자리에 가려고 마구 다투면서 야단

들이다. 남에게 뒤지면 안 된다고 남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는데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르치기를 그것은 틀린 일이라고 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 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

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

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태오 20:25~28)라고 했다.

다같이 하느님의 자녀인데 높고 낮음이 있을 리 없다.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알고 실천하는 이가 모든 사람의 본보기가 될 뿐이다. 교회에

나가는 목사나 교인이 무슨 장관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이는 하느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하면서 남에게 대접받고 칭찬받으려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을 이용해서 무슨 일을 하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진실한 교인도 못

되고 또한 하느님의 은혜도 아니다. 칭찬을 안 받아도 좋다. 다만 나라

와 겨레를 위하여 부지런히 일하면 하느님에게 영광이고 민족에게도

영광이 된다.

   이 사람도 몇 십 년 전에 예수를 믿었는데 요새 사람들이 나를 보고

당신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고 한다. 그래서 나도

보통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예수를 믿는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러면 요새 여러분들이 내 말을 듣고 "저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무슨 기독교 신자인가?"라고 하면서 참 답답해 할 것이다. 그래서 "나

는 예수 안 믿는다. 무종교다. "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마음이 가

볍지 않을까 생각이 된다. (1957)

 

●예수는 몸의 한 부분이 죄를 범하려 하거든 그것을 먼저 잘라 버리

라고 했는데 나는 이것을 그대로 해석하기를 거절한다. 말은 잘 알아들

어야지 이것은 애초부터 잘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범하지 말라

는 것이다. 눈 둘, 팔 둘, 다리 둘을 가진 멀쩡한 몸을 가지고 죄를 범

해서 지옥불에 가는 것보다도 오히려 하나씩 자르더라도 죄를 범하지

않고 영생의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낳지 않느냐? 병신이라도

죄만 없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이것을 사람들은 그대로 해석하고

있다.

   그대로 해석한다면 부활한다고 하는데 그때 그대로 살아나느냐 하는

것도 의심이 난다. 하늘나라에서도 그대로 사는 것이라고 하면 외팔이

는 하늘나라에서도 외팔이가 될 게 아닌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하느

님 나라에는 불완전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 한 팔 없는 사람 한 다리

없는 사람 한 눈 없는 사람이 있다니 그것은 어째서 그런 걸까? 몸을

조금 잘라낸다 해도 쓸데없고 맘이 자라야 한다. 맘이 자라면 몸의 욕

망을 극복할 수가 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이다. (1957)

 

●"누구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씨

을 지녔으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도대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 첫째 편지 3:9) 이 말

씀에 따르면 우리 사람은 흙으로 빛어진 흙덩이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씨(본성)를 가지고 있으며 하느님의 뜻으로 났다고 한다. 이러한 인자

(얼나)의 대표로 예수를 이 땅 위에 내보냈다. 크리스천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쳐다만 보고 믿는다고 해서 진실한 크리스천이 될

수 없다. 예수의 얼굴은 보잘것없다. 지나간 것의 한가지 일인데 무엇

이 대단한가?다만 예수의 진리정신이 오늘날까지 폭포수처럼 우리 머

리 위에서 부어주고 있는데 그것을 우리가 느끼기 때문에 예수가 대단

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나온 것은 사람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으러 나온 것

이 아니다. 오직 하느님이 주신 성령을 받아 얼나로 거듭나 하느님 아

버지의 아들 노릇을 하려고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예수가 사람들로부

터 대접받으려고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은 아니다. 하늘로 올라갈 사람

이 십자가를 지고서 죽어야 했겠는가?하느님아들로서의 사명을 다 마

치고 죽은 데 지나지 않는다. (1957)

 

●내가 23살 때만 해도 기독교를 전도하는 데는 요한복음 3장 16절과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린 보혈로써'라는 사도신경 구절이 빠져서는 안

되는 줄로 알고 줄곧 외웠는데 지금은 달라지고 있다. 수십 년 간 이

구절을 인용하여 오다가 지금은 몹시 달라지고 있다. 달라진 뒤 20년

이 지난 오늘까지 나로서는 내 해석이 옳다는 신념이 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주셨다. (요

한 3.16)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다는데 어찌하여 이

세상에 살기가 이렇게도 괴롭단 말인가?

   그러나 나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이 보인다. 하느님의 사랑을 줄곧 보

고 있다. 세상의 온갖 것들이 나에게 하느님의 편지가 되어 소식을 전

해주고 내가 생각을 함으로 하느님이 주신 생명인 얼나를 밝힐 수 있

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예수만이 혼자 하느님의 아들(독생자)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은 누

구나 하느님 아버지의 성령을 받아 얼나로 거듭나면 얼나로는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인 것이다. 내가 깨달은 얼나로는 하느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얼나를 받들고 줄곧 위로 올라가면 내가 하느님께로 가는지 하느

님께서 내게로 오는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하느님 나라는 가까워지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얼나가 하느님 나라

요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사람마다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를 깨달으면 이 세상도 그대로 하느

님 나라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보면 하느님 아버지의 참 사랑을 느

낄 수 있다.

   자기 마음속에 온 하느님의 생명(씨)인 얼나가 하느님 아버지 외아

들인 것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누구나 몸나로는 죽어도 얼나로는 멸망

치 않는다. 거듭난 얼나가 영원한 생명이다. 얼나가 참나인 것을 깨닫

는 것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는 하느님의 생

명이라 예수 이전에서부터 이어 내려오는 것이다. 예수는 단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이 사실을 크게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지금 다시 요한복음 3장을 통해서 성령을 폭포수처럼 쏟아 부어주어

우리를 영원한 하느님과 이어 준다. (1957)

 

●예수를 파는데 입맞추어서까지 팔아먹다니 아주 간사하다. 사람이란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이왕 팔아먹으려면 끝까지 맘 편하게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선생님을 좀 팔아야 하겠습니다' 라고 할 것이지 입맞춤

으로 신임을 보여 믿게 하고 팔아먹다니 앙큼하기 짝이없다. 유다가 이

같이 간악한 자로 보이지만 실상 우리 인간은 웬만한 사람이면 이 짓

을 한다.

   예수는 비평·불평을 하지 않았다. 변변치 못한 사람같이 그냥 그대

로 생각하고 말하고 지나갔다. "하늘의 천사들을 불러서 악을 무찌르지

못할 줄 아느냐"라고 한 이 말은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신 신격의 소유

자임을 인정하는 말로서 삽시간에 죄악된 인간들을 갈아엎을 수 있지

만 예수를 보낼 때는 유치원에서 유치원 어린이들이 장난을 치게 하려

고 보낸 것이다.

   유치원의 잘못은 아버지 어머니가 대속하여 주실 수 있는 것같이 생

각되어 하느님 아버지의 전능을 찾지만 우리는 내가 담당할 것은 내가

하고 나가야 한다. 우리는 결코 유치원의 어린이지 전능한 하느님 아버

지는 아니다. 마치 어린이들이 천진하게 아무것도 모르고 노는 것같이

사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얼나로는 죽는 것이 아니다.

영원무한의 하느님편에서 보면 우리가 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공

연히 하느님 아버지를 닮듯이 하는 것은 다 소용없는 일이고 유치원

어린이가 장난하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산다는 것도 죽는다는

것도 참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1957)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영

원한 생명은 하느님 아버지의 생명인 얼(성령)이요 전체라 하나이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둘이 아니고 하나이다. '보내신 예수'라고

옮겨져 있지만 '보내주시는 예수'라고 옮기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예

수가 얻은 영원한 생명은 그의 몸이 아니고 그의 얼이다. 그 예수의 얼

은 영원한 현재로 지금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다. 예수의 얼

은 줄곧 우리에게 보내주신다. 어떤 뜻으로는 우리 삶의 토대가 얼나인

그리스도이다. 이렇게 말하면 범신론(汎神論)과 같이 들리나 그리스도

라기보다는 성령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하기에 더 나을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을 수 있고 성령이 임할 수 있다고 본다. 성

령과 그리스도가 어느 쪽이 더 범신론적인가? 성령은 진리요 참나요

생명이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성령이 있어야 우리의 한 줄기 얼생명을

이어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을 빼고 성령이라고 하든지 그리스도라고 해

야 하는 까닭이 있다. 여기에 이 기도는 예수 자신이 하느님에게 올리

는 기도인데 예수 자신이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라고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예수는 그렇게 말하는 이가

아니다. 이것은 내가 고증을 하려고 일부러 말하는 것은 아닌데 이 기

도문(결별의 기도)을 읽는데 한 8분이 걸리는 긴 기도이다. 당시에 무

슨 녹음기가 있는 것도 속기술이 발달된 것도 아니니만치 이 많은 기

록을 다 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복음기자의 주관이 들어간 것이라 생

각된다. (1957)

 

●예수가 못 박혀 죽었다. 간디가 암살을 당했다. 고금(古今)의 역사

상 꼿꼿한 사람의 최후가 미움을 사지 않고 마친 일이 드물다. 세상은

여러 층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미워하는 일이 적은 사회가 올

라서는 사회이고 미워함이 많은 나라일수록 참 보기 흉한 나라

다. (19i7)

 

●얼사람(生靈)은 참으로 이상하다. 두 발로 거닐어 이상하고, 머리를

꼿꼿이 두어야 다닐 수 있으니 이상하고, 나를 생각하니 이상하고, 생

각을 생각하니 이상하다. 그러나 제 아내와 자식들 먹일 생각만 한다면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

   나와 무한하고 영원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상한 느낌이

들면서 내가 얼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마련이다. 얼나를 가만히 깨닫

고 보면 제나가 보잘것없고 하잘것없는 것을 깨닫는다. 여러분이나 예

수나 이 나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여기에 나온 이상은 우

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오직 원대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얼나를 생각

하고 우로 올라갈 것을 일편단심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닮지

않은 제나(自我)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인 얼나를 붙잡고 줄곧 올

라가는 것이다. (1957)

 

●내 뒤에 오는 이가 나보다 앞선 이라는 것은 이 즈음 진리의 발달이

그러하다. 내가 아무리 예수를 믿는 척하더라도 내 말을 듣고 뒤쫓아오

는 사람은 언제인가 나를 앞설 것이다. 나 역시 미완고(未完槁)를 완

결짓기를 바라나 내 손으로는 할 수 없다. 내 뒤에 오는 이가 할 것이

다. 인(仁)을 보고 선생은 하지 못하더라도 제자는 할 수 있다. (1957)

 

●이 나라 사람들은 혼인할 때 혼인하면 잘 살 수 있을까를 점술가에

게 가서 무그리(무꾸리)를 해서 나쁘다면 혼인을 하지 않기도 한다. 사

업할 때도 돈을 벌 수 있는가를, 선거할 때도 당선되겠는가를 묻기를

하는데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민족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는가? 이

세계의 미래가 어떻게 되겠는가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

나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 생전에 그리고 사후(부활)에도 이스라엘이

언제 회복되겠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때와 기한은 아버

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사도행전 1:7

개역성경)라고 대답했다. 나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의 이러한

점 때문에 나는 믿는다. 예수의 이 대답을 예수 믿는다는 이들도 잘 모

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의 이 말에 만족치 않는다. 예수에게

신통한 이적을 바란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하느님 아들의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이것은 영원과 관계 있는 일이기 때문에 변화무

쌍한 상대적 세상을 잠깐 지나가는 유한(有限)한 인생이 알려고 할 문

제가 아니다.

   석가와 예수의 같은 점은 무엇인가 하면 저절로 되기를 바라는 점

다. 결코 억지로 되는 것을 바라지 말고 절로 되는 것을 바라도록 가르

치는데 특징이 있다. 예수는 절대 아버지의 권한을 믿었다. 하느님

모시는 것이 아들의 노릇이다. 하느님 아버지가 어떠한 지경이라고 그

것을 다 알려고 할까? 아버지 하느님이 얼마나 높은 지경인지 사람으

로서는 아무도 안 사람이 없었고 또 없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절

대하심을그저 믿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 예수가 언제 하느님 아버지

의 자리를 바랐던가?(1957)

 

●이 사람은 모든 상대적 존재의 근원인 전체 하나(一)가 얼로 없이

계심을 느낀다. 이 하나 밖에 다른 것은 없다. 모든 상대적 존재는

하나(一) 속에 들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가 있느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

은 일이다. 그런데 얼로 없이 계시는데 대해서는 개인적인 체험이 있어

야 한다. 내가 '하나' 를 느끼는 것을 사실대로 생각대로 고백하는 것이

다. 그래서 나는 이 하나(一)를 증거해야 겠다. 다른 것은 다 모르니까

하나만을 증거해야 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참나(眞我)인 하나의

증인이다. 류영모뿐 아니라 누구라도 참나에 대해서는 모르면 몰라도

자세히 알 것 같으면 하나의 증인이 된다.

   절대자인 그 하나가 나에게 계셔 나에게 사람의 사명을 주신 이가

곧 하나이다. 사명을 받아서 하나(一)의 아들이 된다. 하나의 아들이

된 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하나의 아들 노릇을 해야 한다.아마 예수도

이것을 느낀 것 같다. 하나의 아들은 그 하나의 소리 없는 소리를 귀

없는 마음이 듣는다. 허공이 가없이 퍼져 있는 것과 시간이 끝없이 이

어진 것으로 하나의 뜻이 있음을 이 사람은 느낀다.하나의 아들 노릇

한다는 그 소리, 그리고 아버지가 계신다는 그 소리, 아버지와 아들사

이에 뜻이 활동하는 소리가 맘속에서 들린다. 내 맘속에서 자꾸만 하나

의 뜻이 일어난다. 그것을 느끼는 것이 내 뜻이다. 내 맘의 뜻은 하나

의 뜻이다. 하나는 가장 큰나(大我)요 참나(眞我)이다. 바로 하나인 하

느님이시다. (1957)

 

●예수가 이르기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라고 했다. 이것이 알

수 없는 말 같으나 예수 당신이 해놓고 간 것이 미정고이니까 이것을

계승하는 후대의 사람들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가 가

까이 한 '하나'의 님을 후대(後代)가 마침내 더 가깝게 보고 듣는 견

지(見地)에 까지 갈 것이라는 말이다.

   선생과 제자 사이에도 모순이 있다. 선생도 제자도 완전하다는 것은

없다. 사상의 끄트머리가 어디이며 언제 완전하겠는가? 미정고(未定

稿)로 가르치는 선생과 제자 사이에 모순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아니다.

이 미정고는 인류가 계속하는 날까지 계승할 사상의 줄이다. 일반적으

로 선생을 하늘과도 같이 대단하게 생각하는데 대가(大家)선생이라고

모순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순이 있다. 사상의 원고를 마치려면 마침내

하느님이 마칠 것이다.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시작이 하느님이기 때문

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사람은 하느님이 쏘는 빛의 끄트머리 또는

하느님이 잡고 쓰시는 붓의 끄트머리로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시간

까지 하느님이 잡고 쓰시는 붓끝의 역할을 우리가 하고 가는 것이다.

    '나에게 오라 내가 말하는 신조만이 여러분을 구원하고 여러분의 사

는 길일 것이다. ' 마치 무함마드가 한 손에 코란을 들고 한 손에 칼을

들고 권유하듯 한다. 이런 그릇된 짓은 다 자기가 미정고라는 것을 모

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무엄하게도 하느님의 자리까지 빼앗

아 앉겠다는 것이다. (1957)

 

●예수는 잔치를 부정했다. 네게 반대로 답례할 수 있는 이를 잔치에

청하지 말라고 했다. 잔치는 아무리 잘해도 뒤죽박죽(斗祝薄祝)이 된

다. (1957)

 

●참으로 예수·석가의 말씀을 그대로 바로 알아들었다면 이 죄고(罪

苦)의 세상을 건너가려고 언제든지 애쓸 것이다. 아직 바로 알아듣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재미를 찾는다. 말씀이나 설법을 들을 때 이론으로

는 이 세상은 죄요 고(苦)라고 한다. 그러나 그 곳을 떠나면 또 재미있

는 것을 찾게 된다. 이게 알아들은 것인가? 이론으로는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안다. 기도할 때 죄악의 괴수라며 눈물의 회개

를 한다. 그러나 누가 그를 보고 '너는 죄인이다' '음란하다'라고 하면

성을 낸다. 그리고는 버젓이 산다. 참으로 세상이 죄악의 고해(苦海)라

고 느낀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고 싶어도 말 못하는 것을 대신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란 언제나 뒤돌아보면 후회가 된다. 회개 한 번 하고 당장 하

늘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후회는 일생 동안 줄곧 따라 다녀야 한다

자꾸 후회하고 회개해야 한다. (1957)

 

●예수가 말하기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

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요한 12:46)라고

했다. 여기에 나는 어버이가 낳아 준 제나(自我)가 아니라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를 말한다. 얼나를 깨닫는 것이 나는 빛이라는 것이다. 빛

의 나가 있다는 것은 얼나를 깨달았단 말이다. 밝은 것이 빛이듯이 깬

것이 빛이다. 그 사람이 얼나를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는 그 사람의

말로 심판한다. 하느님도 예수님도 심판하지 않는다. 그 사람의 말이

심판한다. 예수는 자기 말이 하느님의 명령이라고 했다. 이 명령이 영

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利)를 남겼는데 천배 만배의 이

를 남겼다. 우리도 예수처럼 남겨야 할 진리정신을 남겨야 한다. 그런

데 남기지 못하고 걸러만 지니 이 세상이 희망 있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1957)

 

●예수는 비판을 삼갔다. 예수는 이르기를 '남을 판단하지 말아라. 그

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

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마태오 7:1~2)고 했다.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의 시키심에 따

라 목숨을 걸고 바리새인과 사두게인들을 비판했다. 그걸로 마침내 십

자가 형틀에 처형되었던 것이다. 예수가 이르기를 "내가 율법이나 예언

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오 5:17)고 했다. 그런데 예수는 모세의 율

법을 부정했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예수

는 이르기를 "나는 내 마음대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어떻게 말하라고 친히 명령하시는 대로 말했다"(요한 12:49)고

했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는 이르기를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시다. 그러

므로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참되게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올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

들을 찾고 계신다"고 했다. 예수는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는 얼나를 깨

닫는 것이라고 했으나 제도에 대해서는 비판하지 아니했다. (1960)

 

●예수는 농사 비유를 많이 했다. 어떤 때는 포도나무 한 그루를 전체

생명(얼나)으로 비유했고, 또 농장을 경영하는 것을 전체생명(얼나)으

로 비유했다. 전체 생명(얼나)하나를 나타내자는 것이 성경이다. 예수

는 도무지 하늘나라 얘기는 안 했다. 자연에서 이야기 소재를 얻었다.

   내가 포도나무라고 하고 또 내 아버지는 농부라고 예수는 말했다. (요

한 15장) 여기서 내라는 것은 예수의 몸뚱이가 아니다. 예수로 나타난

영원한 생명인 얼나이다. 예수는 얼나를 생명이라고 했다. (1960)

 

●예수나 우리나 모두 다 이 세상에 한 번 턱 나와 본 것이다. 여기서

는 별 수 없이 비유를 쓸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내가 포도나무라면

농장 주인은 내 아버지가 이렇게 했겠지 하는 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것이다. 말이란 사물(事物)을 두고 만든 것인데 형이상의 영원 절대(하

느님)를 표현할 때는 어쩔 수 없는 비유다. 여기서 단단히 주의할 것은

비유란 전체가 들어맞는 것이 아니다.

   예수하고 우리하고 차원이 다른 게 아니다. 예수 석가는 우리와 똑

같다. 예수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요한 15 :5)라고 했다

예수가 우리보다 월등한 것이 아니다. (1960)

 

●이 사람은 예수 믿는 집회는 안 가진다. 예수 믿는 이들이 한 자리

에 모이면 기도에 대해서나 성경 공부를 말하고 싶어 한다. 처음으로

성경 공부를 하려는 이도 많이 있겠는데 나는 그럴 자격도 없다. 자기

가 배울 생각만 하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 요새는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도 많으니까 나는 안 한다. 50년 전 일제 하에서는 성경을 갖고

다니는 것이나 남 앞에서 기도하는 게 어려운 때니까 그래도 좋았다.

이제는 성경도 남 보란 듯 들고 다닐 것도 없고 기도는 될수록 혼자서

해야 한다. (1960)

 

●예수를 따르고 그를 쳐다보는 것은 그의 몸(色身)을 보고 따르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내 속에 있는 속알 곧 하느님의 씨(얼)가 참 생명

임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먼저 내 속에 있는 속알에 따라야 한다.

그 속알이 참 예수의 생명(얼나)이요 나의 참 생명(얼나)이다. 몸으로

는 예수의 몸도 내 몸과 같이 죽을 껍데기지 별 수 없다. (1960)

 

●석탄일(음력 4월 8일)은 석가를, 성탄일(12월 25일)은 예수를 욕되

게 하는 날이다. 석가와 예수의 가르침에 반대 방향으로 나가기 때문이

다. 아예 기념일을 정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한다는 기념은 틀림없는

우상이다. 석가와 예수가 난 날은 비밀이다. 지금의 석탄일, 성탄일은

실제로 난 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늘의 비밀을 가지고 놀려는 이

들은 예수·석가와 상관없는 이들이다. 석가 예수가 난 날이 비밀로

된 건 큰 뜻이 있는 일이다.

   나는 통히 잔치 예식은 싫어한다. 크리스마스는 으레 싫어한다. 그러

나 어린이들은 즐겁게 자라도록 해줘야 한다. 군것질에 버릇 들지 않을

정도로 맛있는걸 먹여야 한다. 군것질이나 게으름은 나쁘니까 버릇 들

지 못하게 해야 한다. 자식을 기르면서도 이 다음에 철이 나면 잘되겠

지 하고 내버려두지 말고 잘 분간을 해야 한다. 나는 어제 크리스마스

방송을 들었는데 하루종일 크리스마스라 중앙방송국이 예배당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고마운 건 방송에서 어두운 곳에는 가지 말라고 한 것

이다. 무엇이든지 하나만 주장하는 건 참 꼴 보기 싫은 거다.

   성탄이 1960년 전에 난 예수가 아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는 것

은 오늘 내 가슴속에 예수가 나셨다고 할 수 있는 자만이 부를 수 있

는 거다. 그리스도란 바로 된 생명, 바로 된 목숨이다. 본래의 참나(면

목)이다. 그리스도(얼나)란 애초에 있는 자유이다. 몸과 몬(物)에 속박

되지 않은 얼생명이다. 성탄이란 바로 내 일이지 남의 일이 아니다. 내

가슴속에서 순간 순간 그리스도(얼나)가 탄생해야 한다. 끊임없이 성불

(成佛)해야 한다. (1960)

 

●절대유일(絶對唯一)이신 성령의 하느님을 알고 거기에 붙잡히는 것

이 영원한 생명이다. 이에 참 삶의 맛이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이 몸이 지은

죄를 사하는지는 모르겠다. 예수가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홀린 것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믿는 것은 나와 상관없다. (1960)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신 그대로를 이르는 것이 예수의 하는 일이었

다. 말의 근원은 하느님인데 우리의 말은 그 전갈이다. 꼭 해야 하는

그 길을 말함이 영생이다. 내 말은 내가 내 맘대로 지껄이는 게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신 대로 함이다. (1960)

 

●예수나 미륵불을 기다리지 말라. 그것은 헛일이다. 그리스도는 영원

히 오시는 얼나이다. 구경(究竟)은 얼나를 깨달아 생명 전체(하느님)를

이루는 것이다. 얼나로는 시간·공간의 어떤 곳에도 오는 것이 가는 것

이고 가는 것이 오는 것이다. 얼나는 무소부재(無所不在)하기 때문이

다. (1960)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나 보았다. 보내신 그리스도란 영원한 생명이

다. 우리에게 대기에서 산소가 공급되듯 대령(大靈)이신 하느님으로부

터 성령이 공급되는 것이 그리스도(얼나)다. 그리스도는 줄곧 오는 영

원한 생명 (얼나)이다.

 

●예수는 간단하게 말했다. 영원한 생명이란 죽음을 부정하는 거다.

나서 죽은 몸나가 거짓 생명임을 아는 것이다. 이 껍데기 몸이 죽는 것

이지 참나(얼나)가 죽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몸나의 죽음을 무서워하

고 싫어할 까닭이 없다.

   보통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껍데기 몸이 퍽 쓰러져 못 일어나는

것밖에 더 있는가? 이 몸이 그렇게 되면 어떤가? 진리의 생명인 얼나

는 영원하다.

   예수의 신앙은 과학적이었다. 사는 것은 이 몸이 아니다. 이 몸은 참

나(얼나)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이 몸이 훌렁 벗어져 나가는 게

무슨 문제인가? 거짓나인 몸이야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 이 몸은 참나

가 지나가는 거지 이 몸나가 참나가 아니다. 이 몸은 참나(얼나)의 두

루마기 옷 같은 것이다. 언제든지 내버릴 때가 있다. 이 몸의 심부름하

는 이는 아무리 높이 앉혀도 배워주어도 땅에 붙은 소리밖에 못한다.

예수가 이르기를 "위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신다. 세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은 모

든 사람 위에 계시며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요한

3:31 ~32)고 했다. (1960)

 

●예수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증거를 특별히 한 것이 없다. 하느님 아

버지를 보여 달라는 필립보에게 예수가 대답하기를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라고 했다. 여기에 '나'는 자기 속에

있는 하느님의 얼(씨)을 가리킨 것이다. 저마다 내 마음속에 오신 하느

님의 얼(씨)을 믿는 게 구원이요 영생이다. 이 껍데기 몸은 비눗방울

같은 거다. 어떤 것은 일찍 꺼지고 어떤 것은 좀 오래 있다가 터진다.

이 몸이란 그런 거다. (1960)

 

●예수 석가를 다 몰랐다. 누구를 존경하고 좇는 것은 다 제 욕심 채

우려드니까 모르게 되는 거다. 예수·석가도 바른 말 하셨는데 사람들

이 못 알아들었다. 공자(孔子)는 모르는 게 없는 줄로 알았다. 그게 잘

못인 것이다. (1960)

 

●사람 사귀는 데도 버릇으로 친해서는 못쓴다. 사람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 그 앞에 절을 할 것은 참이신 하느님뿐이다. 종교신앙은 사람 숭

배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을 바로 하느님으로 깨닫지 못하니까 사람

더러 하느님 돼 달라는 게 사람을 숭배하는 이유다. 예수를 하느님 자

리에 올려놓은 것도 이 때문이고 가돌릭이 마리아를 숭배하는 것도 이

까닭이다. (1960)

 

●아버지 모신 아들인 얼나가 참나라고 보는 이것이 예수가 인생을 보

는 눈이다. 절대의 아버지가 계셔 그의 아들 노릇 하는 게 참나인 얼나

라는 거다.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없다"고 했다. 나도 예수와

같은 이러한 인생관을 가지고 싶다. 이런 점에서 예수와 나와 관계가

있는 것이지 이 밖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걸 신앙이라 할지, 예수

를 믿는다고 할지 나는 모른다. (1960)

 

●마음 그릇을 가지려고 한다면 헤아릴 수 없이 크게 해야 한다. 우리

의 마음은 지극히 큰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비워 놓으면 천국도 그 속

에 들어온다. 그 마음에 하느님 나라가 들어오지 못하면 마음의 가난을

면치 못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는 예수, 석가, 간디

등이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비워 하느님 나라로 가득 채운 이들이기

때문이다. (1960)

 

●이사야 53장에 예수가 고난 받고 이기는 걸 말했다. 예수 나기 7~8

백 년 전에 이런 그림을 그려 놓았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만이 그런 게

아니고 바른 말하는 사람,지극히 높은 이(하느님)의 아들이란 자각(自

覺)이 있는 사람, 판단을 하는 사람이 다 해당되는 그림이다. 4.19때

죽은 아우들도 다 이와 같다. 그들이 가엾다면 그렇게 가엾을 수가 있

는가?그 아우들(4.19 의거 때 희생된 학생)이 뭔가?다 바른 말한 사

람들이지 않는가? 예수 석가가 구원이니 성불(成佛)이니 하는 것은

우(하느님)로 올라가 세상을 이겼다는 것이다. 예수·석가가 별 게 아

니다. 다 바른 말한 사람이다. 종교를 신앙하는 것도 우리가 바른 말

하자는 것이다. 바른 말은 스스로부터 해야 한다. 그저 말씀뿐이다. 이

세상에서 꼭 해야 할 큰 일은 하느님의 말씀을 바로 받아 바로 전하는

게 큰 일이다. 다른 큰 일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말만 해서는 안 되고 실제로 행해야 된다는 생각이

꽉 박혀 있다. 말은 내가 하는 것도 아니요 이 입이 하는 것도 아니다.

재판장(하느님의 성령)이 하는 일이다. 모든 게 판단하는 것밖에 없다.

말이자 일이고 일이자 말인 것이 판관(判官)의 일이다. (1960)

       

                        출처:다석 류영모 어록(박영호 엮음 두레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