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을 올려주신 나효임, 전홍표, 박영찬, 양원석님께 감사드립니다.
마음 비움에 대한 많은 글이 올라 있어 이에 대한 다석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금강경 제10분〈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 나오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과
곡물의 수량을 되는 됫박을 비유로 들면서
마음자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다석일지 제4권 361쪽 ‘주일무적’에서 인용)
<길>이라는 것은 영원히 오고 영원히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은 <나>가 가고 오고 한다.
내가 자꾸 그 길을 오가면 내가 곧 길이 된다.
이쯤 되면 내가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된다.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했다는데,
<나>가 간다면 길 따로 나 따로가 있을 리 없다.
내가 없으면 길이 없다.
길이 없다고 내가 못 가는 것이 아니다.
나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나 따로, 길 따로가 아니다.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한 것은,
나와 길, 나와 진리, 나와 생명이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 없으면 진리고 생명이고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나>가 가고<나>가 오는 것이다. 그때 <참 나>가 된다.
우리는 사는 것을 사람으로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산다고 말하면 또 거짓말이 된다.
<나>는 정신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당에는 궁신지화(窮神知化)에 이른다.
한웋님이 나더러 그 따위 해석을 한다고 야단할지 모른다.
나중에 가보면 알 일이다. 내가 사는 것은 내 <멋>에 사는 것이다.
기차 안에서 자리다툼을 하다가 종착역에 다다르면, 그 자리를 내버리고 내린다.
자기가 의지했던 자리이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서슴없이 버린다.
예수도 <자리다툼>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사람들이 다툴 때 다투더라고 어느 때 가서는 깨끗이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기차간에서 다툰 그 자리는 거저다.
우리의 싸움도 기차의 좌석 버리듯 그쯤 깨끗하게 버렸으면 한다.
우리가 무주(無住)라고 볼 때
주(住)를 <있다>, <머문다>는 정도의 단수한 의미로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는 못 살기 때문에 <머문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날이 저물면 묵어가라고 한다.
또는 더 묵어가지 않고 왜 벌써 떠나는 거냐고 말리기도 한다.
묵어가는 것이 편할 것 같기도 하나 묵으면 머무르는 세계가 된다.
무주계(無住界)에서 어떻게 자꾸 묵겠는가?
무주계에서 더 묵어가라고 하는 심정, 또 묵어보았으면 하는 심정,
그것은 하루라도 더 이 상대세계에 얽매이기를 소원하는 생각이다.
묵는다는 것은 어떤 뜻으로는 불행을 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묵는다는 것은 실상은 몸뚱이(껍데기)만 묵는 것이지,
<나>가 묵는 것이 아니다.
육십 평생 묵었는데 또 묵으란 말인가?
묵는다는 것은 몸을 묶는 것이지
정신이나 생각을 태우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것에는 묵는다는 것이 하나도 없다.
새롭게 나가는 것이다.
생명은 자기 갈 곳을 가게 되어 있지 묵지를 못한다.
하루 밤을 묵었으면 <나>가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자리는 묵은 것도 가는 것이고 가는 것도 묵은 것이다.
나는 묵는 것이 아니다.
묵는다면 물 속 밑바닥에 줄곧 가라앉아 있듯이 묵는 것인데,
<나>라는 것은 새로 나아가서 비로소 사는 것이다.
나가되 무한궤도(無限軌道)에 나간다.
무한궤도에 올라가지만 그 자체는 조금도 가지 않는 것처럼 간다.
그 무한궤도 자체에라도 묵으면, 그것 도한 중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묵으면 아예 죽는 줄 알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해야 한다는 것이다.
머무를 것이 없는 것이 생명이다.
몸뚱이만 가지고 맘을 내면 견물생심(見物生心)이 된다.
몸뚱이의 충족은 죄악을 낳는다.
맛을 그리워하는 것은 못쓴다.
무엇을 좀 갖겠다든지, 좋은 소식 좀 듣겠다고 하는 것은
실제 마음이 거기에 머뭇거리는 증거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의 <우상>이니 삼가야 한다.
우리는 머무는 것 없이,
내 맘 머물지 말고 마음을 자꾸 나가게 해야 한다.
내 마음을 <내>가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희로애락(喜怒哀樂) 따위 태울 것은 태워야 한다.
즉 희로애락을 화합(和合)시켜 나가는 가운데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은 본래 빈 데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중화(中和)의 길이다. 이것이 바르게 산다는 것이다.
되(升)는 될 것 다 되서 곧 비워 놔야지 다음 될 것을 될 수 있다.
될 것 자꾸 되어 넘기는 것이 화(和)이다.
중용(中庸)이라는 것도, 될 것 다 되고 바로 넘긴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의 존재를, 됫박으로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됫박은 늘 비워 두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금방 될 수 있다.
될 것을 되면 금방 넘겨야 한다.
이것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자리이다.
우리의 마음은 머무는 데가 없어야 한다.
어디에 들어앉지 말아야 한다.
이 불교의 가르침은 깊은 뜻이 있다.
처음부터 마음을 내지(生心) 말아야 하는데,
사는 데는 생심(生心)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생심(生心)해도 금방 되를 넘겨야 한다.
곡식을 담아 두어서는 안 된다.
생심(生心)해도 머무르는 데가 없어야 한다(應無所住).
불교에서는 여섯 가지 금한 것이 있는데,
고운 것 먹지 말고,
고운소리 듣지 말고,
고운 냄새 맡지 말고,
고운 색 취하지 말고 등이다.
마음 비움에 대한 많은 글이 올라 있어 이에 대한 다석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금강경 제10분〈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에 나오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과
곡물의 수량을 되는 됫박을 비유로 들면서
마음자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다석일지 제4권 361쪽 ‘주일무적’에서 인용)
<길>이라는 것은 영원히 오고 영원히 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은 <나>가 가고 오고 한다.
내가 자꾸 그 길을 오가면 내가 곧 길이 된다.
이쯤 되면 내가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된다.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고 했다는데,
<나>가 간다면 길 따로 나 따로가 있을 리 없다.
내가 없으면 길이 없다.
길이 없다고 내가 못 가는 것이 아니다.
나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나 따로, 길 따로가 아니다.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한 것은,
나와 길, 나와 진리, 나와 생명이 둘이 아니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나 없으면 진리고 생명이고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나>가 가고<나>가 오는 것이다. 그때 <참 나>가 된다.
우리는 사는 것을 사람으로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산다고 말하면 또 거짓말이 된다.
<나>는 정신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종당에는 궁신지화(窮神知化)에 이른다.
한웋님이 나더러 그 따위 해석을 한다고 야단할지 모른다.
나중에 가보면 알 일이다. 내가 사는 것은 내 <멋>에 사는 것이다.
기차 안에서 자리다툼을 하다가 종착역에 다다르면, 그 자리를 내버리고 내린다.
자기가 의지했던 자리이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서슴없이 버린다.
예수도 <자리다툼>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사람들이 다툴 때 다투더라고 어느 때 가서는 깨끗이 그만두었으면 좋겠다.
기차간에서 다툰 그 자리는 거저다.
우리의 싸움도 기차의 좌석 버리듯 그쯤 깨끗하게 버렸으면 한다.
우리가 무주(無住)라고 볼 때
주(住)를 <있다>, <머문다>는 정도의 단수한 의미로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세상을 산다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는 못 살기 때문에 <머문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언제부터 언제까지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 아니다.
날이 저물면 묵어가라고 한다.
또는 더 묵어가지 않고 왜 벌써 떠나는 거냐고 말리기도 한다.
묵어가는 것이 편할 것 같기도 하나 묵으면 머무르는 세계가 된다.
무주계(無住界)에서 어떻게 자꾸 묵겠는가?
무주계에서 더 묵어가라고 하는 심정, 또 묵어보았으면 하는 심정,
그것은 하루라도 더 이 상대세계에 얽매이기를 소원하는 생각이다.
묵는다는 것은 어떤 뜻으로는 불행을 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상에 묵는다는 것은 실상은 몸뚱이(껍데기)만 묵는 것이지,
<나>가 묵는 것이 아니다.
육십 평생 묵었는데 또 묵으란 말인가?
묵는다는 것은 몸을 묶는 것이지
정신이나 생각을 태우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나>라는 것에는 묵는다는 것이 하나도 없다.
새롭게 나가는 것이다.
생명은 자기 갈 곳을 가게 되어 있지 묵지를 못한다.
하루 밤을 묵었으면 <나>가 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의 자리는 묵은 것도 가는 것이고 가는 것도 묵은 것이다.
나는 묵는 것이 아니다.
묵는다면 물 속 밑바닥에 줄곧 가라앉아 있듯이 묵는 것인데,
<나>라는 것은 새로 나아가서 비로소 사는 것이다.
나가되 무한궤도(無限軌道)에 나간다.
무한궤도에 올라가지만 그 자체는 조금도 가지 않는 것처럼 간다.
그 무한궤도 자체에라도 묵으면, 그것 도한 중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묵으면 아예 죽는 줄 알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해야 한다는 것이다.
머무를 것이 없는 것이 생명이다.
몸뚱이만 가지고 맘을 내면 견물생심(見物生心)이 된다.
몸뚱이의 충족은 죄악을 낳는다.
맛을 그리워하는 것은 못쓴다.
무엇을 좀 갖겠다든지, 좋은 소식 좀 듣겠다고 하는 것은
실제 마음이 거기에 머뭇거리는 증거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의 <우상>이니 삼가야 한다.
우리는 머무는 것 없이,
내 맘 머물지 말고 마음을 자꾸 나가게 해야 한다.
내 마음을 <내>가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희로애락(喜怒哀樂) 따위 태울 것은 태워야 한다.
즉 희로애락을 화합(和合)시켜 나가는 가운데 길을 가야 한다.
그것은 본래 빈 데서 이루어진다.
그것이 중화(中和)의 길이다. 이것이 바르게 산다는 것이다.
되(升)는 될 것 다 되서 곧 비워 놔야지 다음 될 것을 될 수 있다.
될 것 자꾸 되어 넘기는 것이 화(和)이다.
중용(中庸)이라는 것도, 될 것 다 되고 바로 넘긴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상에 있는 동안 우리의 존재를, 됫박으로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됫박은 늘 비워 두어야 한다. 그래야 다음에 금방 될 수 있다.
될 것을 되면 금방 넘겨야 한다.
이것이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의 자리이다.
우리의 마음은 머무는 데가 없어야 한다.
어디에 들어앉지 말아야 한다.
이 불교의 가르침은 깊은 뜻이 있다.
처음부터 마음을 내지(生心) 말아야 하는데,
사는 데는 생심(生心)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생심(生心)해도 금방 되를 넘겨야 한다.
곡식을 담아 두어서는 안 된다.
생심(生心)해도 머무르는 데가 없어야 한다(應無所住).
불교에서는 여섯 가지 금한 것이 있는데,
고운 것 먹지 말고,
고운소리 듣지 말고,
고운 냄새 맡지 말고,
고운 색 취하지 말고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