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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석가의 영성(얼나)은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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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석은 예수 석가와 한 반렬에 선다.

 

다석 류영모는 이따금 말하기를 나는 이 세상에 나와서 한 일이 없다. 굳이 묻는다면 나는 비교 종교를 하였다고나 할 것이다. 예수 석가 공자를 공부해 보았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예수 석가를 다 몰랐다. 누구를 존경하고 좇는 것은 다 제 욕심을 채우려드니까 모르게 되는 거다. 예수 석가도 바른 말을 하였는데 사람들이 못 알아들었다. 공자(孔子)는 모르는 게 없는 줄로 알았다. 그게 잘못인 것이다. 나는 옛사람으로 예수 석가를 좋아한다. 요즘사람으로는 톨스토이 간디를 좋아 한다고 하였다. 이 말씀은 다석 어록에 실려 있지만 이 사람의 귀로 직접 들었다.

그러면 예수 석가는 무었을 한 사람들인가. 하늘을 치어다보고 우주의 근본이 빔(허공)임을 깨달았다. 또한 나 자신을 들여다보고 내 맘속에 영원한 생명인 얼(성령)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빔과 얼이 하나인 하느님임을 깨달았다. 이천년 전 예수 석가가 깨달은 이것을 다석 류영모도 한가지로 깨달았다. 이에 다석 류영모도 예수 석가와 한 반렬에 서는 하느님(니르나바님) 아들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석가 그리고 다석은 무상(無常)한 물질세계를 넘어 허공의 진실됨을 알았고 제나(몸나)의 허무함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 우주의 근원이 되시고 임자 되시는 하느님 아버지(니르바나님)를 만난 것이다. (허공)과 얼(靈性)은 유무(有無)를 초월한 없이 계시는 절대(온통)이시다. 천지에 그득한 만물은 없이 계시는 하느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예수는 말하기를 내 아버지(하느님)는 만유(萬有)보다 크시다”(요한10:29)고 하였다. 만유는 이 우주의 모든 물질을 뜻한다. 만유보다 큰 것은 허공밖에 없다. 또 이르기를영원히 사는 것은 얼()이니 몸은 쓸데없다”(요한6:63)고 하였다. 예수는 가장자리 없는 빔(허공)이요. 바람같은 얼(성령)의 하느님이 계심을 깨달았다. 그래서 얼생명으로는하느님 아버지와 내가 하나이다.”(요한10:30)라고 말하였다.

석가는모든 물질은 항상됨이 없다. 그럼으로 물질에 집착하지 않게된다. 허공만이 항상되다. 사람의 의식 작용도 항상됨이 없다. 제나를 넘어서 얼나를 증득한다.”(잡아함경1. 무상경 간추림)“물질을 없이 보고 짐승된 욕심을 없애여 모든 잡생각을 일으키지 않아 제나를 넘어서 얼나가 참나 임을 깨달으며 얼나(Dharma)의근원인 니르바나(Nirvana)를 만나게 된다.”(잡아함경.28 열반경 간추림)

다석은 사람이 되자면 하늘을 치어다보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사람은 천문학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하늘을 쳐다보면서 살아야한다. 보통상식으로도 별자리쯤은 기억할 만큼 하늘을 쳐다보아야한다. 그저 하늘을 쳐다보고 올라가는 것이 어렵다고 할 것 같으면 안 된다. 별 하늘을 쳐다보고 그 다음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위(허공의 하느님)까지 바라보아야한다.

이와는 달리 짐승은 머리를 땅으로 숙이고 횡행(橫行)한다. 천하를 횡행하고 싶다는 영웅들도 죄다가 짐승들이다. 사람의 마음에 물욕이 횡행하면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끊어진다. 마르크스나 엥겔스가 처음에는 공평하게 먹어야 한다는 이상은 좋았지만 먹을 것에만 횡행하면 고만 짐승 노릇 밖에 될 수 없다. 그믐이나 초하룻날 밤에는 하늘에 그득한 밝은 별들을 볼 수 있다. 그 때 우리의 눈은 가까운 데서는 볼 것이 없다. 멀리 내다보는 우리 맘에는 어떤 진리 정신의 빛이 별빛처럼 쏟아져 온다. 그것이 하느님의 얼이다. 석가가 새벽 샛별을 보고 얼나(Dharma)를 깨달은 것이 그래서다.”(류영모다석어록)

노자(老子)는 없이 계시는 허공()을 무극(無極)이라하고 무극의 허공이 있()의 물질을 안고 있음을 태극(太極)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만물의 근원이요 임자인 것은 허공인 빔이다. 다석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생명이 피어 한없이 넓어지면 빔(허공)에 다다를 것이다. 곧 영생에 드는 것이다. (허공)은 생명의 근원이요 만물의 근원이다. 곧 하느님이시다. 나도 인격적인 하느님을 생각한다. 사람 같은 인격이 아닌 신격(神格)이다. () ()을 초월하였다. 하느님을 찾는데 물질에 만족하면 안 된다. 있는 것에 만족 못하니까 없이 계시는 하느님을 찾는다. 본래 없는(本無) 이것을 있다고 하고 싶다. 본래 없는 것이 바로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시다. 절대공(絶對空)을 사모한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라야 참이다. 허공이 참인 하느님이다. 허공 없이 실존이고 진실이고 어디에 있는가? 우주조차도 허공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허공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장엄(장엄)은 정말이지 허공이 장업하다. 이 우주는 허공을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붓긋같은 몸()만 보고 허공을 못 보다니 제가 좀팽이 같은 것이라서 몬()밖에 못 본다.”(류영모다석어록)

그러나 빈탕한데인 허공인 하느님을 아는 것은 제나(ego)가 참나가 아님을 알고 부정하고 넘어설 때 하느님이 주시는 얼나로서 안다. 그러므로 예수 석가는 어버이가 낳아준 제나(ego)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말할 것 없이 다석 류영모도 그러하였다.

예수는 말하였다.“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은 내가 얼나의 생명을 아버지로부터 받고 어버이가 낳은 제나(ego) 이를 버렸음이라. 제나를 내게서 빼앗는 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한 10:17~18) 그러니 너희들도 제나를 버리고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얼나로 솟나라고 가르친 것이다. 석가가 깨달음을 이룬 것도 바로 고집멸도4성제이다. 괴론 몸과 모인 맘의 제나를 없애는 것이 얼나(Dharma)로 솟나는 길이다라는 뜻이다. 예수 석가는 그리하여 하느님(니르바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참나로 깨달은 것이다. 예수의 프뉴마(πνενμα)나 석가의 다르마(Dharma)는 뜻은 같다. 하느님(니르바나님)으부터 받은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이다. 어버이가 낳아준 제나를 버리고 하느님이 주신 얼나로 산 이가 하느님(니르바나님)의 아들이다.

다석 류영모도 한가지 깨달음을 이뤄 같은 말씀을 하였다. “짐승이요 거짓나인 제나(ego)가 죽어 없어져야 하느님의  아들이요 참나인 얼나로 살 수 있다. 거짓나인 제나가 온전히 없어져야 참나인 얼나가 내 맘 속에 나타나 하느님의 말씀과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다. 그것이 예수 석가의 삶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얼나가 우주의 임자요 또한 제나의 임자이다. 제나의 임자란 제나의 수성(獸性)을 다스려 수성에서 해탈한 자유(自由)의 임자(주체)란 뜻이다. 자유의 인격이 되어야 남을 나로 생각해 줄 수 있다. 제나가 죽고 수성이 없어져 마음이 깨끗해지면 하느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우리의 삶이 제나(ego)의 삶을 끝내고 얼나의 삶을 비롯하는 것이 대학(大學:유교경전)에서 말하는 종시(終始)이고 예수가 회개하라는 인격혁명이다. 이런 인격혁명을(메타노에오)을 하지 않고 예수 석가를 좇는다는 것은 헛일이다. 어버이가 낳아준 거짓나인 제나는 참나가 아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얼나가 참나이다. 제나(몸나)는 죽으면 흙 한줌이고 재 한줌이다. 그러나 참나인 얼나는 하느님 나라인 얼나라를 세운다. 하느님의 생명인 얼은 우주 안팎으로 충만한 호연지기(浩然之氣)의 얼나이다. 그러므로 지강지대(至剛至大)하여 아무도 헤아릴 수 없고 무엇에도 견줄 수 없다. 예수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한18:36)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예수가 말하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요한:14:6~7)고 하였다. 여기에 예수가 말한 나란 예수의 제나(몸나)가 아니고 얼나이다. 어떤 이가 예수에게 선한 선생님이라고 불렀을 때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마가10:18)고 대답하였다. 예수는 이처럼 겸손하였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를 신격화시킨 말을 들었다면 예수는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을 것이다. 얼나는 위(하느님)에서 주신 생명이다. 하느님이 주신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인데 하느님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므로 얼나를 깨달은 이만이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얼나를 깨닫지도 않고서 하느님이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얼나를 깨닫지 못한 이가 하느님이 있다는 말도 잘못이다. 그는 분명 하느님이 아닌 것을 하느님으로 받드는 우상숭배자임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말하였다.“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하느님을 예배한다.”(요한4:22) 얼나를 깨닫지 못하고서 하느님께 예배를 올리는 것은 보이는 우상이든 안 보이는 우상이든 그 하느님은 우상인 것이다. 그래서 기도의 내용도 무엇을 해달라는 요구의 기도이다. 그 대가로 어떤 재물을 반드시 바친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도 제물을 바치는 예배를 올린 적이 없다. 산 속에 가서 기도를 드릴 때도 제물을 바친 적이 없다. 얼이신 하느님 아버지이라 맘속에 오신 얼로 기도를 하였다.

얼나를 깨닫지 못하여도 하느님은 우주인 온통(전체)이시고 나는 낱동(부분)이다. 부분이 전체를 밝히고 그리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미국의 사상가 소로는 아예 하느님을 우주정신(the spirit of university)이라고 하였다. 이정도의 신관이라도 가지는 것이 사람이다. 얼나를 깨달았으면 깨달은 얼나로 못 깨달았으면 얼나를 깨달으려고 하느님 앞에 기도를 올려야 한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은 결코 권력을 잡으려고, 재물을 모으려고, 명성을 얻으려고 온 것이 아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얼생명을 받아 하느님 아들 노릇을 하려고 온 것이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 하느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한4:23~24) 이 말씀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낱말은 3개다. 신령, 진정, 예배가 그것이다. 이 세 낱말을 잘못 옮겼다. 그 때 옮긴이들이 낱말만 알았지 예수가 한 말씀의 뜻을 올바르게 몰랐던 것이다. 신령은 헬라어 프뉴마(πνενμα)로 얼이란 뜻이다. 진정은 헬라어 알레세이아(αληθεια)로 참(진리)이란 뜻이다. 예배는 헬라어 프로스퀴네오(προσκνεω)로 절하다. 사모하다. 사랑하다는 뜻이다. 기도 예배는 절만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이 알기 쉽게 다시 옮겨 본다.

하느님 아버지를 참으로 사랑하고자 하는 이는 참인 얼나로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버지께서 주신 얼나를 참나로 깨달은 이가 그 얼나로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이를 찾으신다. 그 얼나는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얼생명이시라 참인 얼로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해야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태아가 어머니를 다 안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전혀 모른다는 것 또한 말이 안 된다. 태아는 어머니의 심장 박동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기억한다고 한다. 어머니가 슬퍼하는 것 분노하는 것 기뻐하는 것도 안다고 한다. 모르는 것만큼 아는 것이다. 이를 지부지(知不知)라고 노자(老子)와 소크라테스가 말하였다. 우리의 기도는 태아가 어머니를 느끼듯 하느님을 느끼는 데서 행복함을 느낀다. 어머니는 태아의 태동을 느낄 때 기쁨을 느끼듯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아들인 얼나의 기도를 받으시고 기뻐하신다. 다석은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께서도 나를 사랑해 주심을 느낀다고 하였다. 이 사람도 지혜가 열리는 새론 말씀을 받을 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느낀다. 사람이라면 하느님과의 사랑에서 기쁨을 느껴야지 세상에서의 기쁨은 잠시 속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너 없이는 못산다면서 혼인까지 한 남녀의 사랑이 몇 해나 이어지드란 말인가? 헤어진 가시버시가 연애할 때의 그 황홀함을 회상하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그 때 내가 미쳤지라며 역겨워 할 것이다.

이른바 구경각(究竟覺)을 이룬 예수 석가는 거짓나인 제나를 버리고 얼나를 참나로 깨달은 것은 일치한다. 거기에 다석 류영모도 얼나를 깨달아 구경각을 이루어 예수 석가가 걸어간 길이 가장 바른 길임을 증거 하였다. 다석은 마가복음 32829절의 예수 말씀을 존중하였다. 예수가 영성신앙임을 거듭 확인한 말로 생각하였다.“나는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짓든 입으로 어떤 욕설을 하든 그것은 다 용서받을 수 있으나 얼(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그 죄는 영원히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다.”(마가328~29)

사람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 받는 길은 거짓 나로 멸망의 생명인 제나를 부정하고 참나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솟나 땅에 어버이 자식인 제나(몸나)에서 하느님 아들인 얼나로 생명혁명을 이루는 것이다. 예수는 이를 간결하게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5:24)고 말하였다. 사망은 죽음의 제나를 말한 것이고 생명은 영원한 생명 얼나를 말한 것이다. 이 진리가 예수 영성신앙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 예수의 이 말씀은 사라지고 들을 수 없다. 예수가 경고한 성령을 모독하는 교회가 된 것이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말이 있다. 양머리를 내걸어놓고 팔기는 개고기를 판다는 것이다. 2천 년 동안 기독교회는 예수 이름만 걸어 놓고 실제로는 바울의 대속교의만 외쳐왔다. 예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면 한 주일만이라도 예수의 가르침을 바로 가르치고 바로 배워야 할 것이다.

 

(2) 다석은 하느님을 참나로 깨달았다.

 

생물학자들은 사람도 유인원(類人猿)에 속하는 짐승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사람이란 원숭이는 여느 짐승과는 다른 점이 있다. 먹고() 싸우고() 새끼 치는() 일은 분명 짐승들과 다름이 없다. 짐승과 다른 점도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형이상학을 이룬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일찍 파스칼은 사람에게 아름다운 별명을 붙였으니생각하는 갈대라 하였다. 몸은 갈대처럼 연약하나 맘은 놀라우리만큼 거룩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빔이요 얼이신 우주의 임자요 만물의 근원인 하느님도 알아내었다. 그런데 문제는 생각하는 갈대란 별명 값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갈대 노릇을 훌륭하게 한 사람들을 성현(聖賢)이라고 높이기도 한다. 역사를 보면 반대로 성현들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짐승이하의 짐승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다석 류영모가 한 말이다.

사람이 어릴 때는 좋은 일 나쁜 일을 가리지 못한다. 사리를 분별할 줄 알면 어리다고 안한다. 그래서 어려서 하는 노릇은 짐승 같다고 한다. 짐승은 먹는 것, 싸우는 것, 짝짓는 것 밖에 모른다. 그리하여 태어나자마자 젖을 빨려하고 유치원생만 되어도 짝짓기에 관심을 보인다. 사춘기에 이르면 왼통 식색(食色)에 관심이 가있다. 예수 석가는 짐승인 몸을 지니었으나 짐승이기를 마다하였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도 짐승노릇 밖에 못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짐승 이하의 짐승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짐승은 얼이 없지만 아주 못된 짓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이라도 하느님이 주시는 얼이 끊어지면 짐승밖에 못된다. 어른이 되어서도 생각도 없고 진리도 모르면 짐승밖에 더 되겠는가?”(류영모다석어록)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은 생각하는 데 있음이 분명한데 사람 가운데 생각을 가장 바르게 그리고 깊숙이 한 사람이 누구일까? 이 사람은 예수 석가라고 생각한다. 말할 것도 없이 노자(老子) 장자(莊子) 공자(孔子) 맹자(孟子)도 잘 생각한 사람들이다. 두 사람만 골르라면 예수 석가를 들겠다. 기발한 발상으로는 장자(莊子)도 들 것이다. 사람이 생각을 하되 가장 빨리해야하고 가장 소중한 생각은 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나 스스로 있는 나가 아니다. 누군가가 있게 해서 있는 나임이 분명하다. 그 있게 한 이가 나의 나 참나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있게 해서 있는 이 나가 있게 한 나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이를 알아내는 이야말로 생각을 바르게 하는 이요. 잘하는 이라 할 것이다. 예수가 말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태7:7~8)는 우주의 근원이요 나의 임자인 참나를 생각으로 찾으라는 말이다. 석가의 4성제 8정도도 참나를 바르게 생각하여 깨달으란 말이다. 그래서 예수와 석가는 어머니가 낳아 준 제나(몸나)는 거짓나이요 참나이신 하느님이 주신 얼나가 참나임을 깨달았다. 다석 류영모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서는 의심을 안 한다. 그런데 세상살이가 괴로울 때면 불쑥 나를 의심하게 된다. 나까지 의심하게 되면 삶의 문제가 달라진다. 이렇게 괴롭고 아픈 나라는 게 무엇이냐는 것이다. 나를 의심하는 게 짙어지면 나를 부정하게 된다. 성가시기만한 나를 없애버리고 싶어진다. 그래서 맘을 모질게 먹고 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괴로워하면서 재미를 찾으면 나를 참으로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싯달다 태자가 출가하여 여섯해 동안이나 험산 계곡에서 처절한 수행을 한 것은 순전히 나의 나인 참나(니르바나님)를 찾고자 함이였다. 온통인 우주의 임자요 내 존재의 뿌리로 참나인 하느님께로 가는 길은 제 맘속으로 제 생각 속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생각함에 지극한 정성(精誠)을 다해 깊이깊이 생각하여 참나인 얼나를 깨달아야한다. 이것이 예수 석가가 이룩한 자각(自覺)이다. 자각을 이루지 못한 이는 아무리 학문을 쌓아도 지식의 노예일 뿐이다. 자각에 이르면 생각 속에 우주의 임자이신 하느님의 말씀이 나타난다. 그 말씀이 참나의 드러남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맘은 항상 하느님을 생각하는 궁신(窮神)하는 자리에 있어야한다. 우주의 임자인 얼을 알려는 것이 궁신함이다.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나가 얼이다. 거짓 나인 제나(ego)로 죽고 참나인 얼나로 솟나야한다.”(류영모다석어록)

이 땅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생명의 근원이요 임자는 이 땅의 어버이로 알고 살아간다. 그것을 의심한다면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싯달다 태자가 나 자신을 의심하게 된 것은 이 땅의 어버이가 내 생명의 참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생명의 임자라면 나를 낳은 어머니가 어찌하여 낳아놓기 만하고 길러 주어야 하는 어머니의 도리를 하지 않고 세상을 떠나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나란 한 남녀의 소산(所産)이기 전에 온통인 우주(宇宙)의 소산인 것이다. 나를 낳은 어버이도 우주의 소산이다. 우주 없이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을 한 사람들은 거의가 우주를 생각하였다. 스피노자, 칸트, 데카르트, 파스칼, 괴테, 에머슨, 소로, 그밖에도 많은 이들은 우주를 생각하였다. 다석 류영모는 가정집 옥상에 천문을 관측하는 유리집을 지어놓고 천문인 별을 관측하였다. 나와 우주와의 관계를 알고 싶어서인 것이다. 우주는 내 생명의 근원이라 그리워서 바라보는 것이 기쁨이었다. 다석은 가로등으로 밤이 대낮처럼 밝아 밤에도 별을 볼 수 없게 된 것을 슬프게 생각하였다. 깊게 생각하는 이는 하늘에 은모래를 뿌린 듯 빛나는 뭇별 너머에 있는 허공에 이르고 수십조 살알(세포)로 이뤄진 몸나 너머에 있는 얼나에 이른다. 이런 이가 참사람이다.

레프 톨스토이(1828~1910)19세기 사람이다. 19세기는 인류역사에서 과학이 가장 눈부시게 발전하여 놀라운 물질문명을 건설하였다. 과학의 발달로 궁지에 몰린 것이 신화에 쌓여 있던 종교였다. 그리하여 지성인들이면 종교를 한심하게 생각하면서 머지않아 종교는 사라지고 과학이 떨친다고 하였다. 과학의 눈부신 발전에 주눅이 들린 종교인들은 반론을 펼친 용기도 지혜도 보이지 못하였다. 톨스토이는 신학자도 사상가도 아닌 소설을 쓰는 문인이었다. 세상적으로는 크게 성공한 대문호로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인 쉰 살이 되어서 나란 뭣인가라는 회의가 일어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잃어 염세에서 오는 우울증으로 자살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톨스토이는 버렸던 종교로 다시 돌아와 소설은 접어두고 철학 종교에 몰입하였다.우리가 어찌 할꼬?」「교의신학해부비판등 저서를 내놓아 마하트마 간디를 비롯한 세계의 양심적인 지성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 톨스토이가 참된 종교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종교의 본질은 나와 나의 근본인 우주와의 관계를 밝혀 규정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우주와 나와의 관계는 과학이 밝혀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주와 나와의 관계가 규정될 때 삶의 의미와 가치가 확립되어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염세의 우울에 빠진 것이 그 때문이었다. 사람의 무지에서 온 신앙대상의 신화화, 우상화나 사목의 욕망에서 빚어지는 위선과 수탈은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 석가와 성현들에 의해 가르쳐진 진리의 말씀은 시대의 흐름에도 달라지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사물(事物)이나 현상(現象)에 대한 관계 이외(以外) 시간과 공간으로 영원하고 무한한 온통(전체)인 우주와 나와의 관계는 오직 종교가 알아서 규정한다. 사람은 자신을 혼연일체로 온통인 우주의 일부로 느낀다. 그 우주가 우리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 우주로부터 내가 사람으로서 행하여야 할 바의 가르침을 받아야한다. 그 먼저 우주와 나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종교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종교는 이성적인 사람이나 이성적인 인류가 살아감에 있어서 없어서 안 되는 존재요 조건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진리는 없어지지 않는다. 참된 종교는 사람을 포용하고 있는 영원 무한한 우주 곧 하느님과 사람의 영성적인 지식에 일치하게 세워진 관계는 우리 삶의 본성이다. 그 본성으로 내 생명이 영원 무한한 우주정신과 이어지고 맺어져 나의 삶 우리의 삶이 바르게 인도되며 바르게 나아가게 된다.(레프 톨스토이종교란 무엇인가)

영국의 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오히려 고등종교가 새로 나오기를 자녀를 못 둔 가정에서 자식 얻기를 바라듯 하였다. 토인비는 과학자들이 만든 핵폭탄에 의해 인류가 멸망할까 걱정하였다. 이 인류 멸망의 위기는 인류의 도덕정신이 향상해야만 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사람들의 도덕의식을 높일 수 있는 오직하나의 길은 고등종교의 출현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라 믿었다. 토인비는 인류역사를 일생동안 연구한 사학자이다. 20세기 인류 멸망의 위기는 물질문명은 토끼처럼 빠르게 발전하고 정신문화는 거북이처럼 느리게 발전하여 벌어진 틈이 너무 지나쳐 일어나 부조화 때문이라고 하였다. 정신문화의 발전은 고등종교의 출현에서만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역사 연구로 알아낸 역사의 회전 법칙을 가지고 예측하는 것이었다. 고등종교는 두 문화(동서의 문화)가 만나는 극동지역과 인도지역에서 나타나리라고 예언까지 하였다. 기독교, 불교는 기성종교로서 고등종교로 분류된다. 토인비는 이미 기독교 불교조차 고등종교의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된 것으로 보았다. 새로 탄생할 고등종교에는 반드시 마하트마 간디의 무저항의 진리파지 정신이 들어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고등종교가 나와야 한다는 것은 참나인 얼나를 깨달은 이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나 석가처럼 제나를 극복하고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를 받은 이가 나온다는 말이다. 종교는 얼인 진리를 말할 때와 몸인 조직을 말할 때가 있다. 토인비가 말하는 고등종교나 톨스토이가 말하는 참된 종교는 얼인 진리 곧 하느님의 말씀(로고스)이 사람의 인격인 생각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다. “예수 석가의 나는 당신들 개인의 나이나 참나로 깨달은 공통의 얼나로 생각하여야 한다. 모두가 하느님께서 주신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을 참나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진리의식(로고스의 말씀)은 내 생각()에서 나왔으나 제나(ego)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느님(니르바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믿은 것이 예수 석가의 생각이다. 사람은 하느님(니르바나님)으로부터 진리의식을 받아서 짐승인 여느 사람에서 하느님 아들인 붓다나 그리스도가 된다. 하느님이란 종당엔 나다. 참나다. 제나는 거짓나다. 거짓나는 죽어야한다. 참나인 얼나가 내게 있으니 하느님도 계신다. 하느님이 참나다.”(류영모다석어록)

전구가 아무리 많아도 전원은 하나이듯 하느님 아들인 성자는 많아도 얼의 근원은 하나인 하느님이시다. 석가가 말한 다르마(Dharma)의 근원은 니르바나(Nirvana)라는 말도 같은 말이다. 짐승의 성질인 수성(獸性)을 좇아 사는 제나(몸나)의 사람들은 우주와 나와의 관계를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도 않는다. 짐승은 생각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도 짐승들처럼 나와 우주의 관계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다. 학교교육이 잘못되어서 그렇다. 온전한 짐승인 아이들에게 생각하는 힘을 길러 생각하는 사람으로 길러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고 있다. 짐승인 몸뚱이만 키우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인성교육은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우리는 전체에서 나온 부분이다. 부분은 전체를 밝혀야 한다. 부분은 전체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분은 전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전체를 아버지라면 부분은 아들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전체인 온통에 대해서 걱정(생각)하는 이가 없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부분이 전체를 아는 것이 부분의 삶의 의미요 가치이기 때문이다.”(류영모다석어록)

짐승들처럼 생각 없이 사는 이들은 번뇌할 일이 없다. 그러나 예수 석가처럼 자신이 우주의 소산(生)임을 아는 이는 우주는 누구이며 무엇인지 알아야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나가 누구인지 알아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알게 된다. 예수 석가가 험산이나 광야에서 목숨 걸고 헤매며 명상(생각)을 한 것은 이 때문이다. 몸나의 근원인 어버이가 누군지 모르는 고아만 되어도, 나가 누구인지 몰라서는 삶에 의미를 모르게 되고 보람이 없어진다. 거짓 어버이를 몰라도 그럴진데 참나의 어머니(아버지)를 모르고 어찌 살 수 있으랴. 사람의 삶은 아버지 찾기다. 아버지가 나의 참나인 것이다. 참나를 못 찾으면 살아도 헛산 것이다. 짐승인 몸나로는 자기에게 젖을 먹여주는 이가 어머니요 나는 그 어머니의 새끼인 것이다. 그러니 자신에 대해서 의심을 일으킬 까닭이 없다. 어려서 외국으로 입양된 이들이 자라서 고국으로 돌아와서 나를 버린 어머니(아버지)를 찾으려고 한다. 어머니(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니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니 살아도 뭣 때문에 사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거짓 근원에 지나지 않는 어머니(아버지)를 몰라도 이러하거늘 참

근원인 우주가 누구인지 모르고서는 나가 누구인지 모른다. 나가 누구인지 모르니 살을 의미도 가치도 있을 수 없다.

예수 석가는 참 생명의 근원인 우주로부터 귀로 들을 수 없는 말씀을 듣고서 참 아버지(어머니)를 알고 나는 그 어머니(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기에게 어머니가 주는 젖이 생명이듯 예수 석가에게는 우주의 어머니(아버지)가 주는 진리의 말씀이 새 생명이었다. 말씀의 생명은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왜냐하면 우주의 어머니(아버지)는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인 얼이요 빔이기 때문이다. 노자와 석가는 모든 존재의 근원인 우주를 어머니라 하였고 예수와 장자는 아버지라 하였다. 여기서는 노자의 어머니와 예수의 아버지만을 보기로 든다. 노자(老子)는 하느님()을 아예 여자로 나타내어 곡신(谷神)이라 이름 하였다. 자는 물(오줌)이 쏟아져 나오는 여자의 음부를 상형한 상형의 글자이다. 또 현빈(玄牝)이라 하였다. ()은 암소 빈자이다. ()은 아득한 하늘을 나타낸다. 이도 여자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나지않고) 죽지 않는다. 谷神不死

이를 일러 하늘 어머님이라 한다. 是謂玄牝

하늘 어머니의 구멍(허공)玄牝之門

이를 하늘 땅의 뿌리라 이른다. 是謂天地根

(老子 6)

 

나는 홀로 남과 달라서 我獨異於人而

하늘 어머니의 말씀 먹기를 소중히 여긴다. 貴食母

(老子 20)

 

노자가 하늘 어머님(谷神,玄牝,天母)이 우주를 내신 우주의 어머님을 분명히 밝히고서 하늘 어머님(하느님)의 말씀() 먹기를 소중히 한다고 말하였다. 이는 예수가 말하기를 사람이 먹거리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얼의 말씀으로 산다.”(마태4:4)고 한 말과 같다. 류영모는나는 하느님의 말씀 밖에 믿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노자, 예수의 말과 같은 말이다. 아기에게 어머니의 젖밖에 없다. 젖이 곧 어머니인 것이다. 얼나를 깬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생명이요 생명의 양식이다. 이것을 바로 안다면 하느님이 있느니 없느니 따위의 망발은 입에 올리지 않을 것이다.

예수는 하늘 아버지라고 하였다. 하느님은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성별을 초월한 이다. 상대세계에 살아 상대계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편의상 알기 쉽게 하느님께 아버지나 어머니를 붙인 것이다. 예수가 말하기를하느님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다”(요한10:39)고 하였다. 만유(우주)보다 큰 것은 만유를 품안에 품고 있는 허공이시다. 허공에 무슨 남성, 여성이 있을 까닭이 없다. 또 예수는하느님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요한10:29)고 말하였다. 하느님은 가장자리 없는 허공에 충만한 얼(성령)이시다. 그 얼의 한 긋이 내게 온 얼이다. 그러니 하느님 아버지는 나보다 크시다는 말은 지극히 당연하고 진리인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는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고 하였다. 예수의 몸나는 땅의 어버이로부터 받았지만 예수의 얼나는 얼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얼과 예수의 얼은 한 얼생명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몸나는 땅에 있었으나 얼나로는 하느님의 나라에 있었다. 이에 결론을 내리자면 우주의 임자이신 하느님은 누구인가? 참나이시다. 하느님으로 인해 있어진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얼나로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무한 허공에 안겨 있는 만물은 하느님에 의해 있어지고 없어지는 하느님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어져도 없어진 것이 아니다. 나도 난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석은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 아버지를 모신 아들인 얼나가 참나라고 보는 이것이 예수가 인생을 보는 눈이다. 절대의 아버지 하느님만이 계셔 그의 아들 노릇하는 게 참나인 얼나이란 것이다. 나도 예수와 같은 인생관을 가지고 싶다. 이런 점에서 예수와 나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죽음이란 참으로 없다. 하늘에도 땅에도 죽음이란 없는 것인데 사람들은 죽음의 노예가 되어있다.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죽음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하느님이 참나이기 때문이다. 내 맘속에 있어 하느님의 얼이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얼나도 하느님이시다.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내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 일을 하신다(요한14:10)고 하였다

 

(3) 다석이 나에게 홀로서기를 가르쳤다.

 

다석 류영모(1890-1981)는 스스로 나는 19세기 사람이라고 하였듯 조선왕조 말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 때는 좀 넉넉하게 사는 집 사랑방에 차린 서당 훈장에게 유교의 한문 경전을 배우는 것이 교육이었다. 그러니 서구식 학교 교육제도는 아예 없었다. 어린이 다석도 서당에 가서 통감과 맹자를 배웠다. 뒤에 처음으로 3년제 초등학교가 세워져 수하동 소학교를 다녔다. 연동교회에 다니다가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경신학교를 세우게 되어 경신학교를 다녔다. 그것이 받은 교육의 모두이다. 정주에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 교사를 그만 두고는 대학공부를 하고자 일본 도쿄에 유학을 갔다. 그때는 한국에는 대학교라고는 없었다. 도쿄에서 대학입시 자격을 얻고자 도쿄 물리학교에 2년째 다니다가 신라의 원효처럼 생각이 바뀌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일본에서는 마르크스의 정치혁명 사상과 톨스토이의 종교혁명사상이 풍미하고 있었다. 다석은 오산학교 교사 때 함께 오산학교 교단에 선 동료교사 춘원 이광수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톨스토이 전집을 다석도 읽어 톨스토이를 잘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 다시 톨스토이를 접하게 된 다석은 완전히 톨스토이언(tolstoian)이 되었다. 톨스토이가 지은 교의신학 해부비판의 핵심은 기독교가 예수정신을 버리고 유대교 랍비인 바울의 교의신학으로 변질된 예수교가 아닌 바울교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참된 예수의 진리 사상을 좇으려면 집에서 자기 스스로 성경 공부를 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에 참되게 살려면 시골에 가서 농사짓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앙적인 진리정신과 서민적인 근로정신이 일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영향으로 일본 도찌기 현에는 톨스토이 정신을 좇는 톨스토이언들이 모여서 농사짓고 사는 공동체를 세우기도 하였다. 다석 류영모의 일생은 이 때 결정되었다. 다석은 시골로 돌아가기(歸農村) 예수께 돌아가기(예수)로 일생을 살다 떠났다. 그리하여 다석은 교회 밖에서 예수를 쫓는 불량(不良) 크리스천( bad christian)이 되었다. 다석 스스로가나는 비정통이요 내 소리는 마귀의 소리인 줄 알고 들으시오라고 먼저 말하니 교회 쪽에서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다석은 그 당시에 경기도 땅이요 한적한 시골인 비봉산 밑 옛터골(舊基洞)로 출애급을 하였다. 무명바지저고리에 고무신을 싣고 걸어 다니어 온전한 촌놈이었다. 사람들이 다석을 촌놈으로 대해주는 것을 큰 대접으로 기뻐하였다. 거기서 씨알사상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 다석은 대학교에서 유명한 교수에게 배운 적이 없었다. 스스로 나는 학교 공부를 못하였다고 말하였다. 혼자서 공부하여 스스로 구경각을 이루었다. 거기에 성령이신 하느님의 가르침이 있었다. 하느님이 다석의 오직 한 분인 스승이었다. 다석은 이렇게 말하였다. “아버지! 아버지!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내가 부른다. 아버지의 모습을 이승에서는 볼 수 없으나 아버지는 내 맘에 있다. 아무 것도 없는 빈 맘속에 온다. 나의 임자 되시는 하느님은 과대망상이 아닌 극기명상(克己暝想)으로 찾아 맘속에 모실 것이다. 하느님이 참나임을 믿는 이는 이것을 계속 믿는다. 하느님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이 참 사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생각한다. 그러나 나만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 건네주시는 것이 없으면 내게서 거룩한 생각이 나올 수 없다.”(류영모다석어록)

대학교에서 배워 구경각을 이룰 수 있다면 대학교에서 성자(하느님 아들)들이 쏟아져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학을 나온 이들 가운데 하느님 아들이 나왔다는 소리를 못 들었다. 신학대학조차 마찬가지다. 하버드 대학을 나온 헨리데빗 소로가 하느님 아들에 가까운 생각과 생애를 보였을 뿐이다. 다석도 소로를 좋아하여 소로에 대한 한시를 일기에 적어 놓았다. 소로가 하느님 아들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대학을 졸업한 뒤에 자연 속에서 하느님의 글월을 읽고 스스로가 정신적으로 자라고 깨달은 것이다. 소로야말로 씨알의 본보기를 잘 보여주었다. 멀리는 예수 석가처럼 노자 장자처럼 살아야 씨알의 삶이다. 가까이는 톨스토이 간디처럼 소로나 다석처럼 살아야 씨알의 삶이다. 씨알의 삶은 곧 하느님 아들의 삶이다.

예수도 학교공부를 못하였다. 그 땐 바울이 다녔다는 랍비학교가 있었다. 그리하여 예수는 사람들에게 무학(無學)하다는 말을 들었다. “이 사람이 배우지 아니 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요한7:15)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께 배워야 한다고 말하였다.“아버지께 듣고 배운 자마다 내게로 오느니라.”(요한6:45)

석가는 어릴 때는 태자라 부유하니 가정교사에게 배웠다. 뒤에는 석가를 가르칠 선생이 없었다. 혼자 공부를 하여 큰 깨달음을 이루었다. 공자는 가난하여 스승 밑에서 공부하였다는 말이 없다. 사막이 많은 중동 지역에는 지나가는 나그네가 날 저물면 남의 집에 신세를 질 수밖에 없다. 나그네가 유식하면 집주인이 자식들을 나그네 선생에게 글을 배우게 하였다고한다. 공자는세 사람이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착한 이는 가려 좇고 착하지 않으면 고친다.(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논어술이편)고 말하였다. 예수는 아예 땅에 스승이라는 이들은 참된 스승이 못되니 스승님이라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고 참 스승님이신 하느님에게 배우라고 말하였다. “너희는 스승이라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 너희 참된 스승은 하느님이시고 모두는 다 형제니라.”(마태23:7~8) “나는 무슨 일이나 내 맘대로 할 수 없고 그저 하느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판단할 따름이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기 때문에 내 판단은 올바르다.”(요한5:30)

예수와 석가는 수시로 짬을 내어 기도 명상을 한 것은 하느님(니르바나님)과 뜻을 주고받으면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예수와 석가는 기도 명상을 통해 하느님께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이렇게 훌륭하신 스승님께 대가없이 배울 수 있는데 학교를 못가 공부를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예수 석가 공자가 모두 하느님께만 배우고서 인류 최고의 성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장자와 노자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으니 어떤 학습을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예수 석가와 같다고 생각된다. 장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의 스승님이로다. 나의 스승님이로다. 저 깨달은 얼나의 마음을 스승으로 모시면 누가 홀로 구차하게 스승이 없으랴 (夫隨其成心而師之 誰獨且无師乎)”(장주장자제물론편)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이 말없는 가르침(無言之敎)을 주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옛사람들에게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오늘에도 가르치시고 계신다. “물질이 아니다. 내 맘 속에 진리의 빛이다. 이 빛이 밝혀질 때 사람에게 으뜸가는 계시(啓示)는 내 맘속에 나타나는 하느님을 말씀이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알게 된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나타내고자 하는 바람은 이것 때문이다.”(타고르삶의 실험)

다석 류영모는 하느님 아버지의 가르침을 체험(體驗)이 아닌 심험(心驗)한 것을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루하루를 지성껏 살면 무상(無常)한 몸생명이 비상(非常)한 얼생명이 된다. 하루하루를 덧없이 내버리면 인생은 허무 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쉬면서 쉬지 않는 숨처럼 언제나 정신이 깨어있는 사람은 늘 제나(ego)를 죽임으로써 얼나가 나타난다. 사람은 내 맘속에 오신 하느님이신 얼나를 위하여 맘과 뜻과 힘을 다해 일함으로써 삶의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자기의 사명(使命)으로 알고 이를 이루기 위해 죽어도 좋다는 사람이어야 한다. 내 맘속에 얼나가 하느님과 하나 되게 중심을 잡고 사는 삶이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삶은 언제나 옛것을 넘어서 새롭게 되어 온고지신(溫故知新)해야 한다. 옛 껍질을 벗고 새로운 삶을 사는 창조적인 삶을 위하여 더 깊이 생각하고 더 높게 살아야 한다.”(류영모다석어록)

이 사람이 27살 때의 일이다. 다석 스승의 서울 종로 YMCA 연경반 강의에서 어머니가 낳아준 몸나는 참나가 아닌 거짓나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얼생명이 참나입니다.”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나에게는 어머니가 낳아주신 몸나 밖에 없는데 이게 참나가 아니라면 참나는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나 자신이 공중분해가 되는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나 참나인 얼나는 좀처럼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그렇다고 거짓나인 몸나를 버릴 수도 없다. 버린다면 일본 제일고 학생인 후지무라 미사오(藤村操)처럼 일본의 명승지 닛꼬(日光)에 있는 가겐 폭포에 몸을 날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후지무라 미사오는 우주의 비롯과 나 자신의 비롯을 찾고자 하였으나 쉽게 밝혀지지 않는 답답함에서 미련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우주의 비롯이요 나 자신의 비롯은 이미 2 천년 전에 예수 석가가 진실하고 명확하게 밝혔다. 허공이며 성령이신 하느님이 우주와 나 자신의 으뜸인 근원이시다. 그런데 예수 석가의 가르침을 듣고서도 알지 못하는 이가 거의 대부분이다. 장자(莊子)는 이렇게 말하였다.

온통이신 저 얼님(하느님)은 느껴지고 믿어지나 함이 없고 꼴이 없다. 얼을 가르쳐 주어도 스스로 깨닫기 앞서는 받을 수 없다. 깨달을 수는 있어도 보지는 못한다. 얼은 스스로가 밑동이고 스스로가 뿌리이다. 하늘 땅이 있기 앞서 옛부터 이미 있었다. 온통인 얼로서 하느님이시다. 하늘을 낳고 땅을 낳았다.(夫道 有情有信 無爲無形 可傳而不可受 可得而不可見 自本自根 未有天地 自古以固存 神鬼神帝 生天生地) ”(장주장자대종사편)

장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수는 있어도 받을 수 없다(可傳而不可受)고 하였다. 예수는 목숨을 바치며 가르쳐 주었는데 제자들이 알아듣지를 못하였고, 석가는 일생을 바치며 가르쳐 주었는데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였다. 스승 다석이 시간 가는 것을 잊으며 가르쳐 주었는데도 나는 알아듣지를 못하였다. 어머니가 낳아준 제나(ego)밖에 모르고 참나인 얼나에 대해서는 눈앞이 깜깜할 뿐이었다. 그래도 빠지지 않고 다석 스승의 연경반 모임에는 나가서 들었다. 그래서 지식으로는 어느 정도 이해하기에 이르렀다. 그럴수록 정신적인 목은 점점 더 말라왔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얼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한7:37~38)고 한 예수의 말씀이 내게 절실하였다. 그래서 금요 Y 모임만으로는 부족하여 다석 스승님께 글월(편지)를 올리기도 하고 구기동 집으로 찾아 가기도 하였다. 그 때 이 사람은 다석 스승에게 꽤 성가신 구도자였으리라 생각된다. 송구한 생각이 없지는 아니하였으나 힘써 덤비지 않으면 깨우치지 않고 애써 안간힘 쓰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는다(不憤不啓不悱不發)”(공자논어술이편)는 공자의 말씀에 용기를 내었다. 글월을 올리면 거의 회신을 보내왔다. 어떤 때는 금요 연경반 모임에서 만났을 때 필답대신 구답()을 해주기도 하였다. 집으로 찾아가면 다석 스승의 일기장(다석일지)을 펴놓고 연경반 강의 때와 다름없이 두어 시간씩 혼자 앉혀놓고 말씀을 해주었다. 자꾸만 글월을 보내는 것이 송구스러워 변명을 하였다. 스승님께 글월 올리는 것은 어미 소의 젖이 더 잘나오게 하려고 송아지가 제 머리로 어미 소 젖무덤을 드려 밧는 뜸베질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다. 스승님의 말씀이 잘 나오게 하려는 무엄한 짓이란 말이다. 다석 스승은 글월 회답 대신에 금요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이 사람에게 다가오시더니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시며 뜸베질은 저 위(하느님)에 대고 해야지 내게 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야라면서 웃음을 지으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느님께 뜸배질을 하려고 새벽 일찍 일어나 명상기도에 힘썼다. 기도에 힘써도 장자(莊子)가 말한 명상의 체험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사흘 뒤에 세상을 잊을 수 있었다. 이레 뒤에 능히 만물을 잊었다. 아흐레 뒤에는 제나(ego)를 잊었다. 이미 제나를 잊은 그 다음엔 마음속이 훤히 뚫렸다. 마음속이 환히 뚫리니 얼나를 볼 수 있었다. 얼나를 깨달으니 옛날과 이제 없어졌다.(시간초월) 옛과 이제가 사라진 뒤에 죽지 않고 나지 않는 하늘나라에 들어갔다(三日而候能外天下 已外天下矣 吾又守之 七日而後能外物 已外物矣 吾又守之 九日而後能外生 已外生矣 而後能朝徹 朝徹 而後能見獨 見獨 而後能无古今 无古今 而後能入於不死不生 -생사의 제나 초월)”(장주장자대종사편)

1965년 어느 봄날에 구기동 150번지에 있는 스승님 집으로 혼자 찾아갔다. 혼자 스승님의 강의를 다 듣고 일어서는데 다석 스승님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뜻밖의 말씀을 들었다. “우리가 사귄지도 여러 해가 지났는데 이제는 홀로서기를 해요 각기 제 노릇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 되요. 나를 찾아 올 생각도 말고 편지할 생각도 마시오. 이를 옛사람들은 말을 끊는다하여 단사(斷辭)라 했어요.”나로서는 마른하늘에 날 벼락같은 놀라움이었다. 내가 젖떼기를 할 만큼 자랐다는 것인가? 이제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하느님 말씀을 받아먹으라는 가르침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일을 겪고 보니 한편으로 스승님이 더욱 존경스러우면서 한편으로 눈시울이 젖어지도록 서운하였다. 그리하여 5년 동안 단사 기간을 보냈다.

예수는 세상을 떠날 때 제자들에게 내가 없게 되면 하느님이 보내시는 성령(얼나)에게 배우라고 가르쳤다. 석가는 세상을 떠날 때 제자들에게 내가 떠난 뒤에 하느님이 보내시는 법성(얼나,自燈明 法燈明)을 스승 삼으라고 가르쳤다. 예수와 석가 말이 같은 말이다. 다석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얼나에 나아가기를 가르쳤다. “하느님께서 기르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말씀을 먹이심이다.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먹는다면 또 어찌 사람이 지닌 짐승성질(獸性)을 쓰랴(일부생략) 작고도 작도다! 사람의 몸나! 멸망하기에, 크고도 크도다! 사람의 얼나! 홀로 하늘나라를 세운다(天鬻也 天鬻者 天食也 旣受食於天 又惡用人, 眇乎小哉 所以屬於人也 謷乎大哉 獨成其天)”(장주장자덕충부편) 다석 스승이 이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단사(斷辭)를 선언한 것은 이 사람이 다석의 제자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받아먹고 정신적으로 자라서 하느님의 아들 노릇을 하라는 가르침이었다. 바로 예수가 제자들에게 바란 것이요 석가가 제자들에게 바란 것이다. 예수가 제자에게 준 마무리 가르침은 더욱 놀랍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좋다. 그러면 너희가 제나에서 얼나로 솟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요한16:7~13) 이제부터 너희는 나의 제자가 아니라 나의 벗이다.”(요한15:14~15)“하느님 아버지께 저희들을 부탁하오니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해 주신 것같이 저희도 사랑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희들 하느님께 보내신 얼로 솟나 하느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하느님 아들 노릇을 잘하게 하옵소서.”(요한 17)

이 사람이 언제쯤 제나를 극복하고 얼나를 깨달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으나 뒤에 오는 이들에게 참고할 이정표가 될 수 있기에 적어본다. 다석 스승님의 서울 종로 YMCA 연경반 강좌에서 어머니가 낳아 준 나는 참나가 아니라는 다석님의 말을 들은 지 20년이 지난 1982년 가을 이 사람이 48 살이 되어서야 얼나를 체험하게 되었다. 다석님께서 그 해 23에 돌아가시어 안 계시었다. 류자상님 염락준님과 함께 고양 쪽에서 북한산을 올라가는 도중에 마음속이 확 열리는 듯한 이른바 활연관통(豁然貫通)을 느꼈다. 장자(莊子)는 얼나()의 깨달음을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바를 알아 사람이 해야 할 것을 알면 하느님 아들에 이른 것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바를 아는 이는 하느님이 속알인 얼나를 낳으신 것이다. 사람이 해야 할 것을 아는 이는 아는 바의 앎을 가지고서 알지 못하는 바의 앎을 기르니 마침내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생사를 넘어선다. 이것이 앎의 으뜸에 이름이다.(知天之所爲 知人之所爲者 至矣 知天之所爲者 天而生也 知人之所爲者 以其知之所知 以養其知之所不知 終其天年而不中道夭者 是知之盛也)”(장주장자대종사편)

이 사람은 다석 사상으로 하느님 아버지를 찾아 가까이 다가가서 하느님께 귀속됨이 삶의 지고한 사명으로 알고 산다. 다석 사상 연구와 실행으로 살아온 나의 평생에 뉘우침은 없다.

 

(후기)

다석의 구경각에서 이뤄 놓은 사상의 진가를 일찍부터 알고서 이 사람에게 성천 아카데미에서 강의토록 하신 성천 류달영 선생님께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리고 다석학회를 만들어 다석일지 연구를 계속하여 다석시조 이천 수를 윤문하여 출판하기에 이르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신 정양모 교수님께 찬사를 드리고 싶다. 또한 미국 LA에서 다석사상 강좌를 개설하여 여러 해 동안 이어오고 있는 류기종 교수님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밖에 다석 및 사상에 관한 저서를 낸 바 있는 박재순 교수, 이정배 교수, 김흡영 교수, 이기상 교수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 2016.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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