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위로 나 하느님 아들 되어야지         上天子

       아래로 낳아 땅의 아비 되랴          下地父

 

  차마 못 할 태어남이나 하느님 씨를 길러내야           不忍落地仁成育

  옳음 좇아 하느님께 이르러 아들 의를 돌이켜           取義如天宜復之

  아버지와 아들의 바른 길은 옳음에 의한 사랑           父子道理仁由義

  몬과 맘은 땅 하늘로 왔다 간다 (나서 죽어)            物心來往天諸地

                                                               (1959.5.17)

 

  不忍(불인):차마못함 仁 사람인,열매 씨 인 落地(낙지) '세상

  에 태어남. 取義(취의) 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 取:가질 취

  宜 :옳을 의 如 이를 여. 道理(도리) :바른 길. 由 :말미암을

  유 행할 유. 復 : 회복할 복.

 

  예수가 이르기를 "너희는 아래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요한 8:23)라

고 하였다. 예수는 밤에 찾아온 유대인 관원 니고데모에게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한 3:3)

고 말하였다. 여기에서 '위에'와 '새로'는 그리스어로 한 낱말이다.

위란 뜻 아노이다. "몸에서 나온 것은 몸이요, 얼에서 나온 것은

얼이다. 위로(새로)부터 나야 된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요한 3:6-7)  이것으로도 아래서 왔다는 것은 어버이 몸에서 태어난

몸나를 말하고 위에서 왔다는 것은 하느님의 얼에서 태어난 얼나를

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상천자上天子는 하느님얼로 태어난 얼나로 하느님의 아들이 되자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얼로 태어나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하지부(下地父)는 내가 혼인하여 자식 낳아 땅의 아버

지가 되지 말자는 것이다.

 

차마 못 할 태어남이나 하느님 씨를 길러내야        不忍落地仁成育

   낙지(落地)란 새 생명이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땅에 떨어져 태어

났다는 뜻이다. '불인낙지'는 차마 못 할 태어남이란 뜻이다. 어버이가

낳았고 자녀는 태어난 것이다. 세상에는 자식을 못 낳아 걱정이고 자식

 을 낳았다고 기뻐하는데 이 무슨 해괴한 말일까. 사람이 자식을 낳는

일은 분명히 짐승 노릇인 것이다. 짐승 같은 놈이라면 성을 내면서 자

식 낳는 일이 짐승들이 하는 짓임을 모르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멸망의 생명인 몸나에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솟난 사람은 몸생명을

산 생명으로 보지 않는다. 예수는 하느님 아들인 얼나를 깨닫지 못한

사람을 죽은 이로 보았다. 예수가 이르기를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태오 8:22)고 말하였다.

장자도 말하기를 "삶이란 붙은 혹이나 달린 사마귀다.죽음이란 부스럼을

째고 헌데를 짜는 것이다."(生爲附 死爲決?潰癰) 장자 대종사편

그러므로 생각을 하는 참사람들은 두번운다.이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것이

너무도 분통하여 운다.

그리고 또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도 감사하여 운다. 너

무 분통하여 우는 것은 짐승으로 태어나 짐승 노릇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너무 감사하여 우는 것은 이 짐승에게 하느님 아

버지를 생각할 수 있는 지혜(얼)를 주었기 때문이다. 다석사상 연구

모임에 4년째 나오는 불혹의 나이에 이른 이(나효임)가 말하기를 "이

따금 나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을 몹시 비참하게 느낀다. 그러나 때로는

내가 하느님 아버지를 알게 된 것을 매우 행복하게 생각한다. 나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나는 단지 조용히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은 어버이로 해서

이 땅위에 낙지를 당하였지만 자기만은 남(자식)을 낙지                                                                   

시키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왕 낙지한 우리들은 무엇을 꼭해야 할 것인가.하느님의 씨를 길

러야 한다. 하느님의 씨를 기르는 것이 인성육(仁成育)이다. "누구든

지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자기 안에 하느님의 본성(씨)을 지녔으

므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사람이기 때문에

도대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요한1서3:9) 우리 마음속에 보내진

하느님의 얼을 잘 파지(把持)하는 것이 하느님 아들을 성육(成育)시

키는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여기서 몇십 년 사는 것으로 그

치라는 게 아니다. 정죄하여 너는 죽을 것이라 심판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몸이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못쓴다. 위로부

터 난 얼생명을 믿어야 한다. 몸이 죽는다고 멸망이 아니다. 멸망할

게 멸망하고 영원한 생명의 씨는 자란다. 내 맘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

인 하느님 아들을 믿지 않으면 이미 멸망한 것이다. 죽을 몸을 참나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위로부터 난 하느님 아들인 얼나를 알지 못하

면 그게 이미 심판받고, 정죄받고, 멸망한 것이다. 위로부터 거듭날

생각을 안 하고 그것을 모르니까 이미 죽은 것이다. 몸의 숨은 붙어

있지만 벌써 멸망한 것이다."(다석어록)

 

옳음 좇아 하느님께 이르러 아들 의를 돌이켜    取義如天宜復之

   예수가 말하기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

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오 6:33-34)고 하

였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은 탐 진 치의 짐승 성질을 버리고

하느님의 진 선 미를 찾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 아들로서 하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 된다.

(宜)자는 사당 안에 제

물을 쌓아놓고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는 것을 상형한 글자다. 하느님

께 기도(제사)하는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는 것이다.

  취의여천의복지(取義如天宜復之)는 공자(孔子)가 말한 극기복례

라는 말과 뜻이 같다. 옮음을 쫓는 취의(取義)가 제나를 이기

는 극기이다. 의(宜)를 회복한다(宜復)는 말이 복례다.

 제나(自己)로 죽어서 얼나로 솟나는 것이 하느님 아들로서 하

느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돌이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

아들 사이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희망도 생명도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의 얼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바른 길은 옳음에 의한 사랑    父子道理仁由義

   류명모가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은 거의가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

아들을 말한다. 이것을 땅의 아버지와 아들로 새기면 글자로는 안 틀

리지만 류영모의 생각은 아니다.류영모가 예수를 좋아한 것은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들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높은데 계신 완전한 아버지께로 가자는 게 예수의 인생관이라고

생각한다.나도 이러한 인생관을 갖고 싶다.이런점에서 예수와 나와 관계가

있는 것이지 이 밖에는 아무 관계가 없다.이걸 신앙이라 할지 어떨지

예수 믿는다고 할지 어떨지 모른다." 류영모는

예수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충성을 본받고자 하였다. 류영모는 돌아

가기 얼마 전에도 "공자는 하느님 아버지와의 부자유친을

 세우지 못하였는데 예수가 하느님 아버지와 부자유친을 세웠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공자도 하느님을 지성으로 받든 사람임에 틀림없다.

공자는 말하기를 "나를 아는 이는 하느님이시다"(知我者其天乎-논

어 헌문편)라고 하였다.

   류영모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충성은 지극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찾는데 무엇을 바라고 찾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 복종하는 나다. 내

가 이쯤 하면 하느님께서 은혜를 주시겠지,이것이 아니다.하느님을

향하여 무엇을 바라며 믿는 것은 섬기는 것이 안 된다. 죽이든 살리든

이것은 하느님의 하시는 일이고, 죽이든 살리든 간에 하느님을 따라

가는 것이 나의 할일이다.

'살리거나 죽이거나 아버지 맘대로 하십시오' 하는 게 아들의 마음이다."

류영모는 이러한 아들의 충성심을 예수에게서 배운 것이다.

도리(道理)는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진리의 유대(rapport)이다.

그것은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순종의 믿음이

다. 이것이 의(義)에 의한, 하느님에 대한 사랑(仁)이다.

 

몬과 맘은 땅 하늘로 왔다 간다 (나서 죽어)       物心來往天諸地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상대적 존재다. 제나(自아)로는 나서 죽고, 있

다 없어진다는 말이다. 오기는 땅으로 떨어진 것이 가기는 하늘로 돌

아간다지만 그러나 사실은 부질없이 생겼다가 하염없이 꺼진다. 그것

이 상대적 존재인 제나의 숙명이다.그래서 석가가 말하기를 "일체의

유위법(有爲法 상대적 존재)은 꿈이요, 허깨비요, 물거품이요, 그림자

 같은 것이다.이슬 같고 또 번개와도 같은 것이다.마땅히 이와같이

봐야한다"(금강경 32 응화비진품)고 하였다.그러므로 석가는 가지

않고,오지않고 또한 머물지 않는(無去無來亦無住) 절대존재를 찾아

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니르바나이니 니르바나가 하느님이

다. 니르바나가 사람에게 자기의 생명을 준 것이 다르마

  이다. 다르마도 니르바나와 같이 가고 오지 않는 절대생명이다.

   류영모는 이르기를 "佛性인 얼나는 나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니

 다.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몸이 아닌 얼나(다르

마)는 하늘나라(니르바나)에 들어간 것도 나온 것도 아니다. 니르바나

 (하느님)가 보낸 얼은 절대라 없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갈 곳이

없고 올 곳이 없다. 따라서 머무를 곳도 없다"(無去無來亦無住)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오고 가지 않는 것으로 하느님(니르바나), 하느님 아

 들(다르마)과 허공을 들었다.

   몬(物)과 맘(心) 가운데 몬이 상대성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별똥

별처럼 뜻밖에 나타나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 물체다. 그런데 맘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다. 여느 사람들보다 신앙을 가진 사람

들이 더 햇갈리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맘도 상대성이라 나고 죽는다.

   류영모는 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마음은 영원한 것인가 하

면 그렇지 않다. 마음은 생사의 제한을 받는다.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영원성 있는 영혼을 대표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

도 그대로는 안 된다. 벗어버릴 것이 여간 많지 않다. 벗어버릴 것 벗

어버리고 가야 한다. 마음도 멸거(滅去)하여야 한다. 그런 뒤에 즉진

(卽眞)하여야 한다.마음은 없어져 죽어야 빈다.빈맘에 하느님의

얼이 나타난다."

   하느님 아버지와 하느님 아들만이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

명이다.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얼)은 없는 곳이 없기 때문에 오고 가

지 않는다. "예수의 영원한 생명은 그의 몸이 아니고 그의 얼이다. 그

예수의 얼은 지금 우리에게도 보내 주신다. 예수의 얼은 줄곧 우리에

게 보내 주신다. 성령이란 진리요 말씀이다. 성령을 받아서 우리의 생

명을 유지할 수 있다."(다석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