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얼 사람 人子

 

  하느님은 제나 없는 하나(전체)로 오직 하나            大我無我一唯一

  참 하느님은 잡신이 아닌 영원이요 무한이라            眞神不神恒是恒

  영원한 한 님은 오직 절대존재로 고요해                恒一唯是絶對定

  시새우지 않고 바라지 않아 자유로운 님                不無求自由郎

                                                        (1957.8.23)

 

  恒 : 두루할 항, 늘 항. 是 : 이시, 바로 시.  :시샘할 기 郎:사

  나이 랑. 定 : 고요할 정.

 

인자(子)는 글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로 우리말의 사람과 같이 쓰

인 것 같다. 이 사람이라고 하면 나 자신도 가리키고 저 사람이라고 하

면 다른 사람도 가리킨다. 예수가 나기 전에 쓰여진 다니엘서(10 :16)

에 인자라는 말이 나와 있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3:28)에 '사람의 아

들들'이라고 복수형이 나온다. 우리말 성경에는 단수로 번역되었으나

외국어 성경들은 거의가 사람의 아들들(the sons of men)이라고 복수

로 번역되었다. 도마복음서(外經)에도 복수형 인자라는 낱말이 나온다.

하나(一)라는 말이 상대세계에 쓰일 때는 낱개의 하나지만 절대세

계(전체)를 가리킬 때는 하느님이 된다. 인자(人子)도 사람으로 쓰이

는 낱말이 절대의 얼나(靈我)를 가리키는 낱말로 쓰이게 되었다. "하

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人子)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요한3:13)고 하였다. 이 구절은 요한복음 3장 5절 "부어 주시는

(물)성령으로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와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 제나(自我)에서 얼나(靈我)로 새로 난 얼나

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다. 얼나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인 성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

느님으로부터 온 얼(성령)만이 다시 하느님께로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류영모가 여기에서 인자(人子)라 한 것은 하느님이 보내 주시는 하

느님의 얼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얼나를 참으로 깨달은 사람이다. 하

느님의 얼은 지금도 줄곧 우리 마음속으로 오고 있다 .류영모는 사람

의 아들(人子)과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들을 하느님이 보내신 성령인

얼나(靈我)로 생각하였다. 낱말만 다르지 실체는 하나로 본 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거

듭나야 사람 노릇을 바로 한다. 얼나로 깨야 한다는 것이다.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짐승새끼다. 예수가 인자(人

子)라고 한 뜻은 짐승의 새끼가 아닌 사람의 아들이란 뜻이다. 예수가

겸손해서 한 말이 아니다. 예수가 말한 인자(人子)란 이 땅에 있는 게

아니다. 인자(人子)는 얼이라 하늘에게 이어져 있다. 여기에 있는 이

짐승의 제나는 하느님 아들의 씨가 커갈 보금자리다."(다석어록)

 

하느님은 제나 없는 하나(전체)로 오직 하나" (大我無我一唯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나다' (출애급기 3:14)라고 말하였다. 하

느님만이 '나다'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은 전체의 존재이기 때문이

다. 사람은 전체의 조그마한 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나라고 할 수 없

다. 나는 소분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

서 소아(小我)라 자아(自我)라 하고, 하느님은 대아(大我)라 진아(眞

我)라 한다. 이처럼 하느님만이 유일(唯一)한 존재요, 모든 것은 하느

님의 내용물에 지나지 않는 것을 분명히 안 사람은 역사적으로 몇 사

람이 안 된다. 이것은 다만 하느님을 아는 것하고는 또 다르다.

동양에서는 석가와 장자가 분명하게 안 것 같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스피노자(Spinoza, 1632-1677)가 이것을 알았다. "하느님은 절대 무

한의 존재다. 다시 말하면 그 각각이 영원 무한의 본질을 표현하는 무

한히 많은 속성들로 성립되는 실체(substans)를 말한다. 하느님밖에는

어떠한 실체도 있을 수 없으며 또한 생각할 수도 없다. 절대 무한의

실체는 분할되지 않는다. 실체와 변태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실체

는 변태에 선행하여 있다."(스피노자, 에티카-신의 정의)

류영모도 전체인 하느님을 알았다."사람은 맨 처음을 잘 모른다.

사람은 전체 완전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사람은 전체 완전을 그

리워한다. 그것은 전체 완전이 하느님 아버지가 되어서 그렇다. 하느

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참 삶이다. 우리의 생각이 피어 넓어지

면 하느님 아버지에게 다다를 수가 있다. 하느님의 소리 없는 소리를

귀 없는 맘이 듣는다.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이 사람은 느낀다. 하느

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뜻이 통하는 소리가 맘속에서 들린다 .하느

님은 큰 나(大我)요 참나(眞我)다. 우리의 나는 거짓 나다."(다석어록

) 석가는 니르바나를 큰 나(大我)라고 하였다. 이것은 니르바나가

예수가 말한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큰 나

(大我)가 있으므로 니르바나라 이름한다. 큰 나는 나가 없으므로 자재

(自在)한 것이다. 허공처럼 모든 곳에 두루 차 있기에 실로 볼 수 없

으나 일체의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나타날 수가 있다."(대승열반경)

   대아무아(大我無我)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왜냐하면 대

아(大我)와 무아(無我)는 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대아(大我)라

면 무아(無我)란 있을 수 없고 무아(無我)라면 대아(大我)가 있을 수

없다. 이 관계를 류영모는 밝히기를 "참나는 큰 나(大我)이다. 더구나

우리말로는 '한 나'라면 큰 나를 뜻한다. 이 큰 나는 얼나(靈我)로 하

느님 아버지다. 큰 나(大我)에는 제나(自我)란 없다. 무아(無我)다.

제나가 죽어야 참나가 산다.제나가 완전히 없어져야 참나다.

참나에는 사사(私事)가 없다. 불교에서도 모든진리의 말씀은 제나를

없애라(諸法無我)는 것이다.제나(自我)는 나서 죽는 상대적 존재인 짐승의

나를 말한다.하느님은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라고

하였다. 짐승인 제나(自我)가 없는 얼뿐인 참나가 대아무아(大我無我)의

하나님이시다.

 

  참 하느님은 잡신이 아닌 영원이요 무한이라  眞神不神恒是恒

 사람들은 너무도 오랫동안 신(神)아닌 잡신을 신으로 받드는 우상

숭배의 미신(迷信)으로 헤매었다. 모든 물체에는 정령(精靈)이 있다고

믿어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애니미즘, 특정의 동식물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토테미즘, 자연현상을 신의 움직임으로 보는 자연현상

신, 사람이 가공으로 상상해 낸 상상의 신이 있다. 조상이나 유명인의

혼령을 신으로 받들기도 하였으며 예수 석가 공자 노자가 신앙의

대상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파스칼 마르틴 루터 키에르케고르 ·

C.G.융도 예수를 하느님이라고 하였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

람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 그 앞에 절할 것은 참되신 하느님뿐이다. 종

교는 사람 숭배하는 게 아니다. 하느님을 바로 하느님으로 깨닫지 못하

니까 사람더러 하느님 되어달라는 게 사람을 숭배하는 이유다. 언제부

터 어디서 어떻게 생겨 무슨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은 신이 아니다. 참

(진리)이신 하느님은 우리가 바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하느님이 아니  

다.참이신 하느님은 없는 것 같다.없는 것 같은 것이 하느님이다.하

느님은 얼로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가득하다." (다석어록)

영원하신 하느님이란 허공을 넘어선 성령의 하느님을 말한다. 또 류

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는 바람을 영원한 생명운동으로 비유하

고 있다. 성령의 바람은 범신(汎神)이다. 범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운

동이다.큰 성령(하느님)이 계셔서 깊은 생각을 내 맘속에 들게 해 주신

다. 그리하여 생각이 말씀으로 나온다. 우리는 성령을 받아씀으로 하느

님을 안다. 하느님과 교통이 끊어지면 생각이 결단나서 그릇된 것을 생

각하게 된다." (다석어록)

 

  "영원한 한 님은 오직 절대존재로 고요해"  恒一唯是絶對定

   칼케톤 공회의(AD. 451년)에서 인자(人子) 예수는 얼나(靈我)인 신

성(神性)에서는 하느님과 같고 제나(自我)의 인성(人性)에서는 모든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이 칼케톤 선언은 옳다. 그런데 한 마디 빠뜨린

말이 있다. 예수 혼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성령

을 받아 얼나를 깨달으면 예수와 똑같은 신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예수

가 제자들에게 협조자(보혜사)를 맞으라고 한 것은 하느님이 보내시는

진리의 성령을 참나로 맞으라는 말이었다. 류영모가 이르기를 "이 껍데

기 몸으로 말하면 어쩔 수 없이 어머니 모태(母胎)에서 나왔다. 이 몸

은 땅에서 나와 땅으로 간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얼은 하느님께로 간

다 .하느님이 영원하면 우리의 얼나도 영원하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하느님이 보내시는 성령이 우리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참나인 얼나를 깨달아 하느님 아들이 되어야 한다.

얼나 밖에 정신이 만족할 만한 것이 상대세계에는 없다.그러므로 상대세계에

한눈 팔 겨를이 없다.이 상대세계에 머무르지 않는 참나인 얼나를 깨달으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얼나를 깨달아 안심입명(安心立命)하는것이 정(定)이다.

기도가 정(定)이고 정은 고요한 기도다.

 

"시새우지 않고 바라지 않아 자유로운 님"無求自由郎

  불기불구(不不求)는 논어에 있는 말이다. "헌 무명옷을 입고서 털

가죽 옷을 입은 이와 함께 있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가 자로(子

路)다. 시샘도 않고 바라지도 않으니 어찌 착하다 않겠는가."(不

求何用不臧-논어 자한편) 성경을 본 이들은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

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마태오 7:7-8)라는 예수

의 말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구하지 않는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 것

이다. 그러나 예수의 말과 류영모의 말은 어긋나는 말이 아니다. 예수

가 구하라고 한 것은 하느님에게 영원한 생명인 얼을 구하라는 말이

고 류영모가 구하지 말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바라지 말고 스

스로 땀 흘려서 얻으라는 말이다. 시샘하지 않는다는 것은 남이 나보

다 잘사는 것을 시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더구나 악한 사람들이 잘

사는 것을 시샘해서는 안 된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

서 혹시 악을 모르고 계시지 않나 걱정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하

느님은 다 잘 알고 계시니 조금도 걱정할 것 없다. 우리가 크게 생각

해야 할 것은 이 모두가 다 큰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고 인생은 결코

악인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다석어록)

자유랑(自由郎)은 인자(人子)를 별칭한 것이다. 얼나를 참나로 깨달은

사람은 상대세계를 이긴 사람이고 죽음을 없앤 사람이다.그러므로

자유랑이다. 예수는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얼나)를 알게 될 것이며 진

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라고 하였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닫지 않고는 자유가 없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이는

부족할 것이 없고 부러워 할 것이 없다.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몸은 죽으러 온 줄 알아야 한다. 안 죽는 것은 하느님뿐이다.

하느님의 말씀뿐이다. 하느님의 얼(성령)이 내 맘에서 말씀으로 샘솟

았다. 하느님의 얼생명에는 죽음은 없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육체적

생각을 내버려야 한다."(다석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