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깊음(죽음)에 막다르고 얇음을 밟다 臨深履薄

 

삶이란 때의 긋(끝)에 맞물려 가는 것                生也臨時刻點之

때란 죽음 바다 기슭에 금을 그어 가는 것            時也死海岸線之

얇기는 살아 있는 때보다얇은 게 없고                薄莫薄於存時刻

깊기는 죽음 바다 구렁보다 깊은 게 없어             深莫深於亡海壑

                                                   (1956.12.8)

 

  臨 : 임할 임. 薄 : 얇을 박. 存 :살 존. 亡 :죽을 망 之 :갈 지.

  壑 :구렁 학. 刻 '시각 각.

 

  임심이박(臨深履薄)이란 말은 시경에서 따온 말이다. "깊은 연못에

막다른 것 같이, 얇은 얼음을 밟은 것처럼"(如臨深淵 如履薄氷-『시

경』소아편)을 줄인 것이다. 이렇게 옛글을 고쳐 쓰는 것이 온고지신

(溫故知新)의 한 방법이다.

  모든 사람은 임심이박(臨深履薄)의 참혹한 처지에 놓여 있다. 깊은

죽음에 다다르고 얇은 삶을 밟고 있다.그런데도 가정이라는 안대와

사회라는 수건으로 자신의 두눈을 가리고는 임심이박의 현 상황을

모른체 한다.톨스토이는 임심이박의 참혹한 상황을 50살이 되

어서야 알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의 생활은 정지(停止)하고 말았다. 이제까지 희망을 가지고 살아

온 것은 스스로를 속인 것이었다. 바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나는 그 즉시로 알게 되었다. 악착스

럽게 인생의 길을 살아 온 끝에 절벽에 도달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 앞에 멸망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제는 전

멸 외에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사실을 보지 않기 위해서 눈을 가릴

수도 없었다."(톨스토이, 『참회록』) 톨스토이는 참회록 끝에 이르기를

저 아래(下界)의 심연(深淵)은 나를 무섭게 하지만 저 위 하늘의 무

한은 나를 끌어당겨 평안케 한다고 하였다. 지구가 도는데 위아래가

있을 리 없다. 아래란 제나(自我)가 느낀 심연(죽음 너머의 신비)이고

저 위란 얼나(靈我)가 느낀 영원(하느님 아버지)을 말한다.

   석가는 사람의 수명이 너무나 짧은 것을 나타내고자 "눈 한번 깜작

할 동안에 4백 번 났다 없어졌다 한다"(대반열반경)라고 하였다. 영원

무궁한 시간에서 보면 인류의 6천 년 역사도 눈 한번 깜빡하는 사이에

지나지 않는다. 6천 년이라 해도 2백 세대밖에 안 된다. 2백 세대는 2

백 번 나고 죽었다는 것이다. 석가의 말이 허황된 거짓말이 아니다.

   석가는 임심이박(臨深履薄)인 사람의 수명이 무상한데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선 남자여, 지혜 있는 사람이 세상이 즐거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닦고는 다음에 죽는다는 생각을 닦되, 이 목숨이 한량없는 원

수에게 둘러싸여서 잠깐잠깐 줄어지고 늘어나지 못함이 마치 산 계곡

에 홍수가 머물러 있지 못함 같고, 아침이슬이 오래 가지 못함 같고,

사형수가 교수대에 나아감이 걸음마다 죽음에 가까워지듯 하며 소나

양을 끌고 도살장으로 나아가는 듯하다.선남자여 지혜있는

이는 또 관찰하기를 내가 지금 출가하여 수명이 이레 낮 이레 밤이 된다

하여도 나는 그동안에 부지런히 도를 닦고 계율을 지키고 법(진리)을

말하여 중생을 가르쳐 도우리라 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지혜있는이가

죽는다는 생각을 닦는다 하느니라.설사 엿새 닷새 나흘 사

흘 이틀 하루 한시간 한호흡 동안만이라도 마찬가지다." (대반열반경)

 

삶이란 때의 긋(끝)에 맞물려 가는 것  生也臨時刻點之

   시간은 영원한데 우리는 시간을 순간 순간으로 느낀다. 순간은 한

점이다. 그래서 삶이란 때의 한점 한점을 지나쳐 가는 것이 된다. 류

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순간 순간 지나쳐 간다. 도대체 머

무르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미래와 영원한 과거 사이에 '이제

여기'라는 것이 접촉하고 있을 뿐이다. 지나가는 그 한 점 그것이 이

제 여기인 것이다. 그 한 점이 영원이라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이

렇게 보면 산다는 것은 이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것

은 몰라도 '나는 이제 여기에 있다'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발견이라

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아무리 넓은 세상이라도 여기이고 아무리 오

 랜 세상이라도 이제이다. 가온찍기이다. 이 긋(點)이 나가는 것의 원

점이며 나라는 것의 원점이다. 이제는 참 신비다. 우리가 알 수 있을

것 같은 신비가 이제다. 우리 인생은 이제에 목숨을 태운다. 이 찰나

에 아흔 번의 생사(生死)가 있다는 인도 사상은 분명히 신비사상이다.

  '이'라 할 때 이제는 이른(至) 것이다. '이'라고 할 때 실상은 이미

과거가 된다.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는 것이 이제다. 이 이제를 타

고 가는 목숨이다. '이'의 계속이 영원이다."(『다석어록』)

   오랫동안 영원한 생명줄을 잡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헤매다가 천명

(天命)을 안다는 나이에 이르러 다석사상을 접하게 된 이(민항식)가

있다. 그가 보낸 글월에 "무시무종한 절대의 원(圓)과 순간인 상대의

점(點)이 만나는 이 찰나에 하느님 아버지를 뵙지 못하면 언제 뵈오

리. 하느님께서는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어 눈만 뜨면 당신을 뵈올 수

있도록 허공의 우주를 열어 보이셨다. 하느님께서는 우주안팎을

하느님의 생명이신 성령으로 가득채워 당신을 그리워 하기만 하면

성령으로 참된 생각을 일으켜 주신다. 탐 진 치 삼독이 빚어내는

인생살이에 눈이 어두워 하느님을 만날수 있는 순간순간을 덧없이 흘려

보내고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겨우 하느님께서 세상에 내 보내신 뜻

을 엿보게 되다니 이 통탄과 회한을 어이하리"라고 하였다. 값진 보석

처럼 빛나는 참회록이다. 사망의 몸나에서 영생의 얼나로 옮긴이의

소리임에 틀림없다.

 

때란 죽음 바다 기슭에 금을 그어 가는 것    時也死海岸線之

   헤르몬 산에서 발원하여 사해로 흐르는 요르단강은 예수가 세례 요

한으로부터 물세례를 받아 유명하게 되었다. 그 요르단강의 끝이 죽음

의 바다란 뜻으로 사해(死海)이다. 이름이 사해(死海)인 것은 높은 염

도 때문에 어떤 생물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란 죽음의 바다와 같

아 죽음뿐이지 산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산 것은 현재에 있을 뿐이다.

오늘로 22,741일을 살았다고 하자. 어제까지의 22,740일은 이미 다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 있는 이제란 사해의 해안선인 것이다.

   과거는 죽음의 바다라 생명이라고는 없는데 오직 사람을 통해 나타

난 말씀의 빛이 빛난다. 캄캄한 밤하늘에 별빛이 더 빛나듯 죽음의 나

라(바다)에 말씀의 빛이 더 빛난다. 말씀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류영모는 하느님으로부터 비추어 오는 생명의 빛을 보았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눈앞에 영원한 생명 줄이 아버지 계시는 위로

부터 끊어지지 않고 드리워져 있다. 영원한 그리스도란 한 빛이며 한

줄이다. 몸생명은 끊어지면서 얼생명은 줄곧 이어가는 것이다. 빛이요

줄이란 곧 말씀이다. 나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믿지 않고 말씀만 믿

는다.여러 성현들이 남겨놓은 수천 년 뒤에도 썩지 않는 말씀

을 씹어본다." (다석어록)

 

얇기는 살아 있는 때보다 얇은 게 없고   薄莫薄於存時刻

   우리는 지구를 밟고 다니니 꺼질 염려가 없어 든든하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실은 밟고 다니는 것은 땅이 아니라 몸이다. 몸이란 살얼

음보다 더 얇다. 몸의 존속 시간이 짧고도 짧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

하였다. "얇은 것 가운데 얇은 것은 시간보다 더한 것이 없다. 일생을

두고 만나보지 못한 분을 꼭 만나 보았으면 하는 분이 있다. 언젠가

살아서 한 번 만나 보겠지. 이번에 못 만났으니 요다음은 만나보리라

고 하다가 처음이요 마지막인 인생에 못 만나고 만다. 요다음에는 하

는 시간이 얼마나 얇은 것인가. 얇은 것 가운데 얇은 게 시간이다. 이

러한 얇은 시간을 밟고 가는 우리 인생은 참으로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은 미리 준비가 있어야 그 시간을 잘 쓸 수 있다.그 시간

이 되면 시간을 넘겨 버린다. 시간에는 올 것을 가지고 산다. 일찍 사

는 것이고 미리 사는 것이다." (다석어록)

   예수는 30대를 못 넘겼지만 하느님 아버지가 참나인 것을 깨달았으

니 할 일 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60대를 넘기고도 하느님이 참나임

을 알지 못하면 태어나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그러므로 오래 살았다고

나이 자랑하지 말고 일찍 죽었다고 나이 아까워하지도 말고 사람의 사명을

빨리 이루어야 한다.사람의 사명은 처음도 없고 마침도 없는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이 참나인 것을 깨닫고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인 얼을 붙잡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 아들이 되는 것이요, 부처가 되는 것이다.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이 둘이 아니라 몸에

서 삼독을 닦아내고 기다린다"(壽不貳 修身以候之-『맹자』 진심 상

편)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을 찾으라고 우리

를 내놓으셨다. 한 시간을 주는 것도 그 시간 동안에 당신을 찾으라고

주신 거다. 하느님이 나의 참나인 얼나라 찾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를 살리는 동안에 하느님께 다다라야 한다."(다석어록)

 

깊기는 죽음 바다 구렁보다 깊은 게 없어 深莫深於亡海壑

태평양 바다는 남해안 기슭에 출렁이지만 죽음의 바다는 사람의 베

개머리에 출렁인다. 태평양 바다는 겨우 에베레스트산을 못 잠기게

하지만 죽음의 바다는 우주를 감춰 버린다. 그러므로 류영모는 이렇

게 말하였다. "저 건너 언덕(彼岸, 하늘나라)에 가려면 참으로 전전긍

긍 소심익익(戰戰兢兢 小心翼翼)해서 가야 한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조심조심 아슬아슬 가야 한다. 임시로 사는 여기를 불행으론만

돌리지 말고 조심해 영원한 생명을 찾아가야 한다. 떠날 때는 환하게

이륙(離陸)하여야 한다. 하느님을 향해 이륙(離陸)하는 앞 바다보다

깊은 바다는 없다 .영생의 건너편 언덕을 향하여 출항하는, 그 감사의

일념(一念)으로 아주 이륙하는, 그 보다 깊은 뜻이 어디 있겠는가. 세

상에 나온 뒤로 우리는 자꾸 이 깊은 바다를 향하고 있다." 이것은 몸

나가 겪어야 할 엄연한 현실적인 문제다. 죽음을 면하려고 진시황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안간힘을 썼는가. 그러나 몸나로 죽

음을 면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을 깨달아 죽음

의 준비를 끝낸 사람은 이렇다. "예수는 간단하게 말하였다. 영원한

생명이란 죽음을 부정하는 거다. 죽음이 없는 거다. 이 껍데기 몸이

죽는 거지 참나가 죽는 게 아니다. 죽음을 무서워하고 싫어할 까닭이

없다. 보통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 껍데기 몸이 퍽 쓰러져서 못 일

어나는 것밖에 더 있는가. 이 껍데기가 그렇게 되면 어떤가. 진리의

얼생명은 영원하다." (다석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