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66년(1890~1956) 동안 사람으로서 삶에 참여하면서 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말씀(로고스, 성령)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6.25 동란(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다시 알게 된 중요한 교훈이기도 하

다. (1956)

 

그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말을 알아야 한다. 반대로 그 사람의 말을

알면 그 사람을 알게 된다. 사람으로서 꼭 들어야 할 말을 들으면 죽어

도 좋다는 것이다. (朝聞道夕死可矣-논어 공자) 말을 알자는 인생

이고 말을 듣고 끝내자는 인생이다. (1956)

 

한사람의 총결산은 그사람이 한 말로서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날

에 너희들이 말한 말이 너희를 판단(심판)한다고 했다. 말이란 우리 입

으로 늘 쓰는 여느 말이다. 그 사람이 쓰는 여느 말이 그 사람을 판단

하는 데 왼통(전체)이 된다. 그 사람을 판단함에 많은 말을 가지고 우

리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쓰는 한두 말이 그 사람을 판단하게

한다. (1956)

 

우리나라 말에 '고맙다'는 말에도 뜻이 있다. 고만하라(그만하라)는

뜻이다. 자꾸 더 받아서 될 일이 아니라 고만하라는 것이다. (1956)

 

하느님께 감사하는 말씀을 드리는 데 너무나 많은 말을 너무도 능청

스럽게 하고들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감사하는 것이 못

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지혜=사랑)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

지만 할 말을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어째서 이것을 나에게 주시나'라

고 하게 될 뿐이다. (1956)

 

이상한 말을 찾으려 하지 말고 가장 평범하고 보편적인 말을 찾아야

한다. 그 말 속에 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놓는 이 사람의

말도 어려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사람의 말은 어렵다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궤변을 늘어놓기 때문에 점점 알 수 없게 되는지

모르겠다. (1956)

 

하느님을 자꾸 말하면 실없는 소리가 된다. 사람의 실없는 말과 짓

을 깨뜨려 주는 말씀이 있으면 그것이 참 종교가 된다. (1956)

 

'말미암아'라는 말은 '따라서'라는 뜻인데 본 뜻은 '그만두는 것, 그

만하고 마는 것, 그만하면'이라는 뜻인 것 같다. (1956)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 보아도 결국은 하나(절대)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다는 데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를 깨닫는 것이다. 깨달으면

하나이다. 하느님의 나가 '한나' '하나'이다. (1956)

 

부르주아들(富貴층)은 좋은 날을 즐기겠지만 우리는 비바람 부는 싫

은 날, 궂은 날을 살 수밖에 없다. 비바람 부는 날 기도하기란 어렵다.

비바람 부는 날 빌고 바라기는 어렵지만 빌고 바라는 기도는 꼭 필요

하다. 빌고 바라는 '비바람' , 이것이 다름 아닌 말씀이다. (1956)

 

이 사람은 물(水), 불(火)을 퍽 많이 생각했다. 물을 부리는 것은 불

이다. 그런데 불을 다스리는 것은 물이다. 물과 불은 서로 작용한다.

사람은 물, 불 없이 살 수 없다.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을 물과 불에 비

유했다. 또 우리 마음속에 평화를 이루려면 푸른 것이 있어야 한다.

물·불(태양)로 자란 푸른 열매(벼,禾)가 입에 들어가 평화(平和)롭다

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물 불 풀이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956)

 

큰 성령(하느님)이 계셔서 깊은 생각(지혜)을 내 마음속에 들게 해

주신다. 하느님의 말씀은 사람 보고 한다. 사람과 상관하지 않으면 말

씀은 필요 없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사람 사이에서 사는 까닭에 말씀

이 나오게 된다. 생각이 말씀으로 나온다. 참으로 믿으면 말씀이 나온

다. 말은 하늘 마루꼭대기에 있는 말이다.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써야 한다. 하느님과 교통이 끊어지면

생각이 결단나서 그릇된 말을 생각하게 된다. 정신세계에서 하느님과

연락이 끊어지면 이승의 짐승일 뿐이다. 몸뚱이는 짐승이라 더러운 것

을 지저분하게 싸 질컥질컥 한 가운데 사는 짐승이다. (1956)

 

나와 네가 다른 것이 아니다. 모두 다 한 나무에 핀 꽃이다. 우리는

다만 그 사람의 긋(얼나의 나타남)을 알면 그만이다. 곧 그 사람의 인

격, 그 사람의 정신,그 사람의 생각,그 사람의 말씀을 알면 그만이다.

그 말씀 속에서 또 내 얼(참나)을 내 긋(얼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956)

 

생각을 자꾸 하는 사람은 말을 하고 싶다. 참 말씀을 알고 참 말씀을

하려는 사람은 그 가슴속에 생각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는 사람이

다. (1956)

 

말을 모르면 사람을 알 수 없다(不知言 無以知人也-거』 요왈

편). 배운다는 것은 말을 알기 위한 것이다.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사귀어 주고 물건과 물건 사이를 밝혀 준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하느님을 찾아갈 수 있다. 말을 알지 못하고는 도시 사람 노릇

을 하지 못한다. 도(道)라는 것은 말의 길을 안다는 말이다. 말도 하나

밖에 없는 말인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옛 성현(聖賢)

인 예수, 석가, 공자의 말씀을 더듬어 가지고 정신적으로 올라가서 하

느님을 만나 보게 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고는 도저히 나갈 길을

바로 찾았거나 산다고 할 수 없다. (1956)

 

지금 여기서 쓰고 있는 이 말이란 확실한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의

배를 흔들고 성대를 울려서 소리를 내어 말을 하면 상대방의 말을 받

은 고막이 울려서 이 단계로 생각을 하게 되는 그것뿐이다. 사람이 하

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생각한다는 것은 소리를 낼 필요도 없고 소

리를 받아서 귀로 들을 필요가 없다. 세상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으나 성현(聖賢)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귀 아닌 마음으로

듣고 있었으니 그것을 받아 적은 것이 성경이나 불경 같은 경전이

다. (1956)

 

'실컷 맛보라'는 말이나 '너 좋으면 좋다'는 말은 땅 위(地上)에서

나 쓰는 말이다. 그따위 말은 땅에 내버리고 갈 말이다. 말 가운데 참

말은 하느님의 말씀밖에 없다. 그 밖에 중언부언 할 말이 많아지면 악

으로 나가게 된다. "대접할 것이 통 이것밖에 없어서 어서 더 잡수십시

오'라고 하면 손님은 "아닙니다. 많이 먹었습니다. 그만 먹겠습니다

잘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것이 조히(좋게) 사는 것이다. 인사로

만 하지 말고 "많이 먹었어요 그만 좋습니다' 하는 이것이야말로 조히

살 수 있는 참 말이 될 것이다. 이는 '실컷'을 내버리고 사는 사람이라

'실컷'이란 못 쓸 말로 안다. 하느님으로부터 드리워진 한 얼줄을 늘

붙잡고 사는 사람은 어려운 가운데도 늘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

다. (1956)

 

'염불보다 잿밥에 람맘이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면

서도 신(神)에게 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음식에 마음이 가 있다. 사람

들이 제사 음식을 만들 때 빚을 내면서 만든다. 이렇게 만든 음식을 먹

는 데 마음이 가 있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데 금은이나 백금, 수정으

로 장식된 십자가를 들고서 하느님 생각, 예수님 생각을 한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이 날는지 모를 일이다. (1956)

 

실없는 말도 생각을 좇아 나오고 실없는 짓도 꾀로 만드는 것이다.

소리로 내고 손발짓을 하고 나서는 제 마음이 아니었다면 컴컴한 수작

이라 남이 저를 의심 않게 하고 싶은들 되겠는가? 허물된 말이 제 몸

이 아니고 허물된 짓이 참이 아니라면 소리에 틀렸고 사지(四肢)가 잘

못 든 것을 제 마땅하다면 스스로 속임이요 남으로 저를 좇게 하려 들

면 남을 속이는 것이다. (장횡거의 동명(東銘)』 일부-류영모 옮김)

 

실없는 짓이란 꾀함 없이 하는 행동을 말하는데 꾀함이 없고 도모함

이 없이 하는 일이 있겠는가?분명히 내가 했는데도 '실없이 해보았다

거나 자기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고 보니 그렇게 되

었다'라는 이러한 말은 성립이 안 된다. 실없는 짓도 자기가 꾀하여 도

모한 것이 분명하다. 제가 해놓고 아니라면 말이 되는가?사람 노릇을

하려면 제가 한 것은 분명히 제가 했다고 해야 한다. (1956)

 

말에는 될 말 안 될 말이 있는데 왜 그런지 딴 말보다는 될 말만 하

고 싶다 이 사람은 담배도 모르고 술도 모른다. 역시 한 마디 말씀은

더 하고 싶다 사는 날까지 진리 신앙 윤리 ·도덕에 대해 더 알고 싶

고 더 연구하고 싶다. 덕(德)이라는 것을 붙이고 싶다. (1956)

 

목사가 목회 활동을 하는데 한 교회에 오래 있지 못하고 오래 있게

하지도 않는다. 한 목사가 어느 교회에서 3, 4년 목회를 하면서 알던

이치를 다 풀어놓으면 더 말할 것이 없게 된다. 설교를 하는데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니 듣는 사람도 듣기 싫어진다. 그래서 자리를 옮기게 된

다고 한다. 다른 곳에 가서도 그냥 녹음기 노릇을 또 하게 된다. 생명

있는 녹음기가 아니다.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씨(얼)를 지닌 이는 그

씨가 자란다. 그러므로 어제의 나가 오늘의 나가 아닌데 밤낮 같은 소

리만 할 까닭이 없다. (1956)

 

동양에서 흔히 하는 말로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런 신앙은

미신(迷信)이다. 쌀(米)로 가는(走) 글자가 미(迷)이니 쌀(밥)을 먹어

야 한다는 도(道)가 미신이다. 오늘날 이 땅 위에 올바른 종교가 몇이

나 되고 올바른 신도가 몇 사람이나 되는지 모르겠다. 예수는 사람이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했는

데 모두가 밥을 먹어야 산다는 먹자판을 만들었다. 그래서 종교가 미신

이 되어 아편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1956)

 

나는 소용(所用)이라는 말을 아주 싫어한다. 날마다 하는 일은 묻지

도 않는데 다른 것을 하려면 무엇을 하려느냐고 묻는다. 그리하여 말을

해주면 뭣에 소용되느냐고 묻는다. 집안 식구들은 비교적 나를 아는 사

람들인데 무엇인가 좀 다른 것을 하면 뭣에 소용되느냐 왜 그것을 하

느냐고 핀잔을 듣게 된다. 말을 하고 싶지 않는데 비평이 나오니까 말

이 하고 싶어진다. 무엇에 쓰느냐고 그 소용(所用)을 따지는 말을 내

가 아주 싫어한다.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다. 무슨

소용에 닿지 않는 것이 여간 많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것이 의미가 있

다. 무엇에 쓰는지 모를 것을 실상 알아보아야 한다. 하늘은 무엇에 쓰

는 것인가? 우리 인간은 무엇에 쓰자는 것인가? 저 억만 별들은 무엇

에 쓰자는 것인가?구만 리 넓은 땅은 무엇에 쓰자는 것인가?

  사람은 이용(利用)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이용이니 소

용이니 하는 생각 없이 사는 것이 참으로 사는 것이다. 그냥 보아서는

아무 의미 없는 것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무것에도 쓸데없는

것이 참으로 쓸데있는 것이다. (1956)

 

공자(孔子)님이 살아서 말씀할 그때에 사람들이 공자님께서 하신 말

씀의 뜻을 알고 따랐는가 하면 그렇지 못했다. 참으로 공자의 신앙 사

상을 그대로 지니고 이어 내려 왔다면 세상의 나라 다스리는 일은 문

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송(宋)나라 때 와서 유교의 사상 체계를 고쳐

세웠는데 이것이 그대로 이어 내려 왔다면 동양의 역사가 지금보다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문제의 손바닥 하나 들여다 볼 줄 모르고 지내온

것이 오늘의 유교를 만들어 버렀다. (1956)

 

물에 용이 뛰듯이 참말 속에는 참뜻이 튀어 오른다. 영원히 사는 것

은 참(하느님)뜻뿐이다. 하느님의 뜻은 시작도 마침도 없이 영원하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인 참뜻만은 지니고 가야 한다. 하느님의 뜻인 참뜻

이 나의 본체인 참나(얼나)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하느님의 뜻이 담긴

참말이 곧 영원한 생명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하

나가 되어 영원한 참뜻을 이루어 간다. 뜻이 참이요 참이 뜻이다. 하느

님의 뜻이 내 참뜻이다. 하느님의 뜻이 참된 것처럼 내 뜻도 참되게 해

야 한다. 하느님 뜻의 영원을 믿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사람에게는 바쁜 것이 없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

아날 구멍이 있다.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유유하다. 그

래서 생각도 유유하고 노래도 유유하다. (1957)

 

말씀 살음(사룀)이 영생이다. 육체가 숨이 막히면 죽듯이 정신은 말

이 막히면 죽는다. 말대답을 못하면 정신은 죽는다. 하느님의 말씀 살

음 이것이 영생이다. 마치 비가 와서 샘이 솟듯이 말씀 살음이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1959)

 

[주] 나의 생각을 하느님의 성령으로 불사르는 것을 기도로 생각했다.

그때 하느님의 뜻을 얻는 것을 말씀 살음(사룀)이라고 했다.

산스크리트어 야즈나(yajna)이다.

 

나는 '모름지기'란 우리말을 좋아한다. '모름지기'란 반드시 또는 꼭

이란 뜻이다. 사람은 모름(하느님)을 꼭 지켜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를 모른다. 하느님 아버지를 다 알겠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아

들이 아무리 위대해도 아버지와는 차원(次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러나사람이 하느님 아버지를 그리워함은 막을 길이 없다. 그것은 아버

지와 아들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면서 하나이다.

부자불이(父子不二) 이것이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것이다. 맨 으

뜸으로 진리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그리워함은 어쩔 수 없는 인간성

(人間性)이다. 그것이 사람의 참뜻(誠意)이다. 그런데 이 뜻은 꼭 이루

어진다. 그것이 성의(誠意)다. 생각은 그리움에서 나온다. 그립고 그리

워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1957)

 

'더욱'이란 더 우로 들어올린다는 뜻이다. 욱은 우로 올라간다는 것

을 강조해서 'ㄱ'을 받침으로 붙였다. 그러므로 더욱은 더 우로이다.

삶은 정신적으로 더욱더욱 하느님 아버지께로 나아가야 한다. (1957)

 

말씀이 곧 하느님이다. 우리의 몸생명은 목숨인데 얼생명인 말숨(말

씀)과 바꾸어 놓을수 있다. 공자(孔子)를 논어와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에게 생각과 말씀이 끊이지 않는 것은 누에가

실을 뽑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숨이 말숨(말씀) 속에 번데기가 되어 들

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사는 삶이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된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이다. 실을 다 뽑고는 죽어야 한다.

죽지 않으려는 미련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 생각의 실, 말씀의 실을 뽑

아 생각의 집, 말씀의 집, 사상의 집을 지어야 한다. 그것은 내가 가서

있을 집을 마련하는 것이다. 내가 가서 있을 집을지어놓는 것이 이 세

상에서의 삶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은 거저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씀의 집을 지으러

왔다. 생각하여 말씀의 실을 뽑아 누에가 고치집을 짓듯 말씀의 집을

지어야 한다.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그리고 나는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

하러 간다"(요한 14:1~2)고 했으나 가서 지어놓는 것이 아니라 벌써

지어 놓았다. (1957)

 

말이 타락하면 사람의 권위는 자꾸 땅에 떨어진다. 우리가 쓰는 말

과 글이 존경을 받아야 한다. 말과 글이 쓰레기통에 떨어짐은 자기의

정신을 쓰레기통에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사람의 권위는 말의

권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 번 하려면 좋은 말 높은 말을 고르

고 골라서 해야 한다. 옛말에 수사입기성(修辭立其誠-주역)이라

했다. 수사(修諦)란 말을 고른다는 뜻이다. 말이란 우리 정신의 양식인

데 아무것이나 먹을 수 있는가? 좋은 말 좋은 글(책)을 고르고 골라서

먹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물 한 모금 마시려고 해도 고르고 고르

는데 하물며 말씀을 사르려면 얼마나 고르고 또 골라야 할지 알 수 없

다. 수사를(修辭) 해야 참말을 할 수 있다. 그것이 입기성(立其誠)이

다. (1957)

 

참말을 한 뒤에야 인격이 생기지 거짓말을 하면서 무슨 인격이겠는

가? 개인도 그렇거든 나라야 말해 무엇하랴? 나라가 참말을 해야 나라

가 서지 거짓말을 하는 나라가 무슨 나라인가?(1957)

 

말은 한 번 하면 천 리(千里)를 간다. 쏟아진 물을 다시 담을 수 없

듯이 한 번 실언(失言)을 하면 회복하기 참 어렵다. 천 리를 가 버린

말을 누가 찾아올 수 있겠는가. 함부로 남의 말을 해도 안 되고 모르는

걸 말해도 안 된다. 더욱이 남의 인신(人身)에 관한 말을 함부로 해서

는 안 된다. 말씀을 삼가자. 말씀을 고르자. 말씀을 닦자.(1957)

 

우리가 정신을 닦는다는 것은 말씀을 닦는 것이다. 생각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말씀을 닦는 것이다. 몸을 닦듯이 말을 닦아야 한다.

말(言語)은 소리 없이는 할 수 없다. 소리는 숨기운이 목구멍을 통해

서 나오면서 대기(大氣)를 진동시켜서 소리가 나게 된다. 대기의 이동

은 바람이고 진동이 소리인 말이다. 사람들은 말을 자꾸 하고 자꾸 듣

겠다고 한다. 그 까닭은 밤낮으로 말을 해야 별 것 없고 시원한 게 없

는데도 말에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성현(聖賢)들은 다른 이가 아니라

소망이 담긴 진리의 말씀을 하다 간 것이다. (1957)

 

그리스(희랍) 말 도크사를 영광(榮光)이라고 옮겼는데 잘못

된 것 같다. 빛(光)이란 뜻은 없고 훌륭하다 뚜렷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주역(周易) 건(乾)괘에 나오는 천행건(天行健)의 건(健)은 사람

으로 일어서자는 뜻인데 사람이 턱 일어설 때 그 존재가 뚜렷한 것이

다. 평안 강(康)자와 같이 써서 건강이라고 하는데 건강함이야말로 뚜

렷한 것이다. 건강하지 않으면 뚜렷할 수가 없다. 풍전등화(風前燈火)

는 뚜렷한 것이 아니라 위기에 놓인 것이다. 우리는 뚜렷하게 살며 뚜

렸하게 죽자는 것이다.

   주역에 군자(君子)는 천행건(天行健)해야 한다는 뜻은 줄곧 하느님

께로 나아가는 뚜렷함을 가지고 살자는 것이다. 하느님께로 뚜렷이 나

아가는 이라야 맘과 몸이 성하여 병이 없다. 공자도 하느님께 가기를

뚜렷하게 하면 지성(至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하느님 아

버지와 나와의 관계를 알면 아들이 하느님 아버지를 뚜렷하게 하고, 아

들은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뚜렷하게 솟아날 수 있다. 이렇게 하려고

뚜렷(健)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라는 것은 어찌 되었든 로케트와 같아 한 번 나오면 도로 들어갈

수 없다. 이왕 나온 바에는 자꾸 나아가게 되어 있다. 하느님 아버지가

계시는 저 위로 자꾸 올라가자는 것이다. (1957)

 

사람이 말씀을 믿지 않으면 마침내 손 잡고 입 맞추고 얼싸안던 것

(배우자)을 마지막에 거두어 씻어 널 속에 넣어 땅 속으로 던진단 말

인가. 이렇게 세운 오리목 광목에 글윌 몇 자 썼다가 불사르면 재 한

줌이 남는다. 이게 무슨 노릇이냐? 인생에서 진리의 말씀을 빼면 재

한 줌밖에 될 것이 없다. 결국 참 사는 길은 영원한 말씀뿐이다(1957)

 

各 우리의 몸도 하느님이 먹여 주시고 길러 주시기 때문에 있는 것뿐이

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다. 어떤 작품인가 하면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대로 선한 삶을 살도록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작품이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다 우리가 밥 먹

고 거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숙하여 밥이 될 수 있

도록 태초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하느님의 밥이 되는 것

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 인생뿐만 아니라 일체가 하느님에게 바쳐지기

위한 제물이다. 일체가 하느님께 바쳐질 밥이란 말이다. 특히 인생이란

밥을 통해 우주와 인생이 얻는 영양은 무엇일까?그것은 말씀이다. 인

생이란 밥에는 말씀이 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성령의 말씀이

있다. 온 인류를 살리는 우주의 힘이 되는 성령의 말씀이 있다.

   인생은 짐승처럼 자기의 육체를 바치는 밥이 아니다. 인생은 밥을 먹

고 육체를 기르고 이 몸속에 다시 성령의 말씀이 영글어 정신적인 빕

인 말씀을 내놓을 수 있는 존재다. 사람이 하느님의 제물이 되는 것은

육체적인 제물이 아니다. 영(靈)적인 제물이다. 사람이 제물이 되는 것

은 말씀이지 목숨이 아니다 말씀이 속알이요 목숨은 껍질에 지나지 및

는다. (1957)

 

영원한 님(하느님)을 그리는 글이 바른 글이다. 영원한 님을 그리지

않는 글은 몽땅 그른 글이다. (1957)

 

마음이 평안하면 바른 말을 할 수 있다. 바른 말을 할 수 없으면 마

음이 평안치 않다. 몸은 곧 죽을 것같이 보여도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은 마음이 평안한 사람이다. 참으로

평안한 것은 자꾸 애씨 참말만 하고 싶어하고 거짓말하는 것을 모르는

그 지경에 가면 참에 들어가는 것이다. 비들어진 마음처럼 불안한 것은

없다. (1957)

 

다른 것은 떨쳐 버릴 마음이 있어도 숨만큼은 꼭 붙들고 가려고 한

다. 숨을 못 쉰다고 하면 아주 그만두라는 것 같아서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 쉬어라 하면 숨을 쉬는 것 같아 좋고 그만 쉬어라 하면 세상을

그만두라고 하는 것 같아 싫어한다. 숨쉬는 것이 쉬운 것 같아도 이렇

게 어렵다. (1957)

 

하느님은 고요히 사람의 귀를 여시고 마음에 인(印)치듯 교훈하신

다.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막을 길은 없다. 잠 잘 때나

꿈꿀 때나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소리를 들어라. 그것은 사람을 멸망에

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기 위해서다. 하느님 말씀은 공상(空想)이 아니

라 구체적인 진실이다. 하늘에서 비가 와도 그릇에 따라 받는 물이 다

르듯이 사람의 마음 그릇에 따라 하느님 소리를 듣는 내용이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에 가득 찬 하느님 말씀은 하나이다. 하느님 말씀

에 공손히 좇아야 한다. (1957)

 

사람이 날마다 새롭고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제나(自我)가 죽어 하느

님의 얼로 눈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입이 뚫리고, 마음이 들리고, 알

음알이(知)가 뚫려야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인 얼나가 엉큼엉큼 성큼성

큼 자라게 된다. 그리하여 나는 언제나 코에 숨이 통하고 귀에 말이 통

하고 마음에 생각이 통하고 얼나에 하느님의 뜻이 통하는 삶을 생명이

라고 한다. 생명은 형이하의 생명이나, 형이상의 생명이나 통해야 살고

막히면 죽는다. (1957)

 

말숨(말씀)은 숨의 마지막이요 죽음 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말

숨 슁은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말숨을 생각하는 것은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요 말숨이 곧 하느님이기도 하다. 말숨을 쉬는 것이 하느

님을 믿는 것이요 하느님으로 사는 것이다. 말숨은 우리 맘속에서 타는

참(얼)의 불이다. 맘속에서 장작처럼 쓰여지는 것이 말숨이다. 암속에

서 태워지는 장작(가스) 그것이 말숨(말씀)이다. 참(얼)이란 맘속에 쓰

여지는 것이다. 중용(中庸)이란 우리 맘속에 쓰여진다는 말이다.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하느님의 말숨(말씀)이 타고

있다. 그것이 거룩한 생각이다. 사람은 하느님의 말숨이 불타는 성화로

(聖火爐)이다. 이것이 현 존재이다. 하느님의 말숨을 숨쉬지 못하면 사

람이라고 하기 어렵다. (1957)

 

말하는 것은 그림자를 부는 것 같고(言之如吹影) 생각하는 것은 먼

지에다 조각하는 것과 같다. (思之如彫塵)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 것은 그

림자를 후후 부는 것과 같고 하느님의 모습을 그리는 것은 먼지에 무

엇을 조각하는 것과 같다. 자연에서 바람이 불어 먼지가 날릴 때 우리

가 모르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느낄 때가 많다. 성

경에서는 바람을 하느님의 입김이라고 했다. 이 말 많은 세상의 말이라

는 것은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지나가는데 먼지를 어떻게 조금이라도

남겨 볼까 하고 부는 것인지 모르겠다. (1957)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자꾸 지껄이면 누가 말의 존귀함을 알겠는가.

말한다는 것이 기껏 남의 흥이나 보고 실없는 거짓말만 하니 이 얼마

나 참담한 일인가.

   요새 글자나 알고 글귀나 읽고 서책(書冊)을 쓴다는 이들의 짓이 무

엇인가?그들의 글과 말이 도리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젊은이들을

타락하게 만들고 국민정신을 죽이고 있지 않는가? 참된 말(글)에는 깊

은 뜻이 있어 사람이 나아갈 길이 훤하게 보여야 하지 않는가?요사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성령인가 아니면 악마인가를 도무지 알 수가 없

지 않은가. 사람이 살자면 맑은 샘물이 있어야 하듯이 이 세상에는 사

람의 정신을 살릴 참 말이 있어야 한다. (1957)

 

말씀의 임자가 누구인가?하느님의 성령이 말씀의 주인공이다. 마태

오 10장 20절에는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

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라고 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 말하는 이는 하

느님이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말씀하신다. 하느님

의 말씀이 참 말씀이다. "위에서 오신 분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신다. 세

상에서 나온 사람은 세상에 속해 세상 일을 말하고 하늘에서 오신 분

은 모든 사람 위에 계시며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 그러나

아무도 그분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요한 3:31~32) 참말을 듣

는 이가 많아야 나라가 바로 되어 흥하게 된다. (1957)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이르신 말씀이 정직하게 살라는 것이

다. 정직한 길은 예부터 하늘에서 주어진 길로 모든 성현들이 걸어간

길이다. 이 길만이 마음놓고 턱턱 걸어갈 수 있는 길이요 이 길만이 언

제나 머리를 들고 떳떳하게 걸어갈 길이다. 모든 상대(相對)를 툭툭

털어 버리고 오로지 갈 수 있는 길은 곧은 길뿐이다. 이 곧은 길만이

잎체(一切)를 이기는 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맨 꼭대기(元)이다. 말

씀에 우주가 달려 있다. 그래서 태극(太極 하느님)으로 나아가는 이

것이 진리이다(太極之是理)라고 했다. 사람이 진리(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태극(하느님)을 따르는 길이다. 세상을 사랑하면 멸망이지만 진리

를 좇으면 영생이다. (1957)

 

누구를 만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무슨 인사말이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시비가 생긴다. 그렇다고 말이 많으면 또한 시비가 생긴

다. 이 사람은 본래 겉치레 인사 말하기를 싫어한다. 나의 성미로 말할

것 같으면 다른 것은 다 원만하려고 하나 이 인사 하나를 도무지 못한

다. 나의 그 도드라진 성미를 어느 곳에 가서도 볼 수 있다. 이렇게 말

하고 보니 촌사람들이 만나서 인사하는 것보다는 길어진 것 같다. 어쨋

든 겉치레 인사하기는 아주 싫은 것이다. 나로서는 손실로밖에 안 보인

다. (1957)

 

이 말씀을 드릴 때는 내 속으로 생각이 여물어지기를 바라면서 얘기

를 한다. 여러분이나 이 사람이나 생각을 하는데 이 사람이 있거나 말

거나 관계없이 한 가지라도 떠오른 생각이 있게 된다면 우리는 하느님

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만나서 이 사람은 여태껏 여러분과 같이 기도는 하지 않으려

고 한다. 찬송 또한 해본 적이 없다. 하느님의 생각과 일치되는 생각이

꽉 차서 절로 나오는 감동이 찬송이 되어야 하고 그 말이 기도가 되어

야 할 것이다. 참된 생각이 여물어져 하느님과 일치되는 생각을 하게끔

되어야 찬송과 기도가 필요한 것이지 그 밖에는 거짓된 것이라 필요가

없다. 기도와 찬송이 우리가 인사치레하는 것같이 하고 있으니 그것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여 무의미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1957)

 

춥다 덥다, 좋다 나쁘다고 말하는 것을 수작(酬酌)이라고 한다. 인

사에도 "이 더위에 어떻게 지내십니까?" 이 추위에 어떻게 지내십니

까?" 등등 걱정을 아주 많이 하는데 이것은 다 수작이다. 인사치레란

무엇인가 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작을 하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인사를

하는데 세 번씩이나 일기를 들먹이는 수작이 나오면 가라고 한다는 것

이다. 수작은 갚을 수(酬), 따를 작(酌)자를 쓴다. 술을 따라서 주면 받

아서 도로 갚을 줄 알아야 하는데 주고받는 이걸 수작이라 한다. 수작

은 다 소용없는 헛수작인 것이다. 그만큼 따르니까 나도 그만큼 갚겠다

는 것인데 수작의 공평이란 도저히 기하기 어렵다.

   예수는 이르기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

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오 5:46~47)고 했다. 집안끼리라든지 우

리끼리라든지 수작을 하면 무엇하나. 이것은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도

한다. 골육친척이라 해서 좀 봐주고 골육친척이 아니라 해서 불쌍한 백

성을 돌보지 않으면 이 인과(因果) 관계는 영원히 무엇을 결과짓겠는

가?(1957)

 

명심보감(明心寶鑑)에 "한 마디 말이 딱 맞지 않으면 천 가지 말이

쓸데없는 말이다(一言不中千語穴)"라고 했다. 이 말은 누구의 말이라

고 밝히지 않았지만 참으로 하느님의 말씀이라 하겠다. 혈(六)자는 갓

머리(") 밑에 주그리고 앉은 사람을 나타낸 것이다. 집안에 쭈그리고

앉은 이는 소용없다. 쓸데없이 긴 것을 혈장(穴長)이라고 한다. 한 마

디 말을 바로 맞춰야지 그렇지 않으면 쓸데없는 말이다. 이 사람이 70

평생을 살았는데도 그 한 마디를 알 수 없다. (1957)

 

우리가 할 말을 못하는 것처럼 목마른 일은 없다. 오늘의 급선무(急

先務 가장 먼저 해야 할 급한 일)는 지금 이 나라 씨알(民)들의 가장

아픈 곳을 분명하게 말하는 데 있다. 지금 씨알(民)들의 아픈 곳을 말

해야 할 사람은 종교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대부분이 밥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씨알의 아픈 곳을 시원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급선

무가 가족들의 밥에 있으면 안 된다. 가족의 의식주(衣食住)를 걱정하

고 자녀들의 학비를 걱정해서는 나라와 겨레를 사랑할 수 없다. 참으로

나라 사랑을 하려면 내 당대(當代)뿐만 아니라 내 3 4대 후손까지 구

제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1960)

 

우리말에서 내가 가장 긴요하게 생각하는 낱말은 허공인 '빔'과 절

대인 '제계'와 돈오(頓悟)인 가온찍기(「.」)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제계'에서 와서 '제계'로 간다.

저기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 '제계'이다. 많은 말을 가지고 야단할 것

없고 하느님인 '계'자 한 글자면 모든 게 다 있다. 이게 말의 말씨다.

 '계'를 내가 사랑하면 '계'도 나를 사랑한다. '계'는 하느님 아버지 계

신 데, 곧 하늘나라요 하느님이시다. '계'는 절대(絶對)라 상대(相對)

의 모든 것이 그 절대 속에 들어 있다. 상대는 절대를 벗어나서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계'는 내재(內在)인지 초월(超越)인지 모르는 그

둘이 합한 것이다. 스승님을 얼마 동안 못 가 뵈어 죄송하다는 생각으

로 스승님을 찾듯 '제계'로 가야 한다. (1960)

 

화두(話頭) 공안(公案)은 똑같은 말이다. 불교에서는 참선하는 데

화두가 있어야 한다. 어떤 말을 붙잡고서 참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만 화두 공안을 가진 게 아니다. 말하는 존재는 다 말머리를 가졌

다. 이 말머리(話頭)를 잘 풀어야 한다. 내 말의 말머리를 듣는 이가

잘 맞추어야 한다. 그리하여 제정신의 영양(營養)은 되도록 잘 받아들

여야 한다. (1960)

 

이 세상에 나온 나가 몸(體)과 살(肉)이라 몸살(病)을 않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삶이 괴롬(苦)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몸나란 몸살을 앓

다가 죽는 것을 뻔히 알면서 몸나의 죽음을 모른 체하는 이게 깨지 못

한 탓이다. 이 세상에 죽기 위해 나온 건데 그걸 뻔히 알면서 죽긴 왜

죽어 하고는 잡아떼지만 그게 말이 되는가?(1960)

 

예수만이 말씀(로고스)으로 된 게 아니다. 개똥조차도 말씀으로 되

었다. 예수도 이르기를 "말씀(하느님의 생명인 얼)은 맨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

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1:2~3)고 했다. 예

수교인의 생리(生理)는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예수만 말씀으로

되었고 우리는 딴 데서 왔다고 생각한다. 이게 겸양인지 뭔지 모르겠

다. 말씀밖에 믿을 게 없다. 믿을 건 우리 몸인데 이건 언제 죽을는지

모른다. 성경에 천지는 멸한다고 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고 했

다. 오직 하느님의 생명인 말씀만이 영원히 간다고 했다. 나는 말씀 밖

에는 아무것도 안 믿는다. 기독교만 말씀(로고스)이 아니다. 불교도 마

찬가지로 말씀이다. 설법(說法)이라 하는데 법(法: 다르마)이란 진리

란 말이다. (1960)

 

(암)은 인도의 성음(聖) '옴'과 같고 히브리(유대) 민족의 아멘

(Amen)과도 그 뜻이 같다. 이 거짓나(相對我)가 저 참나(絶對我)를

긍정하는 소리다. (1960)

 

말귀가 없으면 무얼 배우려는 생각은 그만두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가 귀 있는 자만 들으라고 했다. 하느님은 참(眞理)이라 알듯 하면서

도 모르고 하는 게 오묘한 것이다. (1960)

 

말씀을 하는 하느님을 누가 봤는가?하느님께서 이 마음속에 출장을

보낸 정신(얼나)을 통해서 우에서부터 말씀이 온다. (1960)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검님이라고 했다 단군신화에 나오는 곰도

검님의 뜻이다. 단군이 곰(熊)의 아들이란 하느님의 아들이란 뜻이다.

가락국을 세웠다는 금수로(今首露)왕도 검님의 자손이란 말이다. 우리

가 말하고 듣고 하는 것도 이 속에 있는 검님이 알리니까 그렇지 검님

이 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 (1960)

 

이 사람 말은 어렵다고 한다. 나는 쉽게 이야기할 줄 모른다. 쉽게

하려 해도 안 된다. 쉽게 하지 않는 이유는 이 사람 말은 이 세상에서

는 쓸데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돈 밥, 건강에 대해 말하면 알아듣기

쉬울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오기 전에 있던 말이라야 영원한 말

이다. 성경 불경의 말씀이나 이 사람 말은 사람이 즉을 때나 죽고 난

뒤에 소용되는 말이다. 내 말은 세상에서는 쓸데없는 말이다. (1960)

 

이건 나를 위해 하는 말이다. 내가 죽을 어느 날, 어느 때에 "이 때

문에 내가 왔나이라고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낙제이다.

예수가 이 때문에라고 하든지 누가 하든지 똑같다. 요한 12장 27절에

는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

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

나이다'(개역성경)라고 되어 있는데 '이 때에'보다는 '이 때문에'라고

고쳐야 한다. 십자가의 죽음을 면하고자 기도를 하던 예수가 새로 정신

을 차리고 한 말인 것 같다. 이 때라 했지만 정말 때는 죽을 때다. 우

리는 여기서 죽으려고 왔다. 이 세상을 졸업하러 왔다. 4월 19일(4.19

혁명)에 죽은 아우들도 처음에는 망설였겠지만 벌떡 일어날 때 그들도

이 때문에 내가 왔나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1960)

 

몸나(外物)는 그림자(幻影)일지 모르지만 말씀하는 얼나는 있다.다

른 것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말씀하는 얼나는 있다. 이 말씀도 알

수 없는 그 얼나에서 나온다. 얼나가 있다는 것은 얼나는 참이라고 하

는 말과 같다. (1960)

 

말 듣기처럼 싫은 게 없다. 그러나 우리는 말을 참고 들어야 한다.

우리가 말을 잘못 듣기에 말을 듣고 또 듣지 귀마다 말을 잘 들으면

말도 많지 않을 것이다. 말을 잘 안 들으니 말이 많게 된다. 로고스의

세계라 말을 잘 안 들으니 말이 많게 된다. 인생의 모순이 이런 것이

다. 말이 이 세상을 심판한다. 이게 말의 계시(啓示)다. 참으로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말만은 참으로 들으라고 한 것이다. 구세주가 와

도 우리의 뜻에 맞도록 구세하지 않을 것이다. 붓다(Buddha)가 중생

을 제도한다 해도 우리 뜻에 맞게 제도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은 말

자는 거다. 애초에 최초의 의지가 조금 하다가 말자고 시작한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말자 말자 하려고 나온 거다. 이 세상은 소극적으로

생긴 거지 자꾸 번성해 나가자고 있는 게 아니다. 마침내는 말자고 생

긴 세계이다. 어떤 결과를 보자고 있는 세상이 아니다. 이렇게 늙은이

의 얼굴이 주그러들듯이 이 세상은 말자는 것이다. 그러니 아멘할 수밖

에 없다. (1960)

 

우리는 말만 해서는 되는 게 아니고 그것을 실제로 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박혀 있다. 말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이 입이 하

는 게 아니다. 재판장(하느님이 보내시는 성령)이 하는 일이다. 모든

게 판단하는 것밖에 없다. 말이자 일이고 일이자 말인 것은 판관(判

官)의 일이다. (1960)

 

말을 하는 것은 사람의 귀를 뚫자는 귀뚜리다. 말 안 듣는 이들 말

좀 듣게 하려고 한 거다. 4·19 때 그 아우들은 다 영악한 귀뚜리다.

정도의 차는 있어도 다 귀가 뚫렸다. 오늘도 이 사람이 한 마디라도 참

말을 한다면 그것도 귀뚜리다. (1960)

 

한퇴지 (韓退之)가 소리는 다 불평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무슨 소리든

지 불평에서 시작한다. 물건을 떨어뜨리면 소리가 나는 것은 아프단 말

이다. 말도 이 우주가 불평하니까 편안케 해주려고 하는 뜻이 있어 말

을 하는 거다. 그래서 이 우주가 평안하다면 내 말도 그칠 거다. 이 우

주가 평안치 못하는 한 나도 말을 계속했으면 좋겠다. 내가 지금 죽으

면 말하지 못할 것이 섭섭하다. 누구에게 얘기하고 싶도록 뜻이 충만해

있는 것이 뜻망울이다. 참말을 한 마디 하지 못하면 그게 벙어리이고

참말을 듣지 못하면 그게 귀머거리일 것이다. (1960)

 

당나귀 귀는 말씀(로고스)을 못 듣는다. 우리의 귀는 당나귀 귀와

다르지 않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다. 하느님 아들인 참나(얼나)

의 귀는 말씀을 듣는 귀다. 귀 있는 자의 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의 귀를 말한다. 하느님의 아들이란 하느님이 보내신 성령으로 얼

나이다. 얼나인 참나는 우로부터 온 빛이란 자각(自覺)을 가진 이요

우로 올라갈 뜻을 받아 가진 이다. (1960)

 

이 세상의 대부분의 일은 짐승(몸나)을 먹이고 양(자녀, kid)을 치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일은 모든 것이 있다 없어지는 꿈

속에서의 일이다. 양을 칠 때 하는 일은 그때만 필요하지 그건 그만둘

거다. 영원히 갈 것은 하느님의 말씀만이 있다. 오직 하느님 아버지 뜻

하나밖에 없다. 하느님이신 것도 하느님의 아들되신 것도 뜻이다. 영원

히 갈 말씀은 이 혀로 하는 말이 아니다. 입을 꽉 다물고 있어도 하느

님의 뜻만 있으면 영원히 갈 말씀이다. (1960)

 

사람에게는 이상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말을 가졌다는 게 가장 이상

하다. 성경에는 천지만물도 말씀으로 지었다고 하고 말씀만이 남는다

고 했다. 말 가운데 으뜸가는 말이 말의 말씨(말씀)다. 한마디로 말해

서 말로는 평생 동안 갈 말은 없는데 사람들은 좌우명(座右銘)이라 하

여 그것을 찾는다. 나의 간단한 말로는 '제계'가 있는데 저기 거기의

뜻으로 '제계'이다. 불교에서 피안(彼岸, paramitta 니르바나)이란 뜻

이다. 곧 하느님 또는 하느님 나라(절대세계)를 말한다. '제계'로 가자

는 것이 예수 석가의 사상이다. (1960)

 

말이 다 쓸데없다. 들을 줄 알아야 한다. 귓구멍이 바로 뚫리지 않으

면 보살이나 천사가 아니라 하느님이 말해도 소용이 없다. 저도 사람이

니까 바로 들을 수도 있긴 하지만 자꾸 욕심이 그걸 막는다. (1961)

 

말씀밖에 믿을 게 없다. 말씀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성령)

이다. 태초의 말씀 그것이 아들이다. 예수의 생명(얼나)이 태초의 말씀

이다. (1960)

 

모든 말은 천천히 씹어보아야 한다. 급히 삼키지 말아야 한다. 천천

히 꼭꼭 씹어보면 저 멀리 있는 게 여기도 있다. 곧 성경에 있는 게 여

기 유교에도 있다. 모든 진리라는 게 모두 다르면 어떻게 하나? 진리

는 하나다. 진리는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1961)

 

말은 어쨋든 적게 해야 한다. 나도 심심해서 심심파적으로 하는 수

가 있다. 자기에게나 남에게나 방해가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말이라도

제가 좋아서 한 것은 곧 자기 쾌락을 위해서 한 것이라면 음란한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1960)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다. 참 말씀이 말씀이다. 금세기(20세기)에

 '맨 처음(太初)의 말씀'이 몇 마디나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지 모르

겠다. (1960)

 

우리 눈앞에 영원한 생명줄이 아버지 하느님 계시는 위로부터 끓어

지지 않고 드리워져 있다. 영원한 그리스도란 한 숨이요, 얼숨이다. 한

말씀줄(sutra)이다. 불연속의 연속이란 말이 있지만 얼생명이란 불연속

의 연속이다. 생명은 끊어지면서 줄곧 이어가는 것이다. 오래 살려면

말씀줄을 자꾸 물려줘야 한다. 실이란 곧 말씀이다. 목숨줄로 나온 실

이 말씀이다. 나는 다른 아무것도 믿지 않고 말씀만 믿는다. 여러 성현

(聖賢)들이 수천 년 뒤에도썩지 않는 말씀을 남겨 놓은 걸 씹어 봐요.

이렇게 말하면 종교통일론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통일은 싫다. 통

일은 되는 게 아니다. 귀일(歸一)이라야 한다. (1960)

 

말이란 불완전한 것이다. 정말 온전한 데 비하면 이 말이란 건 벙어

리 손짓과 같다. 혀로 제법 놀리니까 분명한 것 같지만 그런 게 아니

다. 어림없다. 동양의 성(誠)은 말씀이다. 말씀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

졌고 말씀은 영원한 것이다. (1960)

 

명 (命)이란 말씀이다. 우리가 날 때 '살아라' 라고 한 번만 명령을 받

는 게 아니라 순간 순간 숨쉴 때마다 하느님께서 명령을 하시는지 누

가 알아?순간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시계 밥 주듯이 우리 목숨을

돌려주는지 누가 아는가? 우리의 목숨 돌아가게 하는 게 말씀이

다. (1960)

 

                     출처:다석 류영모 어록(박영호 엮음 두레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