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다 함께 제나의 죽음을 조상하자 大同弔

 

   아직 스스로 제나 버리지 못한 이 있으면                         未有 自致者

   반드시 몸소 제나로는 죽어야 해                                 必也親喪乎

   모진 어려움 겪고도 아직 제나 못 버려                           遭艱猶未致

   반드시 스스로 제나를 죽여야 해                                 必也 自處乎

                                                                     (1959.3.1)

 

   弔 조상할 조. 親 몸소 친. 致 버릴 치. 喪 : 죽을 상. 遭 만

   날 조. 艱 어려울 간 處 : 처치할 처

 

      대나무 장대 끝에서 걸어간다(竿頭進步)는 말이 있다. 이것은 장대

   를 짚고 높이뛰기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석상(石霜) 스님이 이르기를

   "백 자(百尺)의 대나무 장대를 세워놓은 끝에 올라서서 어떻게 걸어

   갈 수 있을 것 같은가." 또 고덕(古德) 스님이 이르기를 "백 자의 대

   나무 장대 끝에 앉았다 할지라도 아직 참됨에 들어서지 못하였다. 백

   자의 대나무 장대 끝에서 걸어가야 온 우주에 가득 찬 전체의 나(얼

   나)가 나타난다."(百尺竿頭須進步 十方世界現全身-무무관 46측)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올라서서 걸어가라는 말은 개체(個體)인 제

   나로는 죽으라는 말이다. 백척간두에서 걸어가면 공중을 나는

   재주가 없는 이상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다. 이 말을 한 때는 비행기

   란 상상도 못 하던 1천 년 전의 일이다. 백척간두에 서서 걸어가는 결

   심으로 제나를 버리라는 말이다. 방하착을 하라는 말이다. 마

   하트마 간디가 이르기를 "죽음 안에 승리가 있다. 나를 버리는 것은

   참된 기쁨이다. 제나가 죽을 때 얼나는 깨어난다"(There is victory in

death.Renunciation is true enjoyment.When the ego dies, the soul

awakes.·M K.간디 『날마다의 명상』)고 하였다. 백척간두에서 떨어져

죽는 것은 개체의 나인 제나이고 온 우주에 가득찬 전체의 나

가 나타나는 것은 얼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랄 일은 모든

사람이 제나로 죽고 얼나로 솟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

서는 제나의 대동조(大同弔)야말로 얼나의 대동축(大同祝)인 것이다.

   고덕이 백척간두에 서서 걸어가라는 말이나 예수가 산에 명하여 여

기서 저기로 옮기라는 말이나 같은 말이다. 불가능에서 가능을 찾으

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멸망의 생명인 제나에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옮기는 일이 백척간두에서 걸어가는 일이요, 산을 들어

옮기는 일과 같다는 말이다. 제나에서 얼나로 옮긴 이는 "사망에서 생

명으로 옮겼다"(요한 5:24)를 이룬 이다.

 

아직 스스로 제나 버리지 못한 이 있으면               未有自致者

     반드시 몸소 제나로는 죽어야 해                        必也親喪乎

   용담지촉(龍潭紙燭)이라는 말이 있다. 선사 용담(龍潭)이 종

이로 만든 초롱이라는 말이다. 중국에는 인문지리상으로 무슨 까닭이

있는지 모르지만 형이하에 강한 공맹(孔孟)이 북쪽 사람이고 형이상

에 강한 노장이 남쪽 사람이다. 불교에서도 북쪽에는 교종이

성한데 반하여 남쪽에는 선종이 성하였다. 북쪽 교종에서

금강경소를 지어 널리 알려진 선사 덕산(德山)이 남

쪽의 선종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였다. 깨달음을 얻는다면서 배움을

소홀히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배우지 않고 깨달을 수도 없지

만 배우기만 한다고 깨달아지는 것은 아니다. 제나를 죽이지 않

고는 얼나를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제나가 진리를 깨닫

는다고 생각하면 평생 수도를 하여도 진리인 참나(眞我)를 깨

닫지 못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지식을 얻어들어 손해볼 것 없다. 그러

니 얻어 두자는 생각으로 집회에 나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는 안 된다. 제 속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깨달아야 한다. 불경, 성경

을 보는 것은 삶을 알아보자 하는데 참고가 되는 것이다. 더도 덜도

아니다. 인생에 대한 하나의 참고서다.나와 불경 성경의 관계가 이러하다.

불경을 열심히 읽는다고 성불이 빨리 되는 것도 아니다. 성경을 외운다고

영원한 생명을 깨닫는 것도 아니다. 불경이니 ,성경이니

하는 것은 맘을 죽이자는 거다. 제나가 한번 죽어야 마음이 텅빈다.

한번 죽은 마음이 빈탕의 마음이다. 빈맘에 하느님나라,니르

바나 나라를 그득 채우면 더 부족이 없다."

   덕산(德山)은 자신이 지은 금강경소를 짊어지고 남쪽으로 찾아갔다.

마침 점심때가 되어 떡 파는 가게에 들렀다. 떡 파는 노파가 덕산이

지고 온 것을 보고 무엇이냐고 물었다. 덕산은 "'내가 지은 금강경소

요"라고 자랑스럽게 대답하였다.노파는 금강경소라는 말에 정색을 하

고는 "스님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면 떡을 공양하겠으나 대답을

못 하면 공양을 못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덕산은 금강경에 대해서

묻는다니 자신이 만만하였다. "금강경에 과거심불가득(過去心不可

得) 미래심불가득(未來心不可得),현재심불가득(現在心不可得)이라

 고 하였는데 스님은 점심(點心)하겠다니 어느 마음에 점찍으

시렵니까?" 그 말에 덕산은 입을 열지 못하였다. 스님도 아닌 떡장사

노파에게 두손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덕산은 그 노파의 지시대

로 용담사에 머물고 있는 용담 숭신(崇信)에게로 갔다.

  그 날 용담을 만난 덕산은 방장(方丈)에서 시간이 흐르는 줄 잊고

얘기를 나누었다. 밤이 늦어서야 덕산은 자기가 잘 처소로 가려고 일

어났다. 문을 열고 나오니 밖은 캄캄하여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

방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러자 용담이 종이로 만든 초롱에 불을 켜

서 덕산에게 건네주었다. 덕산이 초롱을 들고 문 밖으로 나서서 걸어

가려고 발을 떼자 뒤에 섰던 용담이 초롱의 촛불을 불어 꺼버리니 더

캄캄하여졌다. 그때 덕산이 깨달음을 얻고 용담에게 큰절을 하였다.

   촛불은 제나를 상징한다. 캄캄한 흑암은 전체다.

제나의 촛블을 꺼버리고 전체 속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제나의 촛불에 집착한다. 언젠가는 꺼질 불인데 꺼뜨리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전전긍긍 안절부절이다. 우리는 생일날 생일 케이

크에 나이 수만큼 촛불을 켜놓고 불어 끄는 것을 생일 축하의식으로

삼는다. 우리는 생일 케이크에 켜놓은 촛불을 끌 것이 아니라 제나의

촛불을 꺼야한다.이것은 남이 불어서 꺼줄 수도 없다. 오직 자신이

불어서 꺼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제나의 불을 끌 때 대동조(大同弔)

가 아닌 대동축(大同祝)이 될 것이다.

 

모진 어려움 겪고도 아직 제나 못 버려          遭艱猶未致

      반드시 스스로 제나를 죽여야 해        必也自處乎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의 6천 년 역사를 샅샅이 들추며 연구하여 독

특한 사관을 터득했다. 인류 역사의 목적은 신관(神觀)의 향상

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사람은 고난을 통해 진리되시는 하느

님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가 그럴진대 개인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듯한 고난의 삶

을 살아가는 것은 참나인 하느님을 인식하기 위한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란 바로 정신이다.정신이 자라는 것이

생각이다. 정신이 깨어나 피고 정신에 불이 붙어야 한다. 정신은

 거저 깨어나지 않는다. 쓰라린 가난과 고초를 겪은 끝에 가서야 정신

이 깨어난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명이 이 땅위의 몸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자연히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

늘을 바라보게 된다. 이 영원(하느님)에 대한 생각은 어느 성인이나 어

떤 경전이나 다 같다."(다석어록)

   석가가, 6년 동안의 결사적인 고행 없이, 위없는 깨달음을 깨닫는다

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이미 고난 속에 있는 이는 고난을 감사하게

받아들여 깨달음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고난에서 좀 멀리 있는 이는

석가처럼 고난을 끌어당겨서라도 고난을 겪어내야 내 정신이 자랄수

있다. 석가 못지 않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전혀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

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값진 고난을 겪으면서도 생각할 줄 몰랐다.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참선이다. 내가 스스로 생각을 높여 하느님께

로 나아가는 것이 참되게 사는 길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인생문제에 의심이 생길 때 밤

낮으로 생각해도 환히 밝아지지 않을 때가 있다. 아주 답답하고 곤란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참을 찾으려는 마음이 한결같으면 언젠가 제 가

슴속에 밝은 길이 뚫릴 것이다. 우리가 나에 대해서는 의심을 안 한

다. 그런데 이 세상이 괴로울 때면 나를 의심하게 된다. 이렇게 아프

고 '괴로운 이 나라는 게 뭐냐'라는 것이다. 나를 없애버리고 싶어진

다. 그래서 자살도 한다. 나를 의심하다가 이 나라는 것이 참나가 아

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석어록)

   류영모는 반드시 스스로 거짓 나인 제나(自我)를 죽여버려야 한다

고 하였다. 제나를 죽이라고 말했다고 목을 매거나 독약을 먹으라는

것이 아니다.값어치를 인정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이다.제나

가 거짓 나임을 알고 쓸데없는 것임을 알면 이미 제나는 죽은 것이다.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얼)적인 것은 생명을 준

다"(요한 6:63)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이미 제나는 죽고 얼나가 산다.

 류영모가 스스로 제나(自我)를 죽여버려야 한다는 것은 얼나를 선

 택하라는 것이다.그것이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의 바른 말이다.

    친상(親喪)하라. 자처(自處)하라고 하니 끔찍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자신도 스스로 친상하고 자처하였음을 밝혔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나

 결국 나는 그 목숨을 다시 얻게 될 것이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

앗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요한 10:17-l8)

이것이 친상함이요 자처함이다. 얼생명을 얻기 위하여 몸생명을 스스

로 죽이고 버린다는 말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자꾸 나아가는 것이니까 내가 죽

어서 나아진다면 몸뚱이의 자살은 하지 않을지언정 정신적인 자살은

얼마든지 하여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아가는 것이라면 정신의

자살을 하는 그 지경이 복음도 알고 은혜도 부딪쳐 보는 것이 된다.

내가 나를 죽이고 내가 나를 낳아 가는 것이다." (다석어록)

   석가의 가르침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아는 사성제(四聖諦)가 바로

스스로 제나로는 죽으라는 말이다. 괴로운 몸(苦), 모인 맘(集)을 없

애는(滅) 것이 니르바나(하느님)에 이르는 길(道)이란 뜻이다. 탐 ·

친 · 치의 짐승인 제나로 죽지 않고는 진 선 ·미의

하느님 아들로 솟날 수 없다.

   "온 몸뚱이가 허물어지고 약아빠진 제나를 내친다.몸은 떠나고 앎

은 가버리자 하느님께 뚫리어 하나 된다. 이것을 제나 잊음(坐忘)이라

한다. 하느님과 하나되면 이 누리에는 좋아할 것이 없다. 얼나가 되면

몸으로 오래 살 것 없다."(肢體 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

同則無好也 化則無常也 - 『장자』 대종사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