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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와 하느님 나라


윤정현(아카데미 원장): 강사를 소개할 때, 학력과 경력을 일일이 소개하는 것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이분은 참 선생님이시다라고 한마디로 소개하면, 가장 좋은 소개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사 선생님을 소개하겠습니다. 박영호 선생님은 다석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많은 책을 내셨습니다. 다석의 말씀을 엮어서 어록을 펴내시고 그리고 읽기 쉽게 해석을 하셨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문화일보에 다석의 생애와 사상을 연재하여 다석사상을 대중화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박영호 선생님은 다석 선생님이 쓰신 다석일지를 해설해서 쉽게 보게 하는 작업을 평생을 두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계속 책을 쓰고 계시고, 이제 조금 있으면 다석 사상에 관한 사전을 펼 것이라고 하는데, 아마 그 작업을 하다가 좀 무리를 하셔서 몸이 아픈 상태에서도 이렇게 내려오셨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한국 사상가 하면 요즘 들어서는 다석 선생님을 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면서 그 동안 서양 사람들 또는 서양 선교사들이 이원론적 사고인 로마 희랍사상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그리스도교 가르침에 한계가 느끼고, 교리의 한계를 느끼는 시대입니다. 새로운 사회를 맞이해서 기존의 교리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한계를 보고, 더 큰 학문, 더 큰 우주관, 더 큰 사유의 방법이 없을까 찾는 중에  다석의 사고를 사람들이 생각하고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의 사고나 그런 생각이라면, 앞으로 세계 그리스도교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관점이 될 수 있고, 또 한국 사상으로서 세계화 할 수 있는 큰 사상이라고 자리매김을 할 수 있겠습니다. 박영호 선생님을 모시겠습니다. 여러분,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수)


반갑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성공회 대학교 교수님, 신부님께서 아주 길게 뭐 대단하게 소개를 해 주셨습니다마는 제가 자기소개를 하면 이렇습니다.


“老軀言新 靈性道, 嬰兒性古 身生理” 노구(늙은 몸)에, 몸은 다 늙었잖아요.  지금은 쪼글쪼글하게 80을 바라보는 계급장 밖에 안 남았잖아요. 몸은 노구인데 말은 새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마 처음 듣는 얘기가 엄청 많이 나올 것 같은데 그게 영성에 관한 길입니다. 여러분들은 그 동안에 대속신앙, 속죄신앙에 관한 말을 많이 들어오셨는데, 그 얘기는 딱 접어 두고 예수님의 영성신앙을 오늘 듣게 될 겁니다. 노구(老軀)가 나왔으니 젊은이가 나와야지요. 이게 대구(對句)가 있어야 되거든요. 그래서 영아(嬰兒), 어린 나이에 습성은 옛날이다 이거요. 오줌 싸고, 똥 싸고, 젖 빨고, 그것은 몸의 생입니다.


“語訥意明 昇天國, 巧辯不仁 是迷惑”

저는 말을 잘 못해요. 어눌(語訥)합니다. 아론은 말 잘하고, 모세는 말 잘 못해서 모세 대신에 아론이 나와서 말을 했습니다. 마아트마 간디도 말을 잘 못했다고 그래요. 제가 간디에 비교할 사람도 못되지만 말을 잘 못해요. 그런데 함석헌 선생님은 말도 잘하고 글도 잘 썼습니다. 말은 어눌하지만 뜻은 분명합니다(意明).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그 길을 말하는 게 분명합니다. 巧辯不仁 是迷惑이라, 교언영색은 선의인(巧言令色 鮮矣仁)이라고 하지만, 뭐가 있어요? 말 잘하고 얼굴 예쁘장하고, 그런 사람들 중엔 어진 사람은 적습니다(不仁). 우리나라 정치인들 너무 말 잘하고, 얼굴 잘 생겨서 우리나라가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아요. 巧辯不仁 是迷惑이라, 이건 자기변명입니다. 내가 말을 잘 못하고 잘 못생겨 놔서, 다른 건 없습니다.


“一言不中 千言無用, 聲前一言(句) 千聖不傳”

말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성전일언, 이 일언을 일구라고 그러기도 하거든요. 이것은 벽암록에 있는 말이거든요. 목소리 전에 말, 말하기 전의 한 마디 말이라는 것은 천명의 성인이 있어도 전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이에요. 이미 문자화 되고 언어화 되었으면 ‘참 진리’는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성령이기 때문이요, 진리는 성령이잖아요. 성령이 말로 할 수 있고 글로 쓸 수 있습니까? 이미 글로 되었고 말이 되었을 때에는 성령의 절대성은 이미 잃어버리거든요. 그러니까 말로 하기 전에 진리나 로고스, 그 말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성인이 천 명이 나온다 해도 전하지 못한다는 거에요. 그러면 오늘 내가 아무리 말을 잘해도 전하지를 못하는데, 더군다나 어눌한 사람이 진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못하는 거에요. 천명의 성인이 와도 전하지를 못하는 그 진리를 오늘 내가 말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헬렌 켈러가 삼중고(三重苦)의 장애인이요, 벙어리요, 귀머거리였습니다. 이 삼중고가 진리를 말하는 것과 똑 같은거에요. 그러니까 그런 줄 알고 들으세요. 그러니까 듣기를 여러분들이 잘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一言不中 千言無用이라. 이것은 명심보감(明心寶鑑)에 있는 말입니다. 한 마디가 딱 적중을 해야지, 한 마디로 딱 적중을 하지 않으면, 천 마디 말이 다 쓸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러분에게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이 한마디 전하려고 합니다. 공동번역에 이렇게 되어 있는데, 오히려 옛날 한글 개역이 더 나은 것 같아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내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이 한 마디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제일 첫 번 말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이것이에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나는 오랫동안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닭도 많이 키워 봤어요. 병아리를 키워가지고 처녀 닭이 되가지고 첫 번 알을 낳으면 첫 알이 좀 작아요. 그런데 그것이 영양가가 아주 많습니다. 그런 것처럼 예수님의 첫 마디의 말은 대단한 영양가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내가 꼭 이 한 마디만 설명하고 갈 테니까, 그것만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회개하라’ 그러면 보통 크리스천 머리에 뭐가 있냐 하며는 무슨 죄 잘못지은 것, 거짓말 한  것, 남의 것 훔친 것, 몰래 뽀뽀한 것, 뭐 이런 것을 자꾸 성찰, 고해하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는데,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에요. 나는 뭐 학교도 많이 안 다녔고, 공부도 많이 안했기 때문에 잘 몰라요. 그런데 성경은 워낙 좋아하니까 뭐 이 번역이 잘못되지 않았나 싶어가지고 영어성경도 보고 일어성경도 보고 심지어 그리스어까지도 공부해 가면서 그리스어 원전도 보고 했는데, ‘회개하라’는 이것이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에요. 이 ‘메타’라는 것은 ‘함께하다’ ‘옮기다’ 그런 뜻이거든요. ‘노에오’라는 것은 ‘마음’이라는 뜻도 있고 ‘깨닫다’라는 뜻이 있는 거에요.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깨달아라’ 그런 뜻이에요. ‘깨달아라’ 이렇게 말하면 이제 불교하고 비슷해지는데, 사실은 예수님하고 부처님하고 그렇게 같을 수가 없어요.


‘솟나자’ 그랬는데, 이 메타노에오 하자는 겁니다. ‘떠나가자’ ‘옮겨가자’ ‘살아가자’하는 이 말이 전부 다 회개하고 직접 관계가 있는 말인데 여러분, 한 번 같이 읽어 보세요.


죽을 제나, 제나라 하는 것은 엄마 아버지가 낳아주는 에고(ego), 즉 자아(自我)를....

이것 참 처음이 되가지고 말을 하다 보니 이것이 걸리고 저것도 걸리고 많이 걸리는데 여러분들은 이 ‘나’가 뭐냐 하면 세 겹으로 되어 있어요. ‘몸’ ‘맘’ 이것이 에고(ego), 자아(自我)입니다. 이 자아를 내가 ‘제나’라고 했어요. 제나라는 말도 내가 처음 쓴 것입니다. 이것은 엄마 아버지가 낳아준 생명이에요. 이것은 나서 죽는 멸망의 생명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영적으로 성령으로 거듭 나면 뭐가 나오느냐 하면 보통 소울(soul)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리스어로는 프뉴마(Pneuma)라고 그러는데, 이것을 소울(soul)이라고도 하고 스피릿(spirit)이라고도 합니다. 이것을 이제 하느님과 함께 붙었다 하는 것이거든요. 다석(多夕) 선생님이 아주 깜짝 놀랄 소리를 많이 하셨는데 뭐라 하시는가 하면은 “엄마 아버지가 낳은 나는 참나가 아니야” 그러시는 거에요. 그 때는 엄마 아버지가 낳은 나, 이것 밖에 없는데 그걸 참나가 아니라고 그러시니까 내가 공중분해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없어지잖아요. 그땐 내가 스물 몇 살 때거든요. 스물 여섯 살인가? 일곱 살인가? 참나라든가 영적인 것을 전혀 모를 때였어요. 기가 딱 차더라고요. 그런데 이것이 뭐냐 하면은 소울(soul)이에요. 이것을 이제 하느님을 보고 받아야 되는 거에요. 영원한 생명은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지 제나가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없다가 생겨난 것은 반드시 없어지는데 영적인 나라는 것은 처음 생기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 하느님 그리워하는 마음 있잖아요. 그것이 영적인 생명이 나한테 넣어져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거든요. 그것은 옛날부터 있는 것이고 언제까지나 있는 것입니다. 제나인 나하고 아무 관계가 없어요. 지금 하느님 그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 자리에 오지를 않았어요. 그렇잖아요? 그러니 내가 하느님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하면은 내 마음 속에 영적인 소울(soul)이 여기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죽을 제나 버려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떠나가자.’

그러니까 ‘회개하라’는 말은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turning하자! 옮겨가자!’는 거에요. 나고 죽는 멸망의 생명에서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가자는 거에요. 결혼 하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처음 시집을 가면 친정만 자꾸 그립지요. 시집하고는 그야말로 문화적 차이가 있어 정이 안 가지. 그런데 아들을 낳고 자식을 낳으면 중심이 딱 옮겨지지요. 그러니까 처음에는 성령하고 멀어요. 멀지만 영적인 하느님 아들 사상이 박히면 이 세상보단 하느님이 더 믿음직해요. 이 땅의 육신의 부모형제보다도 하느님이 더 믿음직해지는 그런 때가 오는 것이거든요. 그게 이제 믿음이 뿌리박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썩을 제나 버려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옮겨가자.’ ‘옮겨가자’ ‘떠나가자’ ‘돌아가자’하는 이것이 전부 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없을 제나 버려’; 없어지잖아 이것은요.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돌아가자’

‘제나 떠나려니 섭섭해 몹시 언짢다고’; 이제 죽으려니까.

‘제나를 버리려니 아까워 크게 성난다고’; 어떤 사람은 암 걸렸다 하면 막 화가 나요.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사는데, 왜 나만 암이 걸려가지고 죽게 되었냐고 화를 내고, 성을 내고, 통곡을 하고 이러거든.

‘제나를 잊으려니 아쉬워 아주 괴롭다고’

‘땅 위에 떨어져 사는지 얼마나 되었다고’; 나 같으면 75년 되었지마는

‘몸뚱이에 갇혀 안달하는지 얼마나 되었다고’

‘내노라 고개 쳐들고 다니는지 얼마나 되었다고’; 죽는 걸 겁을 내고 싫어하고 이렇게 하느냐 이거에요. 그렇잖아요.

지금 지질학에서는 기본 단위가 백만 년이에요. 굳이 100년 산다는 것, 이것은 별똥별 떨어지는 것의 1초밖에 안 되어요, 100년을 살아도 그렇잖아요. 뭐 그걸 언제부터 우리가 살았다고, 언제부터 건방지게 우리가 하느님이 있느니, 없느니 그래요. 우리가 태어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얼마나 살았다고 심지어 하느님이 있느니 없느니 그런 불경한 소리를 해요. 그거 건방진 것이지요.


‘나라는 생각에 버릇이 붙었다’

‘나라는 생각에 홀려 빠졌나’

‘나라는 생각에 잡혀 갇혔나’

‘조임’이 죄악이라는 거에요.

‘조임인 제나를 바림이 스스롬(자유)’; 나를 에고를 버리는게 자유를 얻는 것이고, 점 전에 찬송가 불렀잖아요. 자유하는게 뭐에요. 엄마 아버지의 낳은 에고를 던져 버려야 자유를 얻게 되는 거에요. 그것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부자유에요.


 

‘거짓인 제나로  죽음이 참됨(진리)’; 진리라는게 뭐에요. 에고가 죽는 거에요. 우리는 개체잖아요. 하느님은 전체이고, 우리는 개체입니다.


 

‘낱동인 제나로 꺼짐이 하나(합일)’; 꺼져 지는 것이 하나 되는 거에요.

‘얼나로 솟남이 참나를 깨달음(자각)’

‘얼나로 솟남이 늘 삶에 듬(영생)’

얼나로 솟남이 온통으로 돌아감(귀일); 전체로 돌아감, 우리는 개체인데, 하느님은 뭐에요. 전체가 하느님이에요. 지금 전체적으로 하느님 한 분만 계시는 거지 우리를 포함한 만물은 다 그 부속품이에요. 그런데 이 개체들이 하느님 있느니 없느니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에요. 그렇잖아요. 유와 무가 합한 이 전체가 전부 다 하느님이에요. 모두가 하느님의 부속품이지요. 우리도 그 부속품이잖아요. 우리가 대한민국의 부속품이잖아요. 그런데 대한민국이 있느니 없느니 하고 그것이 말이 됩니까? 그것과 똑같은 거에요. 하느님이 없는 이 개체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전체가 하느님인데, 하느님 없이 개체가 있겠어요? 윤신부님이 다석사상으로 버밍엄대학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신 것이 바로 전체이면서 개체인 것에 대하여 쓴 거에요.


여러분, 간단히만 말할께요. 하느님이 무엇이에요? 처음에 빅뱅이 150억년 전에 일어났다고 그러잖아요. 우주라는 게 폭발해서 우주라는 게 생겼다는 것이거든요. 그럼 그 빅뱅이 일어나기 전은 뭐에요? 우주라는 게 안 생겼다 그려면 없는 거잖아요. 무(無) 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유의 세계가 벌어졌어요. 그럼 누가 만들었어요? 허공이 만들은 거지요. 무가 변화된 거지. 그러니까 없는 게 된 거지, 없이 계신 하느님이지. 정양모 신부님도 그래요, 다석선생님이 ‘없이 계신 하느님’ 그랬는데, 이 사상에 홀랑 빠져어요. 지금 다석학회 회장 맡아가지고 계세요, 신부님이 그러니 카톨릭에서는 미운 털 밖혔지. ‘없이 계신 하느님’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허공의, 무의 생명이 뭐냐 하면 성령입니다. 성령이 뭐 있나요?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까 말했듯이 다칼이라는 사람이 부처님의 제자인데 무슨 문둥병에 걸렸나봐요. 제자들 하고 공동생활을 하니까, 집단생활을 하라고 하니까 문둥이가 같이 따라 다닐 수 없잖아요. 그래서 옹기골 같은데 가서 따로 간병하는 사람하고 둘이 있는데, 혼자 훌쩍훌쩍 울어요. 그래서 ‘왜 우느냐?’고 하니까 ‘난 병이 들어가지고 선생님 얼굴도 못 보고, 선생님 말씀도 못 듣고, 이런 불쌍한 놈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니까 그 간병하는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부처님한테 쫓아가서 ‘부처님 자칼이가 이런 소리를 하는데 한 번 가보셔야 하겠습니다’하니 부처님이 와 가지고 하는 말씀이 ‘눈으로 이 몸을 보고, 귀로 말을 듣는 사람은 부처님을 못 본다’ 그러는 거에요.


그것이 뭐냐 하면 영(soul)이 얼의 ‘나’, 나는 이것을 ‘얼나’라 하거든요, ‘얼의 나라’ 눈에 안보이잖아요. 귀로 들을 수 없고, 그것이 진짜 부처입니다. 이 보이고 말 듣는 이것은 진짜 ‘참나’가 아니라는 것이거든요. 영(soul)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성령인데, 보이거나 들릴 까닭이 없지요. 그런데 성령, 그걸 받은 사람하고 안 받은 사람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고 하면 이게 책을 낸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 책, 다석 유영모 216쪽에서 부터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달라지는 것을 구체적으로 써놨어요. 그걸 다 못하는데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원칙은 자격증을 받아야 해요. 그런데 신학교 조금만 하면 전도사 자격증 주고, 목사 자격증 줍니다. 원칙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만 자격증 주어야 되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모두 다 엉터리로 해요. 그러면 성령으로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로 들을 수도 없으니까 어떻게 구별할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구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원칙은 여기 이걸 다 읽어야 되는데 수십 페이지도 넘죠. 한겨레신문사 소영 기자라는 사람이 있어요. 한 번 인터뷰를 하는데 “선생님, 영적으로 거듭나야, 거듭나야 된다고 그러는데 영적으로 거듭나면 어떻게 달라집니까?”라고 질문하는 것이에요. 그럴듯한 질문이란 말이에요. 거기에서 구체적으로 얘기해 가지고 여기까지 쉽게 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뭐냐 하면은 뭐 이것을 보니 이것을 얘기해야 되고, 저것을 보니 저것을 얘기해야 되고.... (웃음) 사실은 천명(遷命), 우리가 이것을 알아야 되어야 합니다. 지구가 생긴 것이 46억 년 되었다고 그러거든요. 처음에는 해에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지금도 맨 불덩어리에요. 근데 이것이 식는 동안에 물이 생기는 거에요. 불에서 물이 생기는 이것이 굉장한 거에요. 16억년 동안을 식어가지고 운성들하고 부딪치는 바람에 돌에서 물이 나와 가지고 이게 바다가 된 거거든요. 그래서 지금부터 30억년 전에 16억년 동안을 천번 만번, 천번 만번 변화해 가지고 이 지구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산소가 없어서 스프의 바다라 해서 끈적끈적한 게 바다였습니다. 거기에 박테리아가 처음 생긴 것이 35억 년 전이에요. 그래서 물속에서 박테리아균이 계속해서 변화를 해가지고 발달해 가는데 그래서 6억 년 전쯤이 되어 척추 있는, 고기 중에서 척추 있는 것이 생겼습니다. 그 척추 있는 고기에 아가미가 생겨 가지고 헤엄쳐요. 그래서 3억 5천 년 전에는 뭍으로 올라오는 동물의 허파가 생겨났지요. 그랬는데 500만년 전쯤 와가지고는 유인원이 생겼습니다. (신문을 들어 보이시며) 이것이 이제 신문에 난 원숭이에 관한 것인데요. 이것이 4천 7백만년 전의 영장류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류의 조상이에요. 이것은 아직 원숭이, 침팬지, 우랑우탄하고 구별이 안 되어 있는 공동 조상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이 사천 칠백만 년 전인데, 여기 발가락하고 다 있잖아요. 그러니까 500만년 전까지는 이렇게 공동조상이었던 것이 이제 유인원이 된 거에요. 그래서 원숭이하고 갈라진 지가 500만년 이후에 갈라지기 시작한 거라구요. 원숭이들은 숲에 그냥 살고 인간들은 땅 위로 내려 온거에요. 원숭이들은 지금도 이렇게 집고 다니거든요. 똑바로 서서 직립 유인원이 된 것이 200만년 전이에요. 한 50만년 전. 인간이 생겼거든요. 옛날 같으면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고 하면 뭐 난리가 나가지고 창세기가 어쩌고 저쩌고 하겠지마는 이제는 다윈을 카톨릭에서 더 추모를 하고 난리잖아요. 그만큼 세상이 달라진거에요. 그래서 생물학자들은 뭐라 그러느냐 하면은 원숭이하고 우리하고 다른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The naked ape라고 해요. ‘털 없는 원숭이’라 이것이에요.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하면은 원숭이도 새끼 때에는 털이 없어요. 그 새끼 그 모습 그대로가 어른이 된 것이 사람이다 그것이에요. 털이 없는 거에요. 그래서 이것을 혁명(革命)이라고 그러는데 가죽 혁字가 뭐냐 하면 털 뽑아 버리는 것이 가죽이에요. 그러니까 혁명을 한거라. 혁명을 해서 우리는 원숭이에서 인간이 털 없는 원숭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간혹 가다가는 털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 친구의 어떤 사람은 털이 숭숭숭숭 마 털보가 되가지고 털투성이에요. 그리고 그것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도 뭐 20명 죽였느니, 몇 명을 죽였느니, 여자를 열 몇 명 죽이고 뭐 그런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거짓말 한 번 하면 죄 졌다고밤 새워 잠 못잡니다. 그런 사람을 살인마라고 하고, 싸이코패스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짐승들 같은 거에요. 그게 사람이 덜 되가지고 그러는거에요. 한 1% 정도가 그렇다는 거에요.


이렇게 혁명을 해가지고 원숭이에서 인간이 되었는데 또 한 가지 뭐냐 그러면 이것이 천명(遷命)이라고 그러는 것이데, 이것이 뭐냐 하며는, 이쪽 유교 쪽에서는 자꾸 ‘대인이 되라’ ‘어른이 되라’ ‘성숙하라’ 자꾸 이렇게 말해요. 맹자도 큰 걸 길러야 대인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순신장군 보고 대인이라 하고 그러는데, 대인이라 하면 최대 존칭이거든요. 근데 예수님은 반대라. 뭐라 그러냐 그러면 어린애 같이 되라는 거거든. 어린애 같이. 거 희한하잖아요. 근데 그게 재미있는 말이에요. 예수는 어린애 같이 되라, 어린애 같이.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마태 19:14).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들이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태 18:3). 어린애가 되라는 거에요 자꾸,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뭐라고 그랬죠. “어떻게 또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갑니까”하고, 거듭나라 하니까. 이것이 뭐냐 그러면은 ‘유아성숙’이니 유아생성이니 하는 말을 생물학자들이 하는 말이지마는 내가 말하는 거는 생물학자들이 말하는게 아냐. 정신적으로 유아성숙을 하며는 천명(遷命)이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으로. 뭐냐하면 어린애들은 탐욕이 없잖아요. ‘내꺼라’하는 게 없어요. 배고프면 젖만 갖다 물면 그만이지 내꺼라는게 없거든요. 애기들은 울었지, 때리거나 공격하거나 그런 것이 없어요. 애기들은 남자 여자 구별이 없잖아요. 성적으로 깨끗해요. 그러니까 예수님,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탐진치라 그러잖아요. 탐욕 부리고 성내고 요거, 요거는 음란한 거 성욕이 있는 것이에요. 이게 다 동물의 본능이거든요. 먹어야 사니까. 이걸 이제 보통 vision이라고 그러고, 이건 fighting 싸우는 것입니다. 치정은 sex를 말합니다. 이거 동물의 본능이에요. 이거 없으면 동물이 종족 보존을 못하는 거지요. 그런데 어린애가 되면 탐욕이 없어요. 뭐 부잣집은 애기들 앞으로 논 밭 산을 뭐 사고 그런다하지마는 그거 어른들이 시키는 거지 애들이야 뭐 소유할 줄 알아요? 내 것이 없는 거지. 성을 안 내. 애들이 뭐 싸워가지고 뭐 형사고소하고 하는 그런 거 있습니까? 어른들이 그러지. 이거 뭐 치정을 일으켜 가지고 무신 성범죄를 일으키는 것을 아이들이 어디 합니까?


그러니까 마하트마 간디는 그러잖아 금욕하라고, 성욕을 가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뭡니까 바닛사, 남에게 피해를 안 끼친다. 이것은 Brahmachaya(브라마차야, 자기정화)라고 합니다. 금욕주의, 이거 이렇게 되거든요. 아기처럼 되는 거에요. 요렇게 되야 되는 거야.  예수님은 이렇게 살으신 분이잖아. 예수 어때요? 예수 뭐 소유욕이 있어요? 싸우기를 합니까? 그러니까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고, 오리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그렇게 되면 뭐가 됩니까? 이 세상에서 못살잖아요.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것이에요. 그건 내가 없어져야 되요. 내가 없어져야지 안 그러면 안되요. ego가 없어지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뭐냐 하며는 대단한 깊은 뜻이 있는 거에요. 그것이 이제 천명(遷命)인데 요렇게 되는 건데 그래서 여러분들 이제 불교에서는 뭐라 그러느냐 하며는 “시슴마” 그래요. 그 뭐냐 그러면 “이 뭐꼬?” 왜 사느냐 그거요. 니 왜 사나? 여러분들 왜 삽니까? (어데 갖다 놨나? 정신이 없네!) 그래서 이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 5:24)라고 말씀한 것이지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다면은 멸망의 생명인 ego에서 영원한 생명이 soul로 옮긴다 그러는 거거든요. 거듭나는거죠. 그게 회개하라하는  것은 메타노에오인데, ‘옮겨가라’는 게 뭐냐 하면 메타멜레케, 맨 똑같은 말에요. 옮겨가라는 거에요.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전화(turning)하라는 거에요. 회개하라 그러는게 뭐냐카면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ego에서 soul로 가자는 거잖아요. 멸망의 생명, 엄마 아버지가 낳은 생명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성령, 영의 생명, 얼의 나로 옮겨가라는 것입니다. 이제 천명으로 옮겨가라.  이것이 회개하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천국이 가까웠다. 천국이라는게 가까웠다라는 말이 이게 잘못된 말이에요. 와있는 거에요(完了). 하느님이므로 하느님 나라 따로 있고 하느님 따로 있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되요. 우리는 대통령 따로 있고 영토가 따로 있지만은 하느님은 성령의 나라니까 ‘아니계시는 데가 없는데’ 무슨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잖습니까? 무소부재(無所不在)하는 데, 성령이라는게 이제까지도 그렇고 아까도 그랬지요? 동물들이 있는데 그게 이제껏 진화를 해왔잖아요. 그러니까 아무 생물이 없을 때는 무생물 시대이고, 그 다음에는 생물시대가 와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2000년 전에서 2500년 전에 예수님이나 석가가 태어날 때부터 뭐가 왔느냐하면은 영성의 하느님 나라를 깨닫기 시작한 거에요.


예수님이나 부처님, 노자, 장자, 그걸 갖다가 인제 인류문명의 영성시기라 그래요. 그때 그 동시다발로 성인들이 동서양에 쏟아 나올 때거든요. 그거를 이제 인류의 성인시대라 하는데, 그 전에는 하느님나라 생각한 사람이 없는 거에요. 예수님 때에 와서 하느님 나라, 성령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우리 인간이 처음으로 깨닫는 것이지, 하느님 뭐 태초부터 있는 하느님인데 그때 뭐 가까이 올 까닭이 뭐가 있겠어요. 동물들은 모르잖아요. 그런데 인간들도 몰랐는데, 예수님이나 부처님 때 와서야 성령의 나라를 안 것이지요. 하느님이 성령이라는 것을 깨달게 된 거에요. 그게 하느님 나라에요. 하느님 나라, 천국이 가까워진 것이 아니라 이미 와 있었던 것지요.  천국이 뭐 태초부터 무시무종이고, 하느님의 나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잖아요. 근데 그때 와 가지고, 어디 가서 뭐 기차타고 오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인간이 처음으로 하느님을 하느님 나라를 깨닫기 시작한것이거든요.


그러면 하느님 나라를 가려면 어떻게 가야 되느냐? 우리는 지금 이제 가출(家出)을 해야 되요. 탈국(脫國)을 해야 되요.  탈주(脫宙)를 해야 되요. 피붙이에 억매여 있는 동안에는 하느님 나라 갈 수가 없어요. 여러분들 외로워야 되는데, 가족이 있으면 그 외로움을, 하느님을 그리워 해야 될 그 외로움을 가질 수 없어요. 예수님 말씀하셨잖아요.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 그러잖아요. 예수님은 집 한 칸도 없는데, 골방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산 속에 가 기도하고 그러잖아요. 그건 뭐냐 하면 외로운데 가서 기도하라는 거에요. 근데 그 외로움을 하느님께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족 때문에, 가족을 사랑하느라고 외로움을 몰라요. 그거 없으니까 하느님을 그리워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가족을 내버리라 하는게 아닙니다. 가족을 초월하라는 거지요. 가출을 해야되요. 그 다음에 나라를 벗어나야 합니다. 탈국(脫國)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뭐 정치라든가 뭐 하게 되면 뭐 하는줄 알아요. 그런 것 다 소용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왕자로 태어났는데도 임금 안하잖아요. 예수님은 뭐라하였는가 하면 “내 나라는 땅에 속한 게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게 뭐에요? 하느님 나라가 진짜 얼의 나라다. 그 다음에는 우주를 초월해야 합니다. 우주를 초월해서 이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있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야말로 ‘없이 계시는 하느님’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신기루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 우주에 보이는 것은 잠시 잠깐입니다.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우주를 초월할 때, 그제서야 하느님 나라가 눈에 보입니다. 얼의 나라가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집에 만족하고 가족에 만족하고 있고, 나라에 만족하고, 우주에 만족하고 있는 동안에는 얼의 나라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것들을 초월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이 뭣꼬?” “시슴마”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느님께로 가야합니다. 하느님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다석 선생님이 뭐라 그러는가 하면, 인생의 목적은 재천(在天)이지 불재지(不在地)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한 테 가는 게 인생의 목적인데, 우리는 땅의 것에 자꾸 인생의 목적을 둡니다. 이제 우리가 이렇게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20살까지는 엄마 아버지만 있으면 되요. 엄마 아버지 없으면 고아가 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제일 가엾은 사람이 되는거지요. 20살까지는 엄마 아버지만 있으면 되는 거에요. 그 다음에 20세에서 40세로 가면은 짝이 있어야 합니다. 엄마 사랑 아무리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살 맛이 없어. 그래서 늙은 총각들이 자살해 죽고 그러잖아요. 시집 못가서 자살해 죽습니다. 왜냐하면 인생의 목적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거든요. 그 다음에 40살이 넘어가면 부부가 있어도 소용이 없어요. 자식이 있어야지, 하다못해 아이라도 입양해 길러야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적은 전부 다 가목적(假目的)입니다. 그러니까 원칙적으로 따지면 신부님들은 다 독신이라야 해요. 그런데 카톨릭쪽 신부님은 술 사다 마십니다. 담배 안 피우는 신부님은 거의 없어요. 그 고독을 이겨내지를 못해서 도박하고 술 마시고 그렇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결혼해서 도박하지 않아야지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목사님들처럼, 또는 성공회 신부님들처럼 결혼하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신부님들이 너무 불쌍합니다. 내가 아는 신부님은 아주 착한데 그냥 술 고래입니다. 술 고래라 밤새도록 술을 마십니다. 그것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그것을 볼 때. 고독을 이겨내느라고 무척 애쓰는 모습이 안되었어요. 고독을 못 이겨가지고 저렇게 술을 마시는구나 생각하며는 안타깝습니다. 자기 실력껏 해야 될 텐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실력이 안 되는데 억지로 독신자로 만들어 놨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고독을 못 이겨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게 무리한 거에요.


이 세상에 제일 그거한 것이 자식 낳는 것입니다. 나는 자식들 있는 것이 제일 부담이 됩니다. 나는 자식들 한테 오히려 거꾸로 세배하면서 내가 너 낳은 것이  잘못되었다고 빌고 싶은 사람이에요. 그러나 사람들은 20살 때까지 부모 사랑하고, 40살까지는 부부사랑하고, 60살까지는 자식 사랑하고, 이제 80살 넘으면 손주가 있어야 해요. 자식과 며누리에게 손주 안 낳는다고 잔소리 하는 것은 사랑할 상대가 없으니까 손주를 찾는 것입니다. 그것 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요. 거의 90% 이상이 그렇게 하고 인생 마치는 거에요. 그런데 여기에서 혈연관계를 뛰어 넘어, 부모에게서 떠나 스승을 찾아 나가는 것입니다. 목사님 찾고, 신부님 찾고, 예수님 찾고, 부처님 찾는 것은 스승을 찾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혈연 관계에서는 도저히 만족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뭔가 영적으로 마음이 허전한 것은 피붙이가지고는 달랠 길이 없다는 것이거든요. 어떤 사람이 그래요. 고독을 몰랐는데 전화와서 진짜 고독을 알겠더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돌아누우면 남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진짜 마음속의 허공은 메워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한테 그것 메워달라고 자꾸 요구했다가는 부부싸움만 하게 됩니다. 하느님이 날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럴 실력이 있으면 시집도 안 가고 장가도 안 가게. 우리에게는 그런 실력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찾고 스승님을 찾는거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했어요. 아직 제자들이 설익었는데,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너희를 떠나가는 것이 좋다는 거에요. 깜짝 놀랄일 아닙니까? 다 길러놓고 죽어도 죽어야지. 떠나가면 어떻게 합니까? 보혜사, 성령이 와서 너희를 가르쳐 줄 것이라.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성령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거거든요. 나는 떠나가는 것이 좋고, 하느님의 성령한테서 이제 배워라 이 말이지요. 예수님은 나처럼 학벌이 없어요. 뭐 요즘은 뭐 바울로도 랍비, 가므리엘 제자가 아니다고 그런 소리도 하지마는 바울로는 랍비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학이고, 성당 주일학교도 다닌 적이 없어요. 그럼 누구한테 배웠어요. 하느님 성령한테 배운 거지요. 부처님도 누가 가르쳐서 부처님 됐어요? 자기 혼자 수도해 가지고 부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도 뭐라 하였습니까? 불교에서는 뭐라 합니까? 살불(殺佛)하라 부처님을 죽여라. 살조사(殺祖師) 하라.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그러거든요. 그것은 선생이 우상화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한테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자꾸 하느님으로 신격화 시키잖아요. 예수님이 자기가 하느님이라고 그런 적이 없어요. 그런데 왜 하느님이라고 부르냐면, 하느님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을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고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존경할 사람이 없으니까, 노사모니 박사모니 하고 쫓아다니는 것이에요.  그래서 노무현 대통령한테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왜 그렇습니까? 진짜 하느님을 알고 싶으면 그렇게 야단칠 것 없는 것이거든요. 그렇죠? 이 세상에 존경할 사람이 없으니까 매달리는 것입니다. 오죽 갈 데가 없으면 연예인 쫓아다니고 난리치고 그러겠어요. 존경할 사람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다석 선생님이 훌륭한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하루는 찾아갔는데 “날 찾아올 생각도 말고, 나한테 편지할 생각도 말아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 파(破)자가 제일 좋다’고 말하는 거예요. 다 흩어져 가지고 제 각기 살기를 바라지, 나한테 붙어 있어가지고 뭐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젊어서 글쓰기를 좋아해 연애편지도 많이 썼습니다. 선생님한테도 편지 많이 썼어요. 그런데 하루는 편지하지 말라 그거요. 그래서 내가 그랬지요. 선생님한테 편지를 내는 것은 송아지가 어미소 젖 잘나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요. 그렇잖아요. 송아지 길러보면은 머리로 젖을 툭툭 치받으면서 빨거든요. 난 그게 뭔지도 모르는데 선생님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은 그걸 가지고 뜸배질한다고 그러더라구요. “뜸배질은 저 위(하느님)에다 대고 해야지 나한테 해가지고 뭐하느냐는 거에요. 하느님한테 뜸배질 하라는 거에요. 아! 내가 그 소리 듣고 진짜 우리 다석 선생님이 훌륭한 분이시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보통 선생을 멀리하면 배신했다고 그렇게 생각할 텐데 이 양반은 제자를 오지 말라는 거에요. 오지 말고, 독자적으로 정신적인 독립을 해야한다는 거지요. 맨날 선생님만 의지하고 되느냐 이거에요. 요즘 목사나 신부님들이 제자, 신도들을 독립시키고, 자율적인 신앙인 만들려고 내보내는 사람 어디 있겠어요? 늙어 죽을 때까지 붙들어 매어 놓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 장례식을 아주 잘 치른대요. 성공회도 카톨릭인데, 카톨릭 흉 봐서 죄송합니다만 예식을 지극정성으로 잘 치른대요. 왜 그렇게 열심히 치르는 걸까요? 그것을 보면 신도들이 늘어난대요. 재천부재지(在天不在地)입니다. 의시도 잘 해야겠지요. 꼭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어요.


그러니까 인생의 목적은 하느님께로 가는데 있는 것입니다. 피붙이한테 억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부처님도 그러잖아요. 나 홀로 하나 있는 것입니다. 스님한테 그랬어요. 예수님도 아예 결혼하지 안했다고요. 인생의 목적이 뭐야 하면 제나, 멸망의 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짐승들처럼 새끼 줄줄이 낳아 가지고 고생합니다. 다석 선생님이 뭐라 그러시느냐 하면, 서울에 처음에 소방서를 만들었대요. 서울에 소방서를 만들어 놓았는데 불이 나야지요. 소방대원이 심심해 못 견디겠거든요. 소방서에서 어디 가서 불을 질렀대요. 불 끄러 출동 한 번 할라고. 우리가 시집 장가가는 것이 불 지르는 것과 똑 같아요. 불질러 놓고 평생 불 끄느라고 죽을 지경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삶은 가목적(假目的)이라는 것을 아시고 자기 자식한테 전력투구하지 마세요. 아는 사람이 있는데, 요즈음 애들 데리고 필리핀에 가서 삽니다. 초등학생인데 영어가르친다고 거기 가 있는 것입니다. 필리핀에도 가고, 오스트레일리아에도 가고 합니다.  그렇게 영어 가르쳐서 뭐하려고 그래요. 그렇잖아요? 영어를 할려면 적어도 초등학생 이상 대학생이 되어서 영어공부를 해야지요. 그렇게 고생해서 영어 배워서 뭐합니까? 김흥호 교수님이 와세다대학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뭐 옛날 일제시 때 했으니까 뭐 영어 잘 합니까?  우리도 독해나 했지 회화는 그렇게 잘 할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영어 통역할 사람들이 없으니까 그때 김흥호 교수 더러 박사학위 따가지고 오라고 미국에 보냈답니다. 버클리대학에  갔는데 말이 안 되어 고생을 아주 많이 했다는거에요. 심지어 밤에 어머니가 꿈에 나와 영어를 다 하더래요. 그래 박사학위는 못따고 그냥 석사학위만 따가지고 왔대요. 그래서 하는 소리가 뭐냐 하면은 1년 내내 학교에 있는데 영어 두 번 밖에 안 써먹었데요. 1년에 두세번  하려고 그렇게 고생을 해요. 영어가 필요한 사람들이에게나 필요한거지 모두 다 영어가 그렇게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꼭 영어 잘하는 사람들만 하는 거에요. 모두 다 그렇게 영어만 잘해가지고 뭐할 겁니까? 그래서 우리가  자식들 성적 조금 떨어진 것 가지고 난리를 치고 서로 괴롭게 그렇게 할 필요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내가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전환(turning)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고 그렇잖아요. 회개하라는 말은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전환하라는 것입니다. ‘거듭나라.’ 부처님 같으면 ‘깨달아라’ 이 말이에요. 깨달아라, 메타노에오라는게 깨달으라는 말이거든요. 부처님이 그랬잖아요. 80살에 죽잖아요. 80살에 죽어요. 죽는 나이에 전도하러 동네동네 방문했잖아요. 다니면서 고별인사를 하는 것이었어요. “나는 이제 죽는다. 나는 이제 죽는다.” 이제 마을사람들하고 고별인사를 하니, 마을사람들이 울고, 제자들도 울었습니다. 나중엔 라훌라라는 자기 외아들조차도 고별인사를 했어요. “이젠 너는 누구의 아들도 되지 말아라. 나도 누구의 아버지도 되지 않고자 한다. 우리 다 니르바나에 들어가자.” 그런데 뭐라 그러느냐 하면 나는 생노병사를 여의였다고 하였습니다. 생노병사를 여의였으면 안 죽어야 될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고별의 말도 죽는다는 뜻이거든요. 그건 왜 그런거에요? 그것은 거짓말 하는 거에요. 안 죽는다는 것은 뭐고, 고별인사는 또 뭐에요. 그게 모순된 거에요. 그거니까 부처님도 예수님처럼 영적인 생명을 깨달았다는 말이에요. 안 죽는 생명을 깨닫았다는 것입니다. 나고 죽는 생명, 그러니까 생사(生死)를 초월하는 거지요. 이 자아(ego)는 생사에 걸려있어요. 이 세상에 나서 죽지 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soul)은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 된단 말이에요. 이것은 생사를 초월한 것이지요. 이 생명을 깨닫게 된 거에요. 그러니까 인생의 목적이 뭐 입니까?  동물들은 종족보존하는 것입니다. 종족보존 하려고 그냥 온힘을 쏟는 것입니다. 동굴에 사는 동굴노린재는요 교미하고 난 다음에 암놈에게 잡아먹힙니다. 그건 독부(毒婦) 중의 독부죠. 왜 그러느냐 하면 동굴 속에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새끼 낳고 잘 기르라고 숫컷이 일부러 잡아먹혀 주는 거에요. 이미 수정은 되었으니까 새끼는 낳을 것 아닙니까? 영양분 취하라고 일부러 잡아먹혀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종보존이거든요. 새끼 보존을 위해서는 어떠한 희생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동물들은 종족보존을 합니다. 그것이 동물들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도 종족보존에 혈안이 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즘은 철이 났는지 우리나라 인구 증가율이 1.2% 밖에 안 되요. 1.65%가 되가지고 뭐 나라 망한다고, 전쟁이 나면은 어떻게 할려고 야단들입니다. 애기 낳는 사람에게 빚을 내서라도 포상금을 주고, 출산장려하느라 야단입니다. 지금 청년들, 살아있는 청년들도 무슨 직장을 구하지 못해 주면서 무슨 미래 걱정들 하고 그래요. 백수건달이나 없도록 해 놓고 그런 소리를 해야지요.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직장을 제대로 주지 못하면서 무슨 미래를 걱정합니까? 그럴 필요 없어요. 지금 적정한 인구가 세계적으로 지금의 1/3이면 동물들도 안 죽고, 인간도 잘 살 수 있다는 거에요. 지금 우리나라 인구가 반 이상 확 줄여버려야 되는 거에요.


우리 인간은 종족보존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에요.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부처님이 오고부터는 인생의 목적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 전에는 종족보존이 목적이었습니다. 자식들한테 제사 받아먹으러고 하는 것을 다석 선생님이 엄청 싫어했어요. 그게 무슨 짓들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자식 낳아 기르려 하지 말고 제자를 길러라고 하셨어요. 정신적인 아들인 제자를 길러라.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제자만 기르려고 그러잖아요. 제자 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종족보존이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멸망의 생명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아가는 신앙생활하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목적인 하느님이 너무 높기 때문에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부처님도 그러는 거에요. “너희들 여기 흙이 많지?” “예, 많습니다.” 그 흙을 들어가지고 손톱 위에 딱 올려놓고 참을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이렇게 적어라. 이 땅덩어리에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내 손톱 위의 흙 정도 밖에 없다. 이를 조토경(爪土經)이라 그래요. 손톱 위에 딱 올려놓고 그렇게 적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렇습니다. 다석 선생님이 35년간 YMCA에서 강연 하셨는데 제자라고 나온 것은 김흥호 교수하고 나 밖에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거에요. 제자들이 많이도 필요 없어요. 어떤 분이 그러더라구요. 한 분만 있으면 되는거지. 그러나 나는 하느님의 뜻이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은 가까이 온 게 아니라 이미 와 있는 것입니다.  천국이란게 뭐 유토피아인줄 알고 그렇잖아요. 또 어떤 사람들은 휴거가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천년왕국이 어떻고 별 희한한 소리가 다하고 있잖아요. 다 쓸 데 없는 소리에요. 예수님은 그런 소리 한 적이 없어요. 하느님은 영원 전부터 계시고 무시무종하신데, 무슨 뭐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사람들이 깨닫는 것이 이제 금방, 예수님 부처님 이 오신 후에 처음으로 깨닫는 거에요.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쳤는데, 사도 바울로가 와서 그 말씀을 뒤집어 버렸어요. 사도 바울로는 뭐입니까? 바리새인이거든요. 바리새인은 무엇입니까?  신부님 계시는데, 이거 얘기 자꾸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어요. 쪼금만 할께요, 오늘  이 소리 한 마디는 하고 가야겠습니다. 그래야 날 다시는 더 부르지 않겠지요. 유대의 사람들은 뭐가 잘못되면 하느님의 벌을 받아서 그렇게 된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하고 같이 가다가 장님이 떡 나오니까 “선생님! 선생님! 저 장님이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의 죄 때문입니까? 아버지 엄마의 죄 때문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거에요. 예수님은 본인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고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런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하는 각도가 바이새인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사람들은 뭐 잘못되면 전부 다 우리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하느님이 벌을 줘가지고 그런 줄 압니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 따먹은 것부터 따지는 거에요. 그 원죄 때문에 그러니까 하느님이 노여워 가지고 인간에게 자꾸 벌을 준다는 거에요. 그래서 인간이 화를 당한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짐승 잡아 바쳐서 하느님의 노여움 풀어줘야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꾸 짐승 잡아 바치고 선지피를 흘려가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피비린내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가지고 죄를 용서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건 하느님을 얼마나 모욕되게 하는 것입니까?  유태인들은 그런 사고를 했습니다. 바울로는 짐승들 대신에 예수님을 제물로 삼은 거에요. 구약의 제사의 희생제를 예수님으로 대치하는 그런 교리를 딱 만들어 놓은 거에요. 예수님이 제물이다 이거요. 하느님이 기뻐해 가지고 원죄까지 속죄해 주었다 이거에요. 여러분들 자식 다 기르고 있지요? 여러분들 자식 하나 죽여가지고 제물로 바치고, 제사지내 면 기분 좋다고 용서해 주시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닙니까? 그런 하느님 아버지가 어디 있어요? 자기 자식 죽여가지고 제사지내는 것 가지고 기분 좋아 모든 죄 다 용서해 주는 그런 하느님이 어디 있어요? 하느님을 욕되게 하는 소리에요. 그건 잘못 생각한 거거든요. 예수님이 뭐라 했어요? “너희 땅에 있는 아버지들도 자식들이 떡을 달라 그러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으며 생선을 달라 그러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있는냐?” 그거에요 땅에 있는 너희 부모들도 너희한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느님 아버지가 너희들한테 좋은 것을 안 주겠느냐? 그게 뭐에요.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거에요. 영원한 생명 그걸 예수님이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로의 얘기하고 예수님 얘기하고는 전혀 핀트가 안 맞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지. 예수님에게 있어 죄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죄 얘기도 안해요. 뭐 잘못됐다 그러면 난 죄 용서해 줄테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그냥 아무것도 묻지 않고 용서해 주셨어요. 뭐 현장에서 간음하다 들켜도 다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것, 그것이 죄가 끝나게 하는 거에요.


여기서는 죄로 인해 트집 잡는 일이 없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바울로는 저쪽 사람들은 요즘도 그래요 전철타고 가다 보면 “예수 믿으시오. 예수 안 믿으면 죽어서 유황불 붙는 지옥에 갑니다.” 그거 협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을 우리가 어떻게 믿어요. 그런거 없어요. 그 사람들은 겁을 줘야 잘 믿는다고 말합니다. 제 책에도 글로 썼습니다만 종교 중에는 깨달음의 종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나 부처님처럼 최고급의 사람들의 깨달음의 신앙이거든요.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들 한테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예배의 의식을 가지고 하는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닫는 사람이 하는 예배는 의식을 별로 따지지 않아요. 헨리 소로우가 뭐라고 하였는가 하면, 깨달은 사람은 1억명 중에 한 사람이 나올까 말까 하다고 했어요. 그러면 지구상의 60억 명이면 몇 명입니까?. 60명 밖에 깨닫는 사람이 안 나온다는 거거든요. 그럼 못 깨닫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거에요. 못 깨닫는 사람들도 종교가 필요하잖아요. 그런 사람들 에게는 의식종교라도 있어야 되는 거지요. 찬송이라도 같이 부르고 의식을 통해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님이 언제 열두 제자들 두고서 “기도합시다”하고 기도했나요. 기도할 때도 당신, 홀로 산 속에 갔다 온 거거든요. 그런데 깨닫지를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의식 종교라도 필요한 거지요. 그것마저 없으면 예배를 볼 수가 없잖아요. 부처님도 그래요. 부처님도 자기 혼자 나무 밑에 가서 참선했지 무슨 예고하고 한 것 없어요. 그러나 얼의 나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약간의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지금도 그렇잖아요. 저능아들이나, 나이 많은 노인들이나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자꾸 깨달으라 하면 깨달아 집니까? 멀쩡한 사람도 평생 노력해도 깨닫기 쉽지가 않습니다. 스님과 목사님도 깨달을까 말까 하는데, 보통사람들에게 “깨달아라 깨달아라”하면 그것이 깨달아 지겠어요? 안 깨달아지는 거거든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의식종교가 필요한 거에요. 어렵다고 깨닫는 신앙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려워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은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만 해도 예루살렘의 인구가 4~5만 됐어요. 그런데 왜 예수님 주위에 제자 12명밖에 없었겠어요?. 깨달으라 그러니까 깨달아지는 사람이 없는 거지요.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제나의 사람들은 깨닫는 것을 모르니까 이 세상의 평안함과 부귀영화만 바라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의 종교는 구복종교(救福宗敎)가 되는거에요. 영원한 생명을 구하는게 아니라 땅에서 병 낫고 돈 벌고 출세하고 그것을 위해서 자꾸 기도하러 가는 거에요.


영원한 생명을 깨닫지 못하니까 그러한 의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걸 이용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샤먼, 무당(巫堂)이 하는 것입니다. 혹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나라의 종교 중에서 사람 많이 모이고 큰집 짖고 헌금을 많이 합니다. 너무 많아 트럭으로 은행에 싣고 가기도 합니다. 그런 교회들은 다 샤먼에 유능한 사람들이에요. 뭐 병 낫다든가 앞날을 점치고 너 뭐 어떻게 어떻게 됐는데 뭐 어떻게 어떻게 되겠다는 둥 뭐 아는 것처럼 점쳐주고 병 고쳐 주고 합니다. 또 뭡니까. 세 가지가 있는데 생각이 안 나네요. 그런 것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요일만 되면 신유기도회(神癒祈禱會)를 특별히 따로 열어요. 수요일이나 금요일마다 병 낫게 해 주는 기도회를 따로 엽니다. 그런 것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에 안양에 장로교 설종환 목사라는 원로 목사가 있었어요. 그 사람이 말하는 게 뭐냐 하면 무당노릇, 샤먼노릇을 잘하면 굉장히 영성이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신자들이 돈 가지고 자꾸 오니 목사들이 유혹을 받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목사들이 무당노릇을 자꾸 한다는 거에요. 그것 참 마음 아픈 이야기라는 거에요. 나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그게 솔직한 고백이지요.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세상에 구하지 말고, 하느님께 영원한 생명을 구해야 합니다. 이 땅의 뭐뭐 해달고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에게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나 부처님같은 분들은 세상의 부귀영화는 전혀 도외시 한 분들이에요. 두 벌 옷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목사노릇은 하지만 예수처럼 살긴 싫다고 그러더라고요.


뭐 질문할 거 있으시면 질문하세요. 그러니까 신앙을 무슨 신조 만들어 놓고 이것 믿어야 된다. 저것 믿어야 된다. 그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신조를 만든 일도 없어요. 이것 믿어야 된다. 뭐 삼위일체를 믿어야 한다. 뭐 믿어야 된다고 만든 것은 바울로쪽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 만든 일이 없어요. 깨달아야 되는 거지 어떤 관념으로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회개라는 말도 회개한다는 것을 해(悔)의 물을 이렇게 하면 바다 해(海)자 잖아요. 마음이 바다처럼 깊어가지고, 개(改), 이것이 일어날 기자(起)가 되거든요. 몸이 서는 것을 잡아야 되는 것, 마음 속에서 영원한 생명이 일어서는 것을 붙잡아야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이제 진짜배기지. 뭐 거짓말 좀 했고, 쫌 훔친 것 그런 것은 그냥 지나가는 것이지요. 다석 선생님이 그래요 지나간 것은 허울가자라는 것이에요. 과거라 할 때 허울이나 지나간 일은 잘했던지 못했던지 다 간에 그것은 허울이고 내 던져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뭐 잘못했던 것이 있으면 이다음에 또 안하면 그만인 것이지요. 지나간 일 그것 따질 것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억매여 가지고, 지난 해 뭐 잘못한 것 가지고 미래를 망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면 거기에 우리의 허물이 저절로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뭐 거짓말 좀 했고, 연애 좀 걸었다고 그것 가지고 죄의식에 전전긍긍할 필요 없어요. 그렇다고 잘못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죄란 것은 무엇입니까? 안하면 그만인 것이지요. 아까도 잠깐 저녁 먹으면서 얘기했습니다만은 국(國)자는 이렇게 딱 해 놓고 울타리를 쳐 놓고 창을 가지고 지키면서 여기에 큰 입구(口)를 하면은 나라국(國) 자가 되는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딱 해 놓고 마음 심(心)자를 이렇게 놓으면 혹(惑)자가 됩니다. 미혹(迷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리만 딱 옳다고 하면 미혹하는 것입니다. 우리 카톨릭이면 카톨릭, 개신교 장로교면 장로교, 감리교, 우리만 딱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렸다고 생각하면 미혹(迷惑)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아까 여기서 그렇게 말했습니다마는 영적으로 거듭나게 되면 다 똑같아요. 얼의 나라의 생명은 예수님의 얼의 나라, 내 얼의 나라, 다 똑같은 것입니다. 다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서로 다 통하게 되어 있어요. 불교나 기독교는 달라도 예수나 석가는 같고, 예수나 석가가 다르더라도 그분들이 바라는 절대자는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불교에는 하느님도 없는데 왜 똑같다고 그러느냐? 불교 사람들은 하느님 하면 또 질색을 하거든요. 절대자 소리도 듣기 싫어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불교에서 부처님이 신앙의 대상이 된 것은 얼마 안 돼요. 부처님 사후 500년이 지나서 불상이 생기고, 의식이 생겼거든요. 지금 보통 불교를 우상종교라 그러지만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더 철저하게 비우상종교가 불교에요. 500년 동안은 불상이 없었어요. 500년 동안을 무불상시대라고 말합니다. 부처님은 브라만교의 우상종교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 우상에 대해서 절하고 예배드리고 그러는 것을 전부 다 부정해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무신론자가 되어 버렸어요. 소크라테스가 그리스 사람들한테서 무신론자 소리를 듣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희랍 신들한테 얘기하고 그런 의식을 하지 안 하니까 사람들이 무신론자라고 하였던 것이지요.


그러면 붓다, 부처님은 무엇을 믿었느냐? 니르바나를 믿었습니다. 니르바나(nirvana)를 열반(涅槃)이라 그러잖아요. 니르바나가 하느님이에요. 그런데 지금 열반이라 하면 사람 죽었을 때나 열반이라 합니다. 진리를 깨달을 때, 법열(法悅)을 열반이라고 합니다. 열반을 하느님이라고 하지 않아요. 그런데 하느님 신앙이 불교에 남아 있습니다. 어디에 남아 있느냐 하면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데가 있어요. 적멸보궁(寂滅寶宮)은 월정사 위 상원사가 있습니다. 상원사 위에 올라가면 적멸보궁이 있어요. 거긴 불상이 없습니다. 적멸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니르바라를 뜻입니다. 니르바나를 한자로 번역을 하면 적멸이에요. 그것을 음역(音譯)을 하면 열반(涅槃)이 됩니다. 니르바나, 니원 그러기도 하는 적멸보궁에는 하느님을 모신, 니르바나라는 하느님을 모신 보배로운 궁전이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불상이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것이 부처님의 원 신앙을 나타내고 있는 거거든요. 그런데 스님들조차 왜 적멸보궁에 불상이 없는지를 모릅니다. 스님들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진신사리 모셔 놔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건 무식한 소리에요. 불교에서 진신사리는 뼈, 해골이잖아요. 그런 것 사리탑에다가 모셔 놓는 거에요. 스투파(stupa)라고 해서, 처음에는 요만한 것이 점점 발달해서 탑이되었어요. 사리탑은 무덤이에요. 해골 갖다 집어넣는 데거든요. 그러니까 적멸보궁에 진신사리 모셔놓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부처님의 신앙, 니르바나의 신앙을 증거해 보이는 거에요. 그러니까 불교가 제대로 되려면 니르바나의 신앙을 찾아야 되는 거에요. 아까도 신문을 보니까 요즘 서양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불교 대학을 다니는 두 분이 좌담을 하는데 제법 불교 얘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 혜초(慧超)라는 스님이 있잖아요. 왕오천축국전을 쓴 그 유명한 사람말이요. 그건 지리학적으로 유명한 거지 실제로 배워온 것은 뭐야 하면 밀교를 배워왔어요. 원리상자불교가 굴절이 되가지고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이 대승불교거든요. 그것도 굴절이 되가지고 밀교가 된 거거든요. 밀교가 뭐에요. 섹스교지요. 탄트라 배워온 게이 어디 제대로 배워온 거에요.


윤신부님도 서양에 가서 박사학위 받아가지고 오셨지만, 난 어떤 의미에서 딱하게 생각해요. 여러해 동안 서양에서 고생하며 공부하고 옵니다. 몇 년동안 안병무 박사도 독일 유학갔다 오느라고 38살에 장가를 갔나 그래요. 몇 년 작정한 것이 8년 걸렸다나요. 그러니까 지금 정양모 신부님도 그러는 거에요. 프랑스에서 4년 했지, 독일에서 6년 했지, 뭐 10년 동안 공부라고 왔다고 그래요. 그래서 배워온 것이 뭐냐 하면 바울로신학 배워왔어요. 예수님의 신앙 배워오지 않고, 바울로의 신학을 배워왔어요. 내가 성천아카데미에서 다석사상을 강의하였습니다. 류달영 박사님이 성천학교을 세워 성인교육을 하는 거거든요. 성천학교에서 각 나라의 고전을 가르칩니다.  불교, 유교, 심지어 이슬람 종교까지 가르치거든요. 그런데 기독교 가르칠 강사를 구하였습니다. 류달영 선생이 시인 구상 선생하고 친하거든요. 누굴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정양모 교수를 추천을 하더래요. 류달영 선생님이 저에게 신부를 추천하는데 신부가 무슨 좋은 얘길 하겠느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분은 그런 분이 아니라고 말해서 정양모 신부님이 강의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정양모 교수님이 공관복음에서는 1인자에요. 대단한 분이죠. 그런데 그 분이 왔을 때 내가 쓴 다석 선생의 책을 한 권 주었어요. 그러니까 이 양반이 그 책을 보고는 자기 말대로 ‘깨꼬닥’ 했대요. 한겨레신문사 기자하고 한 쪽에 가서 취재를 하는데, 정양모 신부님이 다석사상을 보고 그만 ‘깨꼬닥’했다고 그래요. 그야말로 서양에서는 배우지 못한 사상을 여기에서 다 배운거에요. 한 번은 정양모 신부님이 전화를 했더라구요.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지요. 자기가 논문을 쓰는데 좀 봐달라는 거예요. 이거 논문 써도 괜찮으냐고 물어요. 보니까 괜찮대요. 정양모 신부님이 논문 봐 줬다고 차 한잔을 샀어요. 그리고 63빌딩에 가서 부풰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 때 말이 ‘아, 선생님 속기 해 놓은 원고가  있다면서요?’ ‘아, 있지요.’ 그거 한 번 볼 수 없느냐고 부탁을 하였어요. 그게 옛날에 원고지 없을 때 써가지고 원고지도 원고지인데 막 날려 써가지고 형펀 없어 보기가 어려워요. 그걸 줬더니 몇 권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찾아가지고 갖다 줬습니다. 정양모 신부님이 그걸 다 읽어 본 거에요. 그리고 이것을 출판하면 좋지 않겠느냐 물어요. 그래서 누가 출판하겠느냐고 말했지요. 우리는 돈이 없어서 자비출판을 해야 하는데 어렵습니다고 말했어요.  자기가 모금운동을 하여 출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아, 그야말로 불감청이즉 고소원(不敢請耳 固所願)이라고, 그래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모금하여 「다석강의」를 출판한거에요. 그래 서양에서 10년을 배워서 학위까지 따가지고 왔는데 그 분이 그랬어요. 다석사상에 홀랑 빠졌다는 것입니다. 학자적 양심이 있는거거든요. 그래서 며칠 전에 여기 이선생님 보고 다석 선생님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연구한 것을 책 낼려고 지금 그래요. 그게 왜 그래요. 똑바른 정신을 가지고 학자적 양심으로 신앙이 깊은 사람들은 다석사상을 한 번 접하게 되면 그야말로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어디서도 배우지 못한 것을 듣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 서양에 가 봐요. 오늘과 같은 이런 얘기 못들어요. 그렇잖아요. 오늘 저녁 여기니까 이렇게 들을 수 있는거지. 그래서 머지 않아서 지금 이걸 영어로 번역이 되면 서양 학자들이 보고 깜짝 놀랄거라고 정양모 교수님이 그래요. 그런데 돈이 있어야지요. 그래도 이게 몇 권이라도 맛보아야 그 쪽에서 알고 자기네들이 달려들어서 번역을 하겠다고 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래도 한 권은 우리 돈으로 번역을 해서 보여줘야 될텐데, 그걸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별로 없어요. 오강남 교수도 미주 카나다에 있으니까 미국어 잘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못하다 그래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우리말로 된 것도 읽어 보면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니까. 그걸 어떻게 영어로 번역을 해요. 그래서 꽁무니를 빼더라고요.


그만 하겠습니다. 질문 없습니까?


*질문 드리겠습니다. 멀리까지 오셔서 처음 들어보는 접하기 힘든 그런 말씀을 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듣다 보니까 다석 선생님께서도 온통하나라는 것을 상당히 많이 강조하셨는데, 그 온통 하나에는 영과 육이 같이 있고, 성속도 같이 모든 것이 한테 어울려 지는 것으로 저는 지금까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말씀하실 때는 육손에 대해서는 별로 의미를 두지 않으시고, 법손에 대해서만 상당히 큰 의미를 두시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해하고 있기로는 어차피 영도 육에 담겨져야 되지 않는가 싶어서 육손의 삶도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부분에 대한 것을 한 번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고요. 또 한 가지는 다석 선생님의 ‘얼나로 솟나야 된다’는 말씀은 어떤 개인 개인들이 하느님 나라로 천명되어야 한다는 그런 걸로 저는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불교용어로는 소승적인 방향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거를 좀 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그런 쪽으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이게 나 하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그런 사상은 아닌 걸로 저는 이해하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보충설명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우리 육체라는 거는요. 물론 여러분들 잘 모르셔서 그렇지 내가 32살 때 상처를 했어요. 위암으로 집사람이 죽었어요. 그런데 이제 가장 가깝게 있는 사람이 한 번 죽어보세요, 그 육체에 얼마만큼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이건 그냥 죽으면 의미를 아무리 붙이려고 해도 붙일 수가 없어요. 그렇잖아요. 여러분들 가까운 사람들이 한 번 죽는 걸 을 보세요. 가까운 사람 일곱 사람이 차에 치어 죽으니까 내 생각이 달라지더라고. 여기에 의미를 두고 싶지요. 그런데 그 자체가 허무한 걸 어떠합니까? 송장이 되 가지고 나자빠져 있는데, 거기 가서 의미를 아무리 찾아보세요. 그래서 우리는 의미가 있다 그러면 살아있는 동안에 얼마만큼 하느님을 그리워하는가 그게 의미 있지. 하느님하면, 우리는 개체이고 하느님은 전체인데 우리가 전체하고 어떤 연결을 맺어야 그게 의미 있는 것이지, 그 이외에는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나 부처님이나 세상적으로 말하면 무슨 돈이 있습니까? 무슨 벼슬을 했습니까? 아무 것도 아니거든요. 그러나 하느님하고의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전해오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이 세상사는 동안에 얼마만큼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하느님을 사모하느냐에 의미가 있는 거지 그 이외에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 의미를 찾을 데가 어디 있어요. 죽은 송장들한테서는 의미를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러나 이제 우리는 몸뚱이를 가지고 있으니까 어떤 분들을 그래요 죽어가지고 하늘나라에 가 사는 줄로 자꾸 아는데, 거기 가서 죽은 아버지 만나고, 죽은 엄마 만나고, 죽은 마누라 만나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돼요. 그건 미신 중의 미신이에요. 개체는 여기서 끝나는 거에요. 여기서 생긴 것은 여기서 끝나는 것입니다. 이게 하늘나라까지 연결돼 가지고 연속극 후편 보듯이 저기 가가지고 또 뭐 하는 것, 그런 거 없어요. 영이 하느님에게로 돌아가는 거지요.  하느님의 영이 우리에게 왔다가 하느님의 영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하느님과 하나 되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박영호가 거기 가서 예수님 만나고 유영모 만나고, 함석헌이 만나고, 부처님 만나고 그런 거 없어요. 그러려면 거기 또 불교도 있어야 하고, 기독교도 있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성경은 이 땅에서 필요하고, 불경은 이 땅에서 필요한 거지 하늘나라 가서 불경 읽고 거기 가서 찬송 부르고 또 성경 보고 그럴것 같아요? 그런거 없어요. 거기는 하느님이 한 분 계시다가 우리는 이렇게 손오공이 털 하나 뽑아서 후 불어서 많은 손오공이 생겼다가 털 하나로 돌아가듯이, 우리는 하느님의 일부분으로 이렇게 됐다가 다시 하느님으로 복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 영생하는 거지 박영호로 영생하고 그런 거 없어요. 하느님이 이렇게 됐으니까 우리는 다시 하느님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장자는 복통위일(復通爲一)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은 다시 하나로 귀일(歸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 되돌아 가는 거죠. 원래 하느님이었으니까요. 우리의 본 모습이 하느님인 거에요. 하느님은 ‘참나’고 우리는 ‘거짓나’에요. 이게 ‘참나’로 돌아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여기 청주의 김인국 신부(청주 금천동성당)가 이 소리를 하니까 참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그러더라고요. 신부님이 그러는데 여러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뭐가 후속편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되잖아요. 지금 아들 딸들하고 같이 한 번 살고, 남편하고도 거기 가서도 뽀뽀하고 그랬으면 좋겠죠. 그런 것 없어요.


*질문 하나 드리겠습니다. 아까 말씀 중에 예수님 다르고, 바울로 정신이 다르다 이렇게 하셨는데 바울은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제자는 아니었지만 늦게 예수님을 만나서 제자가 되잖았습니까? 그런데 바울이 전한 서신서를 보면 그것들이 주로 신약성경을 이루었거든요. 그러면 신약성경을 이루고 있는 바울서신에 대해서 오늘날 우리가 그것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신학공부 한 윤신부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이왕 내려 왔으니까 한 마디 하고 갈게요. 바울 서신이 14편인가 있는데 거기에서 친서는 7개라고 그러기도 하고, 나중에 바울 이름으로 쓴 것도 있다고 합니다. 다 바울이 쓴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얘기하고들 있는데, 어쨌든 바울은 원래 박해를 하다가 돌아 선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그 바울 편지를 보세요. 예수님은 이렇게 말을 했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고 이것은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은 한 마디도 없어요. 바울은 예수님을 본 적도 없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적도 없어요. 그런데 예수의 사상을 알려면 예수의 제자들한테 가서 들어야 되는데 제자들이 바울을 싫어했어요. 나쁜 놈이라 그러고. 그래서 야고보 말하는 것 보고 베드로를 야단치기도 하였습니다. 베드로하고 일주일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우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혀 몰라요. 그건 바울 편지가 얘길 해요. 바울 편지를 한 번 보세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세요. 그 때는 아직 성경이 없었거든요.


*그 때 구약성경이 있었던 것이 아니나요.  

아니야. 예수님의 말씀인 신약성경이 없으니까 없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성경 4복음 보고 우리가 알잖아요. 그 때는 4복음이 아직 없었어요. 바울 편지가 먼저 써졌거든요. 그러니까 예수님 제자들이 아니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 수가 없는 거에요. 무슨 책이 없으니까요. 녹음기 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 것도 없었어요. 제자들한테 미움을 받아 가지고 접촉이 안됐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얘기한 것은 예수님을 자기 교리 만드는 양념으로 삼아가지고 자기 교리를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어요. 그러니 바울이 예수님을 갖다가 자기네 교리 만드는, 속죄교리를 만드는 자료로 이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받드는 소리는 엄청 많이 했어요. 그건 뭐 사실입니다. 바울로 인해서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많이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리우스파하고 아다나시오파가 있었는데, 아리우스파는 예수님 쪽 영성파고, 아타나시우스는 바울쪽에 가까웠지요. 아타나시우스가 325년 니케아 회의 이후에 4세기 그 때 콘스탄티노플 주교가 되면서, 대주교가 된거죠. 대주교가 되면서 지금의 신약성경을 만들었어요. 27권을 가지고 신약성경을 만들면서 바울편지를 많이 집어넣고,  그리고 4복음서를 넣어 만들었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다 불 태워서 없애버리라고 그랬거든요. 그게 왜 그래요? 바울 신앙은 영성신앙이 아니에요. 속죄신앙이지요. 영성신앙하고 속죄신앙하고 구별하셔야 되요. 그게 예수님의 정통신앙이 영성신앙이잖아요. 그게 두려우니까 그걸 배격하느라고 다 없애버리라 그런거 거든요. 그 중에 발견된 것이 나그함마디(아랍어 نجع حمادي, Nag Hammadi)의 도마복음서(The Gospel of Thomas)가 발견이 됐는데, 도마복음서 읽어 보면 지금 여러분들 깜짝 놀랄거예요. 여러분들 읽어 보셨겠지만 거기는 동정녀 탄생설도 없고, 예수 부활설도 없고, 이적 기사 이야기도 없고, 불경이나 노자하고 거의 통하는 그런 내용이 있어요. 지금 그렇잖아요.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생명을 유지하려면 동양 사상을 받아 들여야 한다고 하는데,  도마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 사상만 부활시켜도 동양사상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의 사상만 가지고도 훌륭하게 하고도 남아요. 그걸 지금 우리가 도마복음서에서 볼 수 있어요.


* 사실 도마는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느냐 했을 때, 믿지 못했던 제자 중의 한 사람이거든요.


누가요?


*도마가요.


그게 왜 그러냐면 도마를 영성신앙인의 주체잖아요. 야고보하고 도마가 이제 주축아니까 바울의 신앙을 따르는 사람들이 바울 편지를 많이 넣으면서 베드로 전서니 베드로 후서니 하는 것을 넣었습니다. 야고보전서 등은 전부 다 가짜거든요. 왜 그러냐 하면 베드로 편지를  넣었는데, 딴 제자의 사본들이 전혀 없으면 형편이 안 맞으니까 다 집어 넣은 거에요. 베드로는 무식한 사람인데 베드로 편지가 어디 있어요. 원래는 요한 복음을 4복음에 안 넣었거든요. 뒤에다가 넣었잖아요. 넣는 동안에 다 고칠 것 고쳤지요. 도마가 제일 적수가 되니까 도마를 요한하고 망신을 시키려고 바울로 쪽에서 일부러 날조한 거에요.


*그럼 성경을 완전히 다 뒤 엎어야 되겠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니까 도마복음서에는 그리스도라는 말 조차도 없어요. 거기서는 예수를 나자리안(Nazarian) 그렇지, 헬라쪽 사람들이 그리스도라 그랬던 거지요. 원 예수쪽에서는 나자리안이라 그래요. 나자렛 예수라 그랬지 그리스도란 말 쓸 줄도 몰라요. 그런데 전부 다 그리스도 그리스도 다 돼 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이것은 전부다 바울로 쪽에서 4복음서를 갖다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만 머리에 두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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