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얼나를 모신 마음 基督心

 

   가고 서는 제나의 삶은 꿈 거짓헛뵘이라                          自行自止夢弄幻

  웃님 뜻에 살며 죽도록 밝히고 살피고 ·깨닫자                    命生命死覺省悟

   탐욕을 채우고 음란에 빠져 나를 끝장내랴                        貪厭淫淪沈沒我

   밥을 잊고 고디를 맵게 가져 제나를 불살라                       忘食貞烈炎存吾

                                                                  (1956.12.11)

 

   弄:희롱할 롱  幻:허깨비 환. 覺:밝을 각 悟: 깨달을 오

   淪:빠질륜  厭:채울염 炎 :볼태울염烈:매울열 沈: 잠

   길 침. 沒:다할 몰. 마칠 몰

 

불심(佛心)이란 말은 들어도 기독심(基督心)이란 말은 처음일 것이

다. 그러나 불심이나 기독심이나 뜻은 같다. 다르마의 나를 모신 마음

이 불심이듯 그리스도의 나를 모신 마음이 기독심이다. 다시 말하면

도심(道心)이고 진리심(眞理心)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

람은 몸으로는 다른 짐승들과 같은데 그래도 귀한 것이 있으니 하느

님의 씨(얼)가 사람에게 깃들여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씨(얼)는 이

세상에서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을 만큼 귀하다. 사람 안에서 하느님

의 씨(얼)가 대통령이 되고, 제나(自我, ego)가 수상이 된 내각이 조

각될 때 사람에게 인격이 나타난다. 인격이란 사람의 가치다.인물(人

物)의 가격(價格)이 인격이다. 우리가 예수를 따르자는 것은 그의 몸

을 보고 따르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내 속에 있는 얼인 하느님의

씨가 참 생명이요 영원한 생명임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므로 먼저 내

속에 있는 얼나에 따라야 한다. 그 얼이 예수의 영원한 생명이요 나의

 영원한 생명이다."(다석어록). 얼나를 모신 마음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지만 얼나를 모시지 못한 마음은 짐승 그대로이다. 짐승 그대로 살

 면서도 짐승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내가 왜 짐승이냐"면서 성을 낸다.

    맹자(孟子)는 인성(人性)은 착하다고 말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큰 오해가 있다. 맹자도 순

 자(苟子)와 다름없이 제나의 인성을 악하게 보았다. 맹자가 말하기를

 "사람이 새 짐승들과 다른 것은 아주 적다. (짐승과 다른 그것조차) 여

 느 사람들은 버리고 참 사람만 간직한다"(人之所以異禽獸者幾希 庶

 民去之 君子存之-『맹자』 이루하편)라고 하였다. 그리고 하는 말이

 "사람이 내게 함부로 덤빌 때는 내가 사랑이 모자랐던가 아니면 예의

 가 모자랐던가를 살펴 고친다. 그런데도 다름이 없으면 스스로 충성

 됨이 모자랐던가를 반성한다. 그래서 잘못이 없다고 생각되는데도 함

 부로 덤비면 이것은 새 짐승과 같은 것이다. 새 짐승을 어찌 상대

 할 것이며 또 어찌 나무라겠는가"(如此則與禽獸奚擇哉 於禽獸又何難

焉-맹자 이루하편)라고 하였다. 이것이 맹자가 본 제나(自我)의 인

성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짐승인 제나로 살아가고 있다고 본 맹자를

어찌 제나의 성선설을 말하였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맹자는 순자와는 달리 사람은 아주 적지만 짐승과 다른 무

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天命)을 아는

양지(良知)라는 것이다. 그것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서

 찾아야 하다고 하였다.맹자는 말하기를 "사람사람마다 귀한것(하느

님의 씨)을 제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생각해 찾지를 않는다"(人人有貴

於已者 不思耳- 맹자 고자 상편)라고 하였다. 예수가 말한 "구하라,

받을 것이다. 찾으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누구

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마태오

7:7-8)라는 말도 짐승과 다른 하느님의 아들인 얼나(靈我)를 생각해

서 찾으라는 말이다. 찾으면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재물이나 명예,

여인이나 자식을 구하고 찾으라는 말이 아니다. 맹자의 성선설은 얼

나가 선하다는 말이지 제나가 선하다는 말이 아니다. 제나와 얼나를

가리지 못하는 이들이 잘못 안 것이다.

  어떤 이가 예수에게 묻기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님의 일을 하

오리까"라고 하자 예수가 대답하기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하였다. 이 말은

하느님이 보내시는 얼나를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한다는 말이다.

일 사(事)는 섬길 사(事)이다. 하느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그런데 맹자가 같은 말을 하였다. "마음은 얼을 기르

는데 두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存其心養性 所以事天

也-『맹자』진심 상편) 존기심양기성(存其心養性)하는 것이 얼나를

모신 기독심 (基督心)이다.

 

"가고 서는 제나의 삶은 꿈 거짓 헛뵘이라" (自行自止夢弄幻)

   행(行)자는 열 십자 길을 그린 상형(象形)의 글자요 지(止)자는 사

람의 발을 그린 상형의 글자다. 길이 있고 발이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일생은 떠돌아다니는 부유(浮游) 인생이다. 지구

위에서만 돌아다니는 것이 모자라 달나라까지 걸어 다니고 왔다고 어

깨가 으쓱하고 있지 않은가. 하느님께서는 가지 않아도 안 간 곳이 없

고 서지 않아도 안 계시는 곳이 없다.

사람의 시간과 공간속에서의 몸짓은 아무리 진지하고 심각하게 하여도

모든것이 그순간을 지나자마자 거짓으로 ,헛뵘으로 돌아가 버린다.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되었고 2백만 명이 죽었다는 한국전쟁도

지나고 나니 꿈속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니르바나니 진리니 구원이니 하는 것은 이 삶이라는 꿈을 탁 깨자는

것이다. 잠 속에서는 잠을 잔 걸 얘기 못 한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게 모두 잠꼬대다. 사람이 무슨 학설을 세우려고 하지만 그게 모두 잠

속에서 꿈을 얘기한 것이다. 그러니 그게 틀린 것이다. 깨고 나서 잠

을 이야기해야 한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하지만 참으로 알면 괜찮은데

반쯤 아니까 우환이다. 이 세상이 어지럽고 괴롭게 된 것은 반

쯤 깬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반쯤 선잠만 깨게 하다가 그만두려

면 애초에 깨우지 말아야 한다. 인생이란 잠 깨자고 하는 건데 인생이

깨지 못하면 아무 것도 못 된다. 사상가·철학자란 꿈꾸는 것이다. 꿈

을 단단히 꾸면 깬다. 잠 잘못 자고 꿈 잘못 꿔서 저도 그렇고 남도

괴롭힌다. 마침내 사람은 깨자는 것이다."(다석어록)

   『장자』(莊子)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제 꿈꿀 때는 그게 꿈

인 것을 알지 못한다. 꿈속에서 또 그 꿈의 길흉을 점친다. 깨고 난

뒤에야 꿈인 것을 안다. 바야흐로 큰 깸이 있고서야 이 삶이 큰 꿈임

을 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 깨었다고 한다. "(장자재물론)

 

"웃님 뜻에 살며 죽도록 밝히고 살피고 깨닫자"  (命生命死覺省悟)

   류영모는 명(命)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명(命)이란 하느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날 때 '살아라'라고 한 번만 명령을 받는 게 아니라

순간 순간 숨쉴 때마다 명령을 하시는지 누가 아는가.순간마다 보이

지 않는 손으로 시계 밥 주 듯 우리 목숨을 돌려주는지 누가 아는가.

목숨 돌아가는 것, 얼숨 쉬는 게 하느님 말씀이다." 우리는 몸의 목숨

이나 맘의 얼숨이나 하느님의 뜻인 말씀에 따라 살고 죽는다. 우리는

그 본보기를 예수에서 본다. 예수는 사는 것도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았

다. "나는 무슨 일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저 하느님께서 하라

고 하시는 대로 심판(평가)할 따름이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기 때문에 내 심판(평가)은 올바르

다."(요한 5:30)  또 예수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죽었다.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죽음의)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오 26:39. 42)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대로 살고 죽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인 얼생명을 받은 사람

만이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 아들인 얼나를 밝히고 살피고 깨달아

야 한다.예수는 멸망의 몸나에서 영생의 얼나로 옮긴다고 말하였다.

석가는 멸망의 몸나에서 영생의 얼나를 깨닫는다고 말하였다. 둘은

같은 말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 아들을 보내 주셨다(요한3:16)

는 것은 하느님의 씨(요한1서 3:9)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이 몸

은 짐승이다. 그러므로 짐승과 다름없이 멸망하고 만다. 그런데 하느

님의 씨(얼)를 주신 게 다른 짐승과 다르다. 내 맘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 부처가 될 씨가 있어서 이것을 깨달으면 좋지 않겠는가. 성불(成

佛)하는 데는 불성(佛性)을 믿어야 한다."(다석어록)

 

"탐욕을 채우고 음란에 빠져 나를 끝장내랴" (貪厭淫淪沈沒我)

   탐염 (貪厭)은 탐욕을 채운다는 뜻이다. 음륜(淫淪)은 음란에 빠진다

는 뜻이다. 여기서는 탐 진 치 삼독(三毒) 가운데서 탐과 치만을 말

하고 진(瞋)은 빠졌다. 그러나 삼독은 한 수성(獸性)이기 때문에 뿌리

에서는 하나다. 탐욕 속에도 진성(瞋性)이 들어 있고 치정(痴情)에도

진성이 들어 있다. 강도나 강간을 저지르는 자체가 이미 진에(瞋)를

전제하고 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삼독(三毒)의 나는 온

세상을 다 잡아먹어도 배부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온 세상을 다 잡아

먹고도 그만두는 일이 없어서 마른 콩 먹고 배 터져 죽는 소 꼴이 된

다. 또 식생활보다 남녀 문제가 겉으로는 안 나타나 보여도 더 복잡하

고 괴상하게 얽혀 있다. 참으로 완전히 순결한 자가 몇 사람이나 될

것인가. 이 성(性)에 대한 생각은 먹는데 허덕이는 사람 아니면 누구

나 다 가지고 있다. 이게 인생을 괴롭히는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를 일

으킨다."(다석어록)  탐욕을 부리고 음란을 저지르면 도덕적인 파탄상

태가 되어 부력을 잃은 배처럼 침몰하게 된다. 수많은 인재들 가운데

진에는 물론 탐욕과 치정을 이기지 못하여 파멸한 인격이 얼마나 많

은지 모른다. 류영모의 말대로 인생이란 죽기로 참아야 하는 이 세상

인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밥을 잊고 고디를 맵게 가져 제나를 불살라" (忘食貞烈炎存吾)

   망식(忘食)은 탐욕을 잊는다는 뜻이고 정렬(貞烈)은 음욕을 이긴다

는 뜻이다. 그럴 때 하느님의 성령의 불길이 내려와 나를 불태워 성별

(聖別)시켜 준다는 것이다. 류영모가 이르기를 "이 세상에서 대부분의

일은 식 색(食色) 두 가지에 귀착된다. 예수 석가 톨스토이 간디

는 명백히 식 색 두가지를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식색의

이 몸은 온통 죄악이다. 깜짝 정신을 못 차리면 내 맘속에 하느님 아

들을 내쫒고 이 죄악의 몸이 차지한다. 몸나는 죽지만 얼나는 산다.

영생이란 몸나와는 상관이 없다. 위로부터 오는 얼나가 영생한다. 조

금 다치면 아프고, 조금 일하면 피로하고, 시시하게 쉬 죽고 마는 이

몸이 무슨 생명이라 하겠는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할 때 내 맘속에

서 진리의 불꽃, 말씀의 불꽃이 타오른다.사상의 나라에서는 나를 생

각의 불꽃으로 불태울 때 생각이 잘 피어나도록 하느님이 성령으로

살려주신다. 이 생각의 불꽃밖에 믿을 게 없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