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사랑이 일생순결하게 살지 못할까

                                       人間不可無一生童貞

 빔을 깊이 느끼면 거룩한 부드러움 살에 닿고           深感空膚聖柔觸

때를 깐깐히 이으면 하느님과 사랑의 입맞춤             承時脣神愛情

생각해 말하는 사람은 새나 짐승은 아니라              思議人間非禽獸

바탈 다해 얼 목숨을 돌이켜 순결만을 생각해           盡性復命慕童貞

                                                       (1957.2.23)

 깐깐할 절. 童貞(동정) :이성간의 접촉이 없는 순결. 膚 :살갗 부.

觸 닿을 촉 脣:입술 순. 禽:새 금. 獸:짐승 수. 慕 생각할 모.

 

  류영모는 말하기를 "삶을 가진 이는 영원히 사랑을 추구해 나간다.

그 사람이 올바르게 사느냐 못 사느냐, 이 세상이 제대로 되느냐 안

되느냐는 사랑의 님을 갖느냐 못 갖느냐에 달려 있다. 하느님은 사람

이 맘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님이요, 또 그에 못지 않게 사랑해

주시는 님이다"라고 하였다. 류영모가 이 시를 쓰고 이 말을 한 것은

죽는 해로 가정한 67살 때다. 류영모가 일생동안 하느님만을 사랑하

며 살기로 결심한 것은 22살로 동경에서 유학할 때였다. 이 결심을

하느라 일생에서 가장 심각한 고뇌를 하였다. 그러나 결심만 하였지

뜻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 돌아와 혼인을 하였다.

해혼(解婚)을 하고 금욕생활에 들어간 52살의 믿음만 되었어도 아예

혼인을 안 했을 것이다. 류영모는 장가갈 때의 마음을 이렇게 말하였

다. "소자(小子)가 하느님 아버지를 사모하는데 아버지와 하나되려고

사모한다. 아버지를 닮으려고 그리나 그리는 것이 제 모습을 그리는

것밖에 안 된다. 괴로워하다 못하여 다른 무엇을 그려볼까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옳게 바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방황하

여 동서남북으로 헤맨다. 말 못하는 지경에서 퍽 참고 있다가 '아이,

못 견디겠다. 장가라도 가야 되겠다' 하고 땅의 아버지를 모방해 가정

을 이룬다."

   류영모는 52살에 해혼(解婚)을 하고 금욕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미물색사(味物色事)에

머물지 않으려면 젊어서는 안 되고 늙어서 되는데 늙어도 젊었을 때

부터 미물색사에 몸을 담지 않겠다고 피나는 수행과 고행이 있어야

 한다. 몇십 년 동안 벼르고 별러서 거의 가까운 것이 되지 젊어서는

안 된다. 우선 젊어서는 장가 갈 것이냐, 안 갈 것이냐의 기로에 선

다. 결국 혼인하는데 그러면 한동안은 어떻게 하면 계집 데리고 재미

있게 사나 이렇게 된다. 그러다가 자식이 생기고 자식에게 맘이 쏠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고 그 동안에 늙어버린다."(다석어록)

   류영모는 혼인한 것을 후회하는 말은 자주 하지 않았으나 한번은

이런 말을 하였다. "내가 혼인을 하였는데 이것이 잘못이다. 이 사람

이 이 세상에 와서 그 짓 하지 않았으면 없는 것이다. 인류가 없어지

면 어떡하나 큰 일 날 줄 안다. 사람이 없으면 무슨 걱정인가." 그러

나 여자에게 음욕을 일으키지 않고 살다 간 예수를 보고는 일생 동정

으로 살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인격의 온전함이 능히 독신을 가능

하게 한다.

누구를 의지하거나 기대거나 하는 것이 없고 조건이 없다.거기는 영원한

평화만이 깃들인 영원한 그늘이다.제나가 없는 마음은 남녀를 초월한다.

남녀의 바람이 자고 생각의 호수가 깊으면 그것이 니르바나다.남녀유별

부부유별 해야지 똥과 오줌을  싸 뭉개는 어리석은 짓은 벗어나야 한다.

 

빔을 깊이 느끼면 거룩한 부드러움 살에 닿고   深感空膚聖柔觸

   류영모는 탐 진 치의 수성(獸性)을 쫓는 이성(異性)과의

사랑을 그만두고 진 · 선 · 미(眞善美)의 영성 (靈性)으로 하느님과의

사랑을 하자는 것이다. 사람은 남녀의 피부접촉을 좋아하고 즐기지만

하느님의 몸이라 할 수 있는 허공을 깊이 느낄 때 하느님의 거룩하고

부드러운 살에 닿는 맛에는 비길 수 없다고 하였다. 하느님과의 사랑

은 외설도 음란도 아니고 거룩함을 입음이다. 류영모가 빔(허공)을 깊

이 느끼기를 "허공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 허공밖에 없는 이 세계

에 얼나(靈我)는 허공의 아들이다. 절대의 아들이다.절대의 아들인

얼나가 참나인 것을 깨닫고 요망한 몸나에 대한 애착이 가셔지는가가

문제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올라간다. 그때가 되

면 하나인 허공이 얼나를 차지할 것이고, 허공을 차지한 얼나가 될 것

이다. 이러면 얼나의 아침은 분명히 밝아을 것이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때를 깐깐히 이으면 하느님과 사랑의 입맞춤   承時脣神愛情

   시간을 깐깐히 이어간다는 것은 한석봉 어머니가 가래떡을 썰듯이

시간을 쪼개어 쓴다는 말이다. 시간의 순간 순간을 그저 넘기지 않는

다는 말이다. 순간 순간에 하느님을 만난다는 뜻이다. 류영모는 이렇

게 말하였다 "한 찰나에도 영원의 살림을 살 수 있다. 이 찰나에 영

원한 생명(하느님)을 느끼지 못하면 그 사람에겐 영원한 생명이 없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은 4차원이라고 했는데 시간을 알면 천명(天命)을

알 것이다. 시자명야(時者命也)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순간에 하느님

과의 만남을 하느님과의 입맞춤이라고 하였다. 하느님과의 입맞춤의

순간이 돈오의 찰나인 것이다. 류영모가 산 날수를 셈한 것도

이러한 뜻에서였다.

   류영모는 허공을 명상하면서 하느님과 살 닿음을 느꼈다. 시간을 직

시(直視)하면서 하느님과의 입맞춤을 느꼈다. 이쯤 돼야 하느님 아버

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평생을 시간 ·공간 속에서 지내면서

도 시간 ·공간이 하느님인 것을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미련하다고 아

니할 수 없다. 인간들을 포함하여 모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내용이요

부속이라 하느님 한 분만이 존재한다. 하느님의 주권과 영역을 떠나

서 있는 것은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산다는

것은 어이없는 일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우리가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육체적 생명으로 살기 때문이

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삶은 짐승살이와 같다"(M.K.간디, 『날

마다의 명상』)라고 하였다

하느님이 참나인 것을 알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 났는데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알지 못하고 짐승처럼 몸 삶에만 골몰하는 것보다 더 슬픈일이

없을 것이다.류영모른 이르기를 "사람들이 정말

모른다고 하는 하느님에 대한 영원성과 연결되어 하느님을 사랑하라.

하느님이 무엇인지 모르는 일은 끝내야 한다. 하느님과 사랑을 하여

야 하지 않겠는가. 이 사랑의 정신이 나와야 참으로 하느님의 뜻이 진

리의 불꽃, 말씀의 불꽃이 되어 살리어 나온다. 생각의 불꽃밖에 없

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생각해 말하는 사람은 새나 짐승은 아니라  思議人間非禽獸

  사의(思識)란 생각하여 옳은 말을 한다는 뜻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큰 성령이신 하느님이 계셔서 깊은 생각을 내 마음속에 들

게 하여 주신다. 말은 사람에게 한다. 사람과 상관하지 않으면 말은

필요 없게 된다. 따라서 사는 까닭에 말이 나오게 된다. 생각이 말씀

으로 나온다. 참으로 믿으면 말씀이 나온다. 말은 하늘 마루 꼭대기에

있는 말이다. 우리는 그 말을 받아서 씀으로 하느님을 안다. 그렇게

말을 받아서 쓴다고 말씀이다.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아서 써야 한

다. 하느님과 교통이 끊어지면 생각이 결딴나서 그릇된 말을 생각하

게 된다."(『다석어록』)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 사람은 새나 짐승이 아니

다. 그러나 하느님도 모르고 하느님의 말씀도 못 하면 새나 짐승에 지

나지 않는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하는 이는 탐 ·

진 치의 짐승성질을 버렸기 때문에 비록 몸을 지녔으나 짐승이 아닌

하느님의 아들인 것이다.그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이가 예수 석가다.

 

바탈 다해 얼 목숨을 돌이켜 순결만을 생각해  盡性復命慕童貞

이 사람이 바탈과 바탕을 가리지 못할 때 스승 류영모가 가르쳐 주

기를 바탈은 성(性)이고 바탕은 질(質)이라고 하였다. 바탈(性)은 하

느님으로부터 얼을 받아서 한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류영모처럼 바탈

을 말하기 좋아한 이로는 맹자가 있다. 맹자는 "바탈을 알면 하느님을

안다"(知其性則知天矣)고 하였다. 성(性)과 얼(靈)이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진성(盡性)이란 얼나를 받들기에 맘을 다하는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은 자기의 바탈(性)을 살려낼 때

자기를 느끼게 된다. 자기의 개성(個性)이 자랄수록 오늘보다 내일 더

깊은 바탈을 느끼게 된다.자기를 더 깊이 느끼게 될수록 더 깊이 자

기 바탈을 찾아서 자기 바탈을 타고 가게 된다.생각은 우리의 바탈이

다. 생각을 통해서 깨달음이라는 하늘에 다다른다.생각처럼 감사한

것은 없다.생각이라는 바탈을 태우려면 마음이 놓여야 하고 마음이

놓이려면 몸이 성해야 한다.바탈은 생각이 밑천이 되어 자기의 정신을

불사르는 예술의 세계다."

   복명(復命)은 몸 목숨에서 얼 목숨으로 돌이키는 것이다. 물 속에서

아가미로 물을 숨쉬던 생물들이 땅위로 올라와서 허파로 공기를 숨쉰

다. 이처럼 우리는 다시 한 번 비약하여 생각으로 하느님의 얼(성령)

을 숨쉬게 되어야 한다. 얼숨을 쉬는 얼나는 하느님 아들로 영원한 생

명이다.류영모는 이르기를 "얼숨(말숨)은 콧숨의 마지막이요 죽음뒤의

삶이라고 할수 있다.

얼숨 쉼은 영원을 사는 것이다. 얼숨을 생각

하는 것은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다. 얼숨이 곧 하느님이기도 하다. 얼

숨 쉬는 것이 하느님을 믿는 것이요, 하느님을 사는 것이다. 얼숨은

우리 맘속에 타는 참의 불꽃이다.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하느님의 얼숨을 숨쉬지 못하면 사람이라고 하기 어렵다"

라고 하였다.

   모동정(慕童貞)은 순결하게 사는 동정을 그린다는 뜻이다. 예수

석가는 동정의 성인이다. 예수 석가를 사모하는 것이 류영모의 삶이

었다. 그리하여 스스로도 늦었지만 순결의 동정을 생각하면서 살았다.

마하트마 간디는 브라마차라를 늘 생각하였다. 브라

마차라를 생각하는 것이 모동정(慕童貞)인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람의 몸은 분명 짐승인데 짐승의 생각을 하지 않음이 얼

사람으로 솟나는 우리의 길이다.이 틀(身) 쓴 것을 벗어버리기 전에

는 못난 거다. 죽기 전에 이미 짐승의 나는 없어져야 한다.송장이되

어 드러눕는 거다." (다석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