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뜻하였으나 못 이뤄 意欲未遂

  (속알) 밝히려는데 밝히지 못해 새벽에 맘 살펴        欲明未明晨省心

  (천하를) 안정케 하려 해도 시대마다 안정되지 못해    欲定未定每時局

  평안코자 해도 평안치 못함이 지금의 세상 사람        欲平未平當世人

  화평코자 해도 화평치 못해 하늘나라 오기 바라        欲和未和臨天國

                                                      (1957.1.14)

 

    意慾(의욕):하고자 함. 遂 :이룰 수. 定: 고요할 정. 時局(시국)

    :시대의 상황 當世(당세) :지금의 세상. 臨 : 임할 임

 

(속알) 밝히려는데 밝히지 못해 새벽에 맘 살펴  欲明未明晨省心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었다. "이 세상에는 절대 진리라는 것은 없다.

절대진리는 하늘 위에 있다. 우리는 이 절대를 좇아 올라가는 것이다.

절대가 아닌 것은 생각하지 말고 땅위의 것은 훌훌 벗어버리고 오직

하나(절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의 님인 하느님을 찾아가는 것이 우

리 사람의 일이다. 절대진리를 위해서는 내버릴 것은 죄다 내버려야

한다." 이 세상에 절대진리가 없다는 것은 이 세상은 캄캄한 어둠의

세상이란 말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명(無明)이라 한다. 이 상대세

계에 갇혀서는 절대진리를 찾을 길이 없다. 그런데 오직 한 길이 있으

니 맘속으로 들어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생각이 하늘나라로 들어가

는 좁은 문이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

하였다.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자기 맘속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맘을 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서 자기의 속알(德)이

밝아지고 자기의 정신이 깨면 아무리 캄캄한 밤중 같은 세상을 걸어

갈지라도 길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다석어록)

마음이 빌 때만 절대존재의 빛(긋)이 우리 맘속에 밝아진다. 마음이

비려면 제나(自我)가 죽어야 한다. 장자가 상아(喪我)니 좌망

(坐忘)이니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상아(喪我)란 제나(自我)가 죽었

다는 뜻이다. 좌망(坐忘)이란 제나(自我)를 잊어버렸다는 뜻이다. 류

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제나(自我)가 한 번 죽어야 맘이 텅 빈다.

 한 번 죽은 맘이 빈탕(太空)의 맘이다. 빈 맘에 하느님 나라, 니르바

나 나라를 그득 채우면 더 부족이 없다."(다석어록) 빈 맘에 들어오

는 하늘나라, 니르바나 나라가 하느님인 절대의 빛이다. 마하트마 간

디는 말하기를 "제나(自我 ego)의 어두움은 암흑 자체보다 더 꿰뚫

어보기 힘들다. 제 속에 하느님의 빛(얼나)을 가진 이는 그것으로 영

원한 생명이 된다"(The darkness of egoism is more impenetrable than

darkness itself.He who has the spark of Divine in him becomes

immorter on that account M.K.간디, 『날마다의 명상』)라고

하였다. 마하트마 간디가 말한 하느님의 빛이, 예수가 말한 맘속의 빛

(마태오 6:23)이고 석가가 말한 맘속의 등불(寂光)이다.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으로는 장자 에크하르트 타고르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사람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거듭난 체험

을 한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영원한 생명인 얼을 빛이

라 한다. 얼 자체를 어떻게 표현할 수 없으니까, 설명이 안 되니까 좀

근사한 표현을 쓴다는 것이 빛이라고 한 것이다. 얼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이 빛은 햇빛이 아니고 참 빛이다. 햇빛을 떨쳐 버려야 참 빛인

얼나를 깨닫는다."(다석어록) 그런데 류영모는 속알 밝히고자 하는데

도 밝혀지지 않아 새벽에 맘을 살핀다고 하였다. 새벽에 명상기도를

한다는 말이다. 류영모는 얼나를 깨달은 이다. 겸손한 마음에서 그렇

게 썼다. 새벽은 하루 가운데 정신 활동이 가장 활발하고 세상이 가장

조용한 때다. "사람이 새벽에는 높은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아

침이 되면 높은 생각을 갖기 어려워진다. 낮에는 낮은 형이하의 몸살림에

빠지기 때문이다.우리는 낮은 이땅을 떠나 영원한 절

대로 올라야 한다. 맨 꼭대기 절대로 가는 거다. 참 자리로 가

는 것은 된 그대로 가지고 가는 거다. 새로 무엇이 되는 게 아니다."

(다석어록)

 

 (천하를) 안정케 하려 해도 시대마다 안정되지 못해   欲定未定每時局

  이 땅위에는 크고 작은 싸움으로 칼부림이나 총질이 그칠 날이 없

다. 공자 맹자가 살던 시대는 특별히 싸움이 심하여 춘추전국시대라

이름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춘추전국시대가 아닌 때가 거의 없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시름없이 일하고, 구경하고 다니지만 땅위에 만들어

놓은 원자탄이 다 터지면 이 지구는 순식간에 용광로가 돼버릴 것이

다. 이러한 가운데 무슨 안정이 있고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는가. 있다

면 참으로 배꼽잡고 웃을 일이다. 석가는 이 세상을 불난 집으로 비유

하였다. 다 낡은 큰 집에 사면에서 한꺼번에 불이 났다. 집주인은 불

이 사면에서 타오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너희들 빨리

나오너라"라고 소리쳤으나 아이들은 아버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장난만 치면서 나오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집주인은 아이들이

장난감을 좋아하는 것을 아는지라 "너희들이 갖고 싶어하던 아주 드

문 장난감이 여기 있는데 너희들이 빨리 와서 갖지 않으면 뒤에 반드

시 후회하리라"고 하였다. 아이들은 장난감이라는 말을 듣고는 불난

집에서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석가는 그 불이 삼독의 불(三毒火)이라

고 하였다. (법화경_ 비유품)

천하(세계)를 안정시키자면 삼독의 불을 꺼야 하는데 그 누구도 끄지

못한다. 예수 석가도 자신의 불만 껐지 세상의 불은 끄지 못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삼독의 불덩어리들이기 때문이다. 6대주에

흩어져 있는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큰 빗자루로 5대양에

쓸어 넣기 전에는 세상에 타오를 삼독의 불을 껐다고 할 수 없다. 그

런데 세상에는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이 나타나 세계평화를 안정

시키겠다며 오히려 삼독의 불길을 더 돋우었다. 제2차세계대전을 일

으킨 자들이 세계평화를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그게 무슨

미친놈의 소리인가.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상대세계에서 몹쓸 삼독(三毒)을 우리로

부터 뽑아내야 한다.삼독은 우리의 원수다.이 삼독이 없으면 이 세상

은 없다.어리석은 치정이 없으면 분명히 이세상은 계속되지 못한다.

이 세상이 계속되는 것은 그 어리석은 치정이 발동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세상을 버릴만한 곳이 없어서 걱정이 아니다."(다석어록)

그러므로 이 땅위에서 공산주의 유토피아 같은 이상사회를 만든다는

따위의 말은 듣지도 말아야 한다.내가 할일은 나의 삼독과 싸우면서

신격(神格)의 얼나를 깨달아 줄기차게 하느님을 찾아 올라가는

것이다.

 

평안코자 해도 평안치 못함이 지금의 세상 사람    欲平未平當世人

일찍이 노자가 이르기를 "내게 큰 걱정이 있는 까닭은 내게

몸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이 없는 데 이른다면 내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노자 13장

)라고 하였다 .이 몸이란 고무풍선 같고 비누거품 같으니 걱정이

안 된다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실존 철학자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나침반의 자침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 흔들림

의 정도에 따라 불안하기도 하고,초조하기도 하고,우울하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고.공포에 떨기도 한다.얼마나 흔들리는 마음으로 괴로

왔으면 차라리 아무런 생각이 없는 돌이 되고, 바위가 되고 싶다고

하였겠는가.류영모는 말하기를 "사람이 언제나 평안한 것을 구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란 것은 평안하지 않은 것이다. 사람만이 평안치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도 이렇게 불평이 있어서 나왔다.

불평하면 맞대거리를 하는 것 같이 소리가 난다. 평안케 해 달라는

소리다. 이것이 기도다. 우주도 역시 불평하여 평화를 구하느라

기도를 하고 있다.

   우리들은 불안을 느끼기 때문에 절대 평안한 것을 구하려고 한다.

 절대 평안한 것은 우리의 본바탕인 본성(얼나)이다.우리가 잊었던

본성(얼나)을 회복해야 한다.우리 아버지(하느님)와 같은 자리,

영원한 자리를 일생을 두고 광복(光復)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일 것이다.

얼마동안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쳐서 자꾸 올라가는 것이다. 이것

이 영원한 부흥이다. 본성(얼나)을 회복하자는 부흥이다"라고 하였다.

하느님과 하나인 얼나를 깨닫기 전에는 마음이 평안을 얻지 못한다.

불안의 근본은 죽음이기 때문이다.죽음을 이기고 죽음을 없애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 뿐이기 때문이다.

 

 화평코자 해도 화평치 못해 하늘나라 오기 바라     欲和未和臨天國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는 걱정하지 말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

어라. (중략)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1.6)라고 하였다. 우리의 마음이

불안한 것은 전체(하느님)를 잃은 개체가 되어서 그렇다. 그러므로 전

체인 하느님께로 돌아가기 전에는 불안을 면할 수 없다. 하느님께로

가는데는 제나(自我)로는 안된다. 제나를 버리고 하느님이 주시는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 그 얼나는 예수의 말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늘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

중용(中庸)에 "기쁨,노여움,슬픔,즐거움이 일기전을 일러서 가온(얼)

이라 한다.

일어나도 모두 가온(얼)의 절제 받음을 일러서 화(和)함이라 한다"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계中節 謂之和 - 중용

1장)라고 하였다. 중용의 표현이 완벽하지 못하지만 희로애락이

미발(未發)인 '중' (中)이란 제나(自我)를 넘은 얼나(靈我)라고 보아야

한다. 희로애락의 제나가 중(中)인 얼나의 제약을 받는 것이 화합이라

는 것이다. 이를 중화(中和)라 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속의 속인 얼나(中)로 감정을 웬만큼

제한해서 중절(中節)해야 한다. 아무 일 없으면 평화스럽다. 이 일을

이루면 천하달도(天下達道)라 하여 세상의 일에 무엇이든지 막히는

데가 없다. 중화(中和)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변(變)이 많다.

중화를 모르면 자기 자신의 건강부터 지탱할 수 없다."(다석어록)

   화평을 바라나 화평하지 못한 것은 하늘나라(얼나)가 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늘나라가 임하지 않은 것은 제나(自我)가 죽지 않았기 때

문이다. 제나를 죽이는 데는 파스칼의 말처럼 "그를 멸망시키기 위해

서는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의 수증기, 한 방울의 물

 도 필요없다." 제나(自我)가 거짓 나인 줄 알면 제나는 스스로 죽는다.

가짜 형사는 가짜임이 드러나면 없어지는 것과 같다. 얼나를 깨달

으면 십자가 위에서 숨져가면서도 마음의 화평을 잃지 않는다. 밖으로

평화의 시대가 온다느니 이상의 나라가 온다느니 하는 것은 믿을 것

이 못 된다. 밖으로 무엇이 온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류영모가 이르기

를 "애당초 무엇이 오리라고 생각함이 잘못이다. 무엇이 오리라고 생

각하는 데서 주의(主義)가 나온다. 예수 재림의 지상천국이니, 미륵불

의 불국정토니 하고 떠든다. 오긴 뭐가 오는가? 진화니 발전이니 하는

데서 속는다. 내 속에서 생명의 말씀이 나와야 한다. 생명의 말씀밖에

는 믿을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