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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인사드림니다. 저는 현 미 육군 중령으로 한인 이민 1.5세 입니다.  개인적으로 1993년 소말리아 중대장으로 파병나가 뭔가 영적인 체험을 한것도 같은데 누구에게 물어보지 못하고 어느덧 20년이 되었군요.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어지는군요. 지금 제 영적 지능 상태는 어느 정도인지 앞으로 제가 가야할 방향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17에 이민온터라 한문에 무지하여 답답합니다.
바쁘신줄 알지만, 시간이 되신다면 아래 글에 대한  느낌을 알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홍승호 올림
미국 펜실베니아
1993 3, 병참 중대장으로 소말리아에 도착하자마자 아무런 기초 경험 없이 인도양을 생수로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점들에 부딪쳤다. 여태껏 열심히 노력하여 쌓아 왔던 나의 사회적인 직위가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허물어지려는 순간. 동안의 수고가 진정 영원한 나의 것이 아니란 것을 새삼 느꼈다. 오직 열심히 일만 해서도 매사에 양심적이고 솔직해서도 살아남기 힘는 세상살이. 스스로 물어보았다. 내가 노력하여 쌓아 왔던 나의 직위와 명예와 물질적인 충만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있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내가 노력하여 영원히 간직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1993 3, 아프리카, 소말리아 모가디슈 공황 해변가
중대장님, 그거 아세요?”
?”
우리 인간에게는 , 그리고 영이 있다는 거요.”
?... ?”
“...........................”
하나님은 영이시죠
“........................”
맞아!
그래!
하나님은 영이셔!”
그래! 하나님은 영이야!......................“
맞아!
하나님은 영이야!
“……………………”
야영 텐트 밖으로 나왔다. 어둠속으로 내리치는 비바람 소리와 절벽들을 향해 부딪치는 파도들 소리가 혼합되어 찟어지는 고음들이 귀청을 울리고 어둠을 뚫고 내리치는 빗방울들이 눈꺼풀을 따갑게 해준다. 하지만 주위가 고요하고 따뜻하고 온유하다.
하늘을 쳐다본 순간 옥황상제의 형상이 사라졌다. 수십년 상상했던 죽음 대면해야 했던 심판관의 모습이 사라진것이다. 몸이 나른해진다. 텐트로 돌아와 야전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마취에 들어가는 깊은 잠에 녹아 들어간다.
10분의 깜박 . 몇날을 자고난 날아갈것만 같다.
맞아!
하나님은 영이야!
“………………….”
그동안 이란 개념에 전혀 무지했다. 인간에게 육체와 혼이 존재함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영이 존재한다는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날밤, 나에게 다가온 영이란 단어는공기같은 느낌.. 그저 자체로 다가왔다. 설명도 필요없었다. 그저 앎이였다.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시다알게 되었다. 그러고 속에 영이 존재하기에 하나님의 영과 하나됨을 인식하는 순간, 세상이 홀연히 반전되어 다가왔다. 난생처음 깃털보다 가벼운 느낌의 정신 상태를 느껴보며 자주 골머리를 툭툭 두드려보는 습관이 생겼다. 무섭던 사후의 상상이 사리지고 순간 순간 하나님의 존재와 삶을 공존하는 온유한 기운에 스며든다. 세상에서 내가 노력하여 영원히 간직할 있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
나의 35번째 생일날. 솔로몬 장군의 명령으로 중대장 자리를 박탈당했다. 육의 죽음, 새로운 의식 탄생. 중대장 자리를 박탈당하고 혼자 돌아온 나는 조지아 어느 부대의 조그만 사무실에 직책도 없이 배치됐다. 나의 상관은 나의 처지를 알고 머지않아 스스로 제대 것을 예상했는지 아무런 책임조차 주지 않은 조그만 사무실에 전화 대만 주고 나를 외면 버렸다. 이렇게 나는 철창 없는 세상의 감옥에서 1 넘게 감옥살이를 시작한다.
세상 적인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소외감과 패배감 그리고 복합적인 수치심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조지아 조그만 사무실의 지옥 아닌 지옥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기가 힘들어야 정상적인 나의 마음과 생각들이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평안하고 안정하다는 것에 놀랐다. 나는 소말리아에서 하나님에 대한 어떤 신뢰감은 있었지만 내가 이런 의식의 상태를 연속적으로 가질 있는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궁금했다. 처음엔 신비한 나의 심정 상태가 내가 정신 이상이 되었거나 아니면 기독교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성령의 은혜때문인지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과 자신의 정신 상태에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들을 오직 성경책을 읽는데 전념했다.
나는 요한복음 3장에서 나오는 니고데모라 하는 당시 바리세파 종교 관원의 입장에 대해 묵상해 보았다. “예수님 저는 종교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것에 대해서도 이해 수가 없습니다. 저같이 무지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나라가 보일 있습니까?”
예수님의 심정을 스스로 해석해본다. 네게 진실로 말하겠는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없느니라. 내가 말하는 의도는 너의 육체적인 거듭남이 아니라 너의 같은 마음과 성스러운 의식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육체적인 것들은 육체적으로 이해하고 알아야 하지만 성령으로 깨닫는 것은 오직 의식적으로만 이해 있다.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고 하는 말에 대해 오해하지 말고 신비하게 생각하지 마라.”
이것은 다시 말해서 마치 바람이 마음대로 부는데 네가 바람 소리는 들어도 바람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불어오는지 모르는 것처럼 (예수님이 살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기상 관측 시설이 발명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리고 바람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내가 지금 너에게 말하는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뜻도 네가 막상 성스러운 의식의 영으로(성령) 깨우쳐 의식이 거듭날 때는 이런 바람과 같은 비유의 현상과 같은 느낌이 것이다.”
질문을 해본다. 예수님, 정말 믿기 어렵고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 내가 너에게 다시 진실로 말하겠는데 나는 거듭남을 직접 체험해 보았다. 그리고 실제로 내가 겪어 아는 것을 너에게 말하는 것이다. 내가 너에게 세상 적인 사건에 관하여 말을 하더라도 네가 이해를 텐데 하물며 눈에 보이지도 않고 생각을 수도 없는 의식 세상의 하늘같은 일에 대해서 너에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해 봤자 네가 이해나 하겠니. 이런 말은 오로지 나처럼 의식적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나 이해할 있는 일이다.”
성경을 읽고 읽는 동안 나의 의식과 심정은 계속 변했고 이에 맞추어 내가 성경 속에서 느끼는 예수님의 말씀도 같이 변했다.
다시 성경 속의 요한복음 4 24절을 읽었다. “하나님은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 인간은 보이는 육체를 중요시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이시라고 한다. 소말리아에서 새로운 의식을 가지게 근본이 바로 요한복음 4 24절의 내용에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세상에서 어떤 부귀와 권력보다도 얻기 힘들은 예수님이 지녔던 의식과 심정이 과연 어떤 이었을까 묵상 해본다. 예수님을 이해하고 그의 심정을 느끼게 된다면 역시 하나님의 영에 대해 옳바르게 이해하게 것이라 생각했다.
예수님의 재림은 개인전. 텔레비전 방송은 지구적이지만 자신이 원하는 화면은 오로지 자기 텔레비전을 통해서다. 예수님과 똑같은 주파수를 맞출 그의 흥분된 떨리는 심정을 자신만의 의식속에서 느끼고 있지 않을까.
요한복음 15 26절부터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식과 심정. “...내가 (영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누구에게나 가능한)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 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 하느니라... (아무 때고 때가 되면) 사람들이 (옛날 제자들처럼 오늘날 예수의 심정을 가진 자들) 너희를 출회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것은 (‘이신) 아버지와 (‘으로 일맥상통한 예수님)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오직 너희에게 말을 이른 것은 너희로 (언제가 될지라도) 그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여태껏) 너희와 (육체적으로) 함께 (살아) 있었음이니라.”
“...내가 ( 세상에서 육체가 죽어 하늘나라로)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육신을 희생해서 세상을) 떠나가지 아니하면 ( 누가 될련지 모르지만 의식과 심정을 이해하는)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대신 육신이 죽어서 세상을 떠나)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과 의식 일체할 사명감이 누구에게서 보내졌는지 스스로 알게 ) 그가 와서...”
“...그러하나 ( 누구 에게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사람이 (오늘날)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누가 될는지) 그가 영광을 나타내리니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언젠가 될지 모르지만) 때가 이르면 (누가 되든지)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이신 하나님)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언제가 모르지만) 그날에 너희가 (‘으로 변한)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육체가 살아 있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신)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사실은 (누구든지) 너희가 (죽어으로 변한) 나를 (심정적으로) 사랑하고 (의식적으로) 나를 (‘이신 하나님)께로서 믿은 고로 (‘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그러나 (육체적으로)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으로 변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지금 육체가 살아 있는) 너희로 (죽어으로 변한) 안에서 (의식의)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육체적인) 세상에서는 (의식적인)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 육체를 희생하여 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지킨) 내가 (오직 물질적이고 육체적으로 생각하는 ) 세상을 (의식적으로)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심정을 느끼고 그의 의식을 이해하므로이신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근본적인 자세라고 느껴졌다. 지식적인 이해와 심정적인 이해는 자신의 속에 지옥과 천국의 차이가 있다는 것처럼 이해되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 말이나 설교를 아무리 잘하고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다고 예수님의 심정과 의식을 이해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고린도 전서 2장을 읽어보면서 예수님의 심정과 우리 인간들의 심정적 차이를 느낄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 사도 바울이 고린도의 교회에 보낸 편지. 이것은 마치 오늘날 내가 서울에 있는 어느 유명한 교회에 보내는 편지 내용이라고도 생각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형식적인 이름보다는 편지 속에 들어 있는 심정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람들이여 성경 속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의 정보도 아니고 지식도 아니다. 오직 성경 속의 예수님의 말씀은 의식적, 정신적, 영적인 하나님의 오묘한 지혜의 말씀을 말하는 것이다. 지혜의 말씀은 하나님의 인간 창조 때부터 있었던 것인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처럼 지식을 염원하는 사람들도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천년 종교 지도자들이나 부귀와 명예를 가지고 있던 시대의 사회적 지도자들이 성경 속의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더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며 오늘날 사람들이 영적으로 가뭄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오로지 의식적으로 사람의 심정 속을 통하여 이해시키는 것인데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지혜가 예수님의 심정과 일치할 하나님의 깊은 진리의 뜻을 이해하게 것이다.”
우리가 사람의 속사정을 이해할 사람과 같은 심정으로 친밀해질 있듯이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심정 일체가 되어야 한다.”
성경 속의 말씀은 세상에서 가르쳐 주는 지식처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과 심정 일체 사람들의 심정적인 말씀으로 인해 너도 심정적으로 이해되고 의식의 분별을 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네가 너의 몸과 물질적인 욕심에 너의 심정과 의식이 정해져 있다면 너는 나의 같은 말이 세상을 버리는 미련한 정신이상자로 느껴질 것이다. 나는 너를 이해 있다. 너의 모든 노력은 너의 육체를 위한 헌신이란 것을 나는 이해하고 있지만 너는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란 것을 나도 알고 있다.”
이처럼 사도 바울 역시 인간의 가지 의식적인 면을 묘사해 주고 있다. 예수님의 의식과 심정 그리고 사도 바울의 의식과 심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예수님과 사도 바울 둘이 같은 심정과 의식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을 느낄 있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장을 통해 비유적인 말을 인용 우리 인간들에게 우리 자신들의 심정과 의식을 주의 깊게 살피라는 말을 하신다. 하지만 예수님과 심정 일체가 상태에서 글을 읽으면 예수님의 의식을 오해 있는 요점들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인위적인 심정과 의식은 천태만상이고 오로지 자신들의 의식과 심정을 토대로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예수님의 말들을 자기 편리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지금 역시 심정과 의식대로 예수님의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 속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나는 사람들을 이해 있다. 역시 35년을 똑같은 생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역시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사도 바울의 심정을 이해할 같다. 비록 예수님은 보지 못했으나 예수님의 의식과 심정을 이해했던 사람은 분명한 같다. 자기가 보지도 못한 사람의 의식과 심정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할 정도라면 분명히 자신의 삶의 목적과 예수님의 삶의 목적이 똑같아야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의식 속으로 예수님의 물과 피와 살이 흡수 되어 사도 바울 역시 예수님이라는 나무를 닮아 갔던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아니었다. 그의 이해는 사도 바울의 이해이지 예수님의 참다운 이해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 본인도 육체와 의식의 대립과 그로 인한 갈등을 체험해야 했기 때문이다. 역시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없다. 그냥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심정들을 나의 삶의 표본으로 닮아 가려고 하는 것뿐이다.
예수님을 자신들의 삶과 분리시킬 주파수의 파장이 틀려진다. 그리고 성경 속에 있는 천국의 비밀은 그들에겐 오로지 숨겨진 암호들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도 심정도 숨겨지고 오로지 문자로만 보일 뿐이다. 성경은 지식으로 표현 뿐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자기가 이스라엘에서 출현하여 십자가에 희생될 때의 모습처럼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재림한다는 말을 하고 떠났다. 그리고 세상에 다시 재림 옛날 예수님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 다시 말해 성스러운 공기의 모습으로 인간들의 의식 속으로 재림한다는 말을 했다.
우선 마가복음 13 32,33절의 말씀을 읽어보았다. “...그러나 그날과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예수님)아들도 모르고 (하나님)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때가 언제일지 알지 못함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과 하나님을 완전히 분리한다. 예수님은 오로지 하나님의 추구했던 사람 이였다.
그리고 이번엔 누가복음 17 20절에서 26절을 읽어보았다. “바리새인들이 (육체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사람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쫓지도 마라. 번개가 하늘 아래 편까지 비침 같이 ( 누구든지)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처럼 예수님도 자신의 육체가 세상에 재림한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어느 인간에게도 가능한 육체의 죽음을 의미하여 세상엔 어느 누구든지 예수님의 의식과 심정을 닮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미를 뜻하며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가 살았던 시대에서 수많은 심정과 의식의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인자)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의미는 천국은 인간의 육체가 아닌 의식의 개념이면서 마치 하늘에서 번개가 비춰 주는 불빛처럼 의식적으로 복음이 전파된다는 사실이다.
나는 오늘날 우리 인간들이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오늘날 진심으로 예수님의 희생 의식과 일치되는 사람들이 명이나 있을까? 오늘날 참다운 기독교인은 현실을 이대로 보고 있을 없을 아니라 시대에서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수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종교적 사고에 진리 대신 교리가 많이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리고 이상 율법으로 인간들을 지도할 없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예수님은 세상으로 들어와 하느님을 제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예수님한테 돌아온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사회의 시선에 예민하고 종교 단체의 영향력에 두려워하는 모습뿐이었다. 그리고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고정관념과 이기주의뿐이었다.
예수님은 결단한다. 결국 예수님의 새로운 포도주는 낡은 유대인들의 포도주 주머니에는 담을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이 새로운 포도주 주머니 역할을 하게 되고 자기의 제자들을 뽑는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의 기도 속에서도 자신이 택한 길에 후회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인간들의 무지에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자주 느낄 있다.
우리들은 세상에 예수님의 희생정신을 다시 부활 시켜야 한다. 형식적인 그리고 습관적인 관습이 아니라 심정적인 영적인 그리고 진실적인 예수님의 부활이 필요하다.
세상에 예수님을 부활 시켜야만 예수님의 사랑이 열매를 맺을 있다. 예수님의 심정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아직도 의식들이 꽁꽁 얼은 겨울이다. 의식의 봄은 아직 멀리 있기만 한다. 인간이 자연과 순응하지 않는 자연적인 새로운 봄은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생명을 불어넣지 않는 우리의 영적 겨울은 영영 녹지 않을 것이다.
자연의 모습들은 인간들의 의식 세계에도 어떤 근본적인 삶의 질서가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자연의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들의 침묵 소리가 우리 인간들의 의식을 깨우쳐 주려 많은 노력을 한다는 것을 의식할 수가 있다. 자연의 모습은 인간이 본받아야 가장 근본적인 의식의 질서다. 산수의 기초적인 이해 없이 문명을 발전시킬 없듯이 자연의 모습이 암시해 주는 침묵의 법칙을 이해하지 못하면 인간의 의식은 퇴보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자연의 순리적 법칙 그리고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들도 근본은 영이다. 인간의 의식 상태도 영이다. 하나님, 대우주 그리고 소우주의 연결고리는 바로 영이다. 영이신 하나님의 앎을 기초로 지내온 십수년의 세월 속에서 확신한것은 역사는 바로 인간들의 영적 수준에 의해 좌지우지 되어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에게 옷을 입히고, 자신들의 생각을 붙이며 이름을 지어주어 경건함을 표현할때부터 우리들은 나눠진다. 나눠짐으로 인해 오해와 분열이 이러지고 이제껏 인간의 역사는 계속 되어지고 있다.
역사는 인간의 몫이다.
자연의 이상기온 현상으로 체감되는 지구적 현상들을 바라보며 우리들 개인들도 저마다의 댓가를 치루고 있음을 바라본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과 우리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이름도 없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산소이며 물이다. 모두가 공유할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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